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중국과 한국의 인재 경쟁을 다룬 TV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한국의 우수한 인재들은 의대로 몰리고, 중국의 인재들은 공대로 향한다는 내용이었다. 시청자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안겨준 이 주제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실감케 했으며, 동시에 중국의 과학기술 성장 속도가 무서우면서도 납득이 되게 만들었다.
1. 만만디와 빨리빨리의 역전
예전부터 외국에서는 한·중·일 삼국을 구분할 때, 한국인은 '빨리빨리', 중국인은 '만만디(慢慢的)', 일본인은 고개를 숙이는 '인사'로 묘사하곤 했다. 이는 각국의 업무 처리 방식과 국민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지금, 적어도 한국과 중국의 상황은 역전된 듯하다. 한국 사회는 여유와 '워라밸'(work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진 반면, 중국은 오히려 속도가 빨라지고 도전성이 강해졌다. 이는 '차이나 스피드(中国速度)'라는 단어로 대변된다.
최근 중국은 국가 차원에서 신상품 개발 시 과감한 도전을 장려한다. 기업들은 실험 과정에서 실패를 빠르게 인정하고, 문제점을 즉각 개선해 신제품에 반영한다. 그 결과, 버전 업데이트와 신제품 출시 주기가 무서울 정도로 짧아졌다.
샤오미와 화웨이의 스마트폰, BYD의 전기차 및 배터리, 이항(EHang)의 UAM 드론, 유니트리(Unitree)의 휴머노이드 로봇, 딥시크(Deep Seek)의 AI 분야 등 첨단 과학기술을 활용하는 산업 전반에서 이러한 속도전이 펼쳐지고 있다. 압도적인 인구를 바탕으로 한 우수 인재 확보,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가, 풍부한 자원과 탄탄한 기초 산업 인프라가 뒷받침되기에 그 발전이 더욱 위협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빨리빨리'의 속도와 '뜨거운 교육열'을 무기로 고속 성장을 이룩했던 한국이, 최근 각종 규제에 발목이 묶이고 전반적인 R&D(연구개발)에 대한 지원마저 줄어든 상황을 고려하면 상당히 부러운 대목이다.
2. 박물관 굿즈와 컬처 크리에이티브 산업
속도전은 첨단 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이 카카오프렌즈와 협업해 선보인 '반가사유상' 모티브 전시 작품과 굿즈가 큰 화제를 모았다. 이전에도 애니메이션 'K팝 데몬 헌터스'에 등장하는 호랑이와 까치, 갓 관련 굿즈들이 불티나게 팔린 적이 있다. 최근에는 조선왕조 국새 키캡 키링 시리즈를 출시하기도 했다.
이처럼 박물관의 문턱을 낮추고 대중과 가깝게 만든 일등 공신은 단연 '굿즈'(goods, 관련 상품)라고 할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조선 왕실 사각등 조립 세트, 국립진주박물관의 두기우기 캐릭터, 국립경주박물관의 신라 토우 마그넷, 국립중앙박물관의 백제금동대향로 인센스 등은 국내·외에 탄탄한 팬덤을 형성하며 온라인과 오프라인 상점에서 모두 연일 매진사례를 기록했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국립박물관 문화재를 연계한 통합 브랜드 '뮷즈(MU:DS)'가 탄생하기도 했다. 이제 박물관 굿즈는 K-컬처 산업의 모범 사례로 당당히 꼽힌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과거 중국의 캐릭터 상품은 촌스럽고 저렴하다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자국 문화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나타내는 '궈차오(国潮)' 트렌드와 맞물려 '원창(文创, 컬처 크리에이티브)'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중국이 '차이나 스피드'를 문화 산업에도 똑같이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중국 고궁박물관은 윙크를 하며 V자를 그리는 강희제 어진 굿즈와 황제의 1인칭 대명사인 '짐(朕)'이 적힌 마스킹 테이프 시리즈 등으로 마니아층을 양산했다. 특히 '고궁 립스틱'은 매번 새로운 컬러 라인업과 함께 고체 향수, 아이섀도 등으로 제품군을 확장하며 출시 때마다 완판을 기록 중이다. 명나라 효단황후(孝端皇后)의 봉황관(鳳冠)에서 영감을 얻은 마그넷 시리즈는 고가임에도 1년 반 만에 300만 개 이상 팔려나갔다. 올해 4월, 중국 국무원 정책회의에서 문화여행부 부부장이 이에 대해 직접 언급했을 정도로 박물관 굿즈는 중국의 핵심 트렌드가 되었다.
요즘 중국의 국립박물관들은 틱톡과 샤오홍슈 등과 같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대중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신제품을 랜덤으로 담은 '블라인드 박스' 형태로 기획하는 등 적극적으로 트렌디하고 대중 친화적인 마케팅을 펼친다.
쓰촨성 삼성퇴(三星堆) 박물관의 청동기 기갑 로봇조립 세트, 간쑤성(甘肅省) 박물관의 청동기 유물 마답비연(马踏飞燕)을 캐릭터화한 '초록말(绿马)'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올해 중국 전국 박물관의 크리에이티브 상품 수입은 100억 위안(한화 약 2조 2000억 원)을 훌쩍 넘어섰다.
대중들의 니즈를 즉각적으로 반영하는 또 다른 형태의 '차이나 스피드'가 박물관을 단순한 문화재 전시 공간으로부터 사람들과 함께 살아 숨 쉬는 하나의 문화 코드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것이다.
3. 우리는 'K-크리에이티브' 생태계로 응답해야 할 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학기술은 물론 컬쳐 크리에이티브 산업까지 '차이나 스피드'로 질주하는 중국을 보면 괄목상대(刮目相對)를 넘어 서늘한 위기감마저 든다.
우수한 인재가 의대로만 향하고 수많은 규제에 묶인 우리와 달리, 중국은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인문학 콘텐츠를 상업화하는 과정에서도 실패를 용인하며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우리도 단편적인 K-콘텐츠의 유행에 머물지 않고, 전통 문화재와 첨단 기술, 여러 이종(異種) 산업들과의 협력 그리고 청년 인재들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규제 없이 빠르게 융합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단순한 속도와 자본의 규모만으로는 '차이나 스피드'를 압도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트렌드를 주도하는 강력한 스토리텔링, 문화적 매력, 독특하면서도 대중 친화적인 컨텐츠 그리고 섬세한 디테일에서는 우리가 한발 앞서 있다.
'만만디'를 벗어던지고 무섭게 질주하는 중국을 보며 막연히 부러워하거나 위축될 필요는 없다. 마침 7월 19일 부산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개최됐다. 개막식에서 이재명 대통령 또한 “문화는 어떠한 언어와 국경도 뛰어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만드는 부드럽지만 가장 강력한 힘”이라며 세계유산 보존을 통한 국제사회의 연대와 평화 구축을 강조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가진 장점을 살려내는 것이다. 앞으로 불필요한 규제를 걷어내고, 기술의 발전과 함께 대중들과 융합될 수 있는 'K-크리에이티브 생태계'를 잘 자리 잡게 하고 뻗어 나가게 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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