【투데이신문 문영서 기자】 반도체 호황에 힘입어 세수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정부가 교육교부금과 기초연금 등 의무지출 구조조정에 나섰다. 정부는 증가한 세수를 ‘미래대응기금’으로 묶어 인공지능(AI)과 청년, 지방 등에 투자한다는 구상이지만, 자산·소득 양극화 심화 우려가 커지는 상황에서 사회안전망을 둘러싼 논란도 커지고 있다. 미래 성장동력 확보와 현재 취약계층 지원 사이에서 재정 운용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지가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26일 국세청과 기획예산처에 따르면 올해 1~5월 누계 총수입은 330조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50조2000억원 증가했고, 국세수입은 199조9000억원으로 27조5000억원 늘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의 실적 개선으로 법인세 수입이 3조9000억원 증가했고, 증시 활황에 따른 증권거래세도 4조1000억원 급증했다.
시장에서는 올해 초과세수가 최대 20조원에 이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기업 단위에서도 반도체 호황에 따른 세수 기여가 확인된다. SK하이닉스의 지난해 경제 간접 기여성과는 20조3561억원으로 2024년보다 69.8% 증가했고, 이 가운데 납세액은 9조5329억원으로 168.2% 급증했다. 반도체 기업의 실적 개선과 성과급 지급이 법인세와 근로소득세 증가로 이어지면서 세수 확대를 이끌고 있다는 분석이다.
‘초과세수’ 대신 ‘추가세수’…미래대응기금 조성 추진
정부는 늘어난 세수를 재원으로 ‘미래대응기금’을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AI 혁명과 반도체 호황으로 전례 없는 추가 세수가 발생할 수 있다고 밝히고, 이를 청년·신성장동력·지방·교육 등 4대 분야와 반도체·AI 데이터센터·피지컬AI 등 3대 메가프로젝트에 투입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정부는 이 과정에서 기존의 ‘초과세수’ 대신 ‘추가세수’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초과세수가 단일 회계연도의 세입예산 전망치를 웃도는 세수라면, 추가세수는 장기적인 세입 추세를 넘어 증가한 세수라는 설명이다. 현행 국가재정법상 초과세수를 포함한 세계잉여금은 국가채무 상환 등에 우선 사용하도록 규정돼 있지만, 정부는 반도체 호황에 따른 세수 증가가 수년간 이어질 수 있는 만큼 구조적인 증가분을 별도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내년도 국세수입은 5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며, 2027년도 예산안도 올해보다 10% 이상 늘어난 800조원대 규모로 편성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세수 증가로 재정 여력이 커지는 동시에 정부가 기존 지출 구조를 재편하는 작업도 본격화되는 모습이다.
지출 구조조정 칼끝, 교육교부금·기초연금으로
정부는 세수 확대와 함께 역대 최대 규모의 지출 구조조정도 추진하고 있다. 기획예산처 박홍근 장관은 모든 재정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해 재량지출의 15%, 의무지출의 10%를 감축하고 전체 사업의 10%를 폐지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를 통해 약 50조원 규모의 지출 구조조정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실제 올해 처음 도입된 통합 재정사업 성과평가에서는 전체 평가 대상 사업의 36.2%인 901개 사업이 감액 또는 통폐합 대상으로 분류됐다. 최근 5년 평균 미흡 사업 비율인 15.8%를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이와 더불어 구조조정 대상으로 거론되는 항목 중 지방교육재정교부금과 관련한 논쟁 또한 이어지고 있다. 현행 제도는 내국세의 20.79%를 시·도교육청에 자동 배분하는 구조로, 학령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도 세수가 늘면 교부금 규모가 함께 증가하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기획예산처는 내국세 연동 구조 자체를 손질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교육계는 교부율은 유지하되 영유아와 고등교육 등으로 사용처를 확대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교원단체들은 교부금 개편 논의 중단을 요구하며 반발하고 있다.
기초연금도 개편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정부는 현재 65세 이상 소득 하위 70% 노인에게 지급하는 기초연금을 저소득층에 더 많이 지원하는 ‘하후상박’ 방식으로 개편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정부는 복지 등 필수 지출은 구조조정 대상에서 제외하고 제도 개선이 가능한 분야를 중심으로 감축 규모를 검토한다는 입장이지만, 교육교부금과 기초연금, 구직급여 등 사회안전망과 맞닿은 항목들이 논의 테이블에 오른 만큼 논란은 이어질 전망이다.
세수는 늘지만…한은 “자산·소득 양극화 동시에 심화”
이 같은 세수 증가와 지출 구조조정이 동시에 진행되는 가운데 한국은행(이하 한은)은 자산과 소득 양극화가 함께 심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은에 따르면 순자산 지니계수는 2017년 0.584에서 지난해 0.625로 상승했다. 처분가능소득 기준 소득 지니계수도 2023년 0.323에서 2024년 0.325로 올랐다. 부동산 자산이 고연령층에 집중되는 가운데 소득 격차도 다시 확대될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은은 IT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성장과 비IT 부문의 정체가 맞물리면서 산업 간 임금 격차가 확대되는 ‘K자형 성장’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반도체 등 첨단산업의 호황이 세수 증가와 일부 고소득층의 소득 개선으로 이어지는 반면, 성장에서 소외된 산업과 계층의 상대적 처지는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미래대응기금은 반도체 호황으로 늘어난 세수를 AI와 청년, 지방 등 미래 성장동력에 투자하겠다는 구상이다. 다만 재원 마련 과정에서 교육교부금과 기초연금 등 국민 생활과 직접 연결된 지출까지 구조조정 대상으로 거론되면서 사회안전망 약화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특히 한국은행이 자산과 소득 양극화가 동시에 심화되는 ‘복합 양극화’를 지적한 상황에서, 성장산업에서 발생한 세수 증가분을 미래 산업에 투자하는 동시에 양극화 심화에 대응할 재원을 어떻게 배분할지가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늘어난 세수를 미래 투자와 사회안전망 강화에 어떻게 나눌지를 두고 향후 논의가 이어질 전망이다.
충남대 경제학과 정세은 교수는 “반도체 호황으로 발생하는 세수를 일시적인 수익으로 규정하는 순간, 해당 재원은 미래 투자에만 써야 한다는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며 “AI 전환으로 향후 다른 산업에서도 생산성과 세수가 확대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면, 지속적인 세수 증가 가능성을 전제로 미래 투자뿐 아니라 복지 수준을 어떻게 높일지까지 함께 설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지방 공공의료 등 우리나라의 복지 기반은 여전히 취약한데 미래 성장동력에만 재원을 투입해야 한다는 논리가 강조되면 현재의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논의는 뒤로 밀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반면 대규모 재원 확보의 지속성이 담보되지 않기 때문에 당장 필요한 지출에 활용할 필요성이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기본소득정책연구소 오준호 소장은 “대규모 재원을 확보할 기회가 앞으로 자주 오지 않을 수 있는 만큼, 당면적인 문제에 활용하는 것과 장기적인 자산 축적을 통해 국민 배당 재원을 마련하는 것 모두 중요하다”며 “어느 한쪽에 치우치기보다 두 가지 목표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오 소장은 이어 “전체 재원의 절반가량은 국부펀드로 운용하고, 나머지는 지역 양극화 해소와 청년 지원 등에 활용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Copyright ⓒ 투데이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