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한국은 오랫동안 비슷한 산업구조로 수출 경합도가 높은 경쟁국이었다. 이런 이유로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두 나라 통화는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고, 시장에서는 원화를 ‘엔화의 그림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달러·엔 환율이 163엔을 넘어서는 ‘슈퍼 엔저’ 국면에서도 원화는 과거와 다른 흐름을 보이고 있다. 엔화 가치가 1985년 플라자 합의 직전 수준까지 떨어졌음에도 원화는 상대적으로 견조한 모습을 유지하며, 오랫동안 이어져 온 원·엔 동조화에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 이번 변화는 단순한 환율 변동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일본의 재정 우려와 통화정책, 한국의 반도체 수출 호조와 외환 수급 개선, 외환시장 제도 변화와 정책 대응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시장이 두 통화를 바라보는 방식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본보는 두 편의 기획기사로 ‘슈퍼 엔저’의 배경과 원·엔 동조화가 약해진 원인을 짚어본다. 아울러 이번 디커플링이 일시적 현상인지 새로운 통화 질서의 시작인지 살펴보고, 급변하는 글로벌 외환시장 속에서 한국 경제가 마주할 기회와 위험을 진단한다. <편집자주>편집자주>
【투데이신문 최예진 기자】달러·엔 환율이 163엔을 넘어섰다. 이는 1985년 플라자 합의 직전 수준이자 1986년 12월 이후 39년 7개월 만에 최저 수준이다. 다만 엔화의 움직임에 연동되는 경향이 짙었던 원화는 최근 오히려 상대적 강세를 나타내고 있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호황에 기인한 명암으로 오래 지속된 원·엔 통화가치 동조화에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달러·엔 163엔 돌파...BOJ 긴축 약발도 안 먹힌 ‘재정 리스크’
24일 인베스팅닷컴에 따르면 달러·엔 환율은 163.75엔을 기록 중이다. 주요 외신들은 이번 달 들어 162엔선에서 움직이던 달러·엔 환율이 163엔대로 올라선 배경으로 다카이치 사나에 내각의 경제 정책 기조를 지목했다. 지난 21일 발표된 내각의 경제 재정 기본 방침인 호네부토에서 기존의 ‘재정 건전화’ 문구가 ‘재정의 지속 가능성’으로 대체되며 확장적 재정 기조가 부각됐기 때문이다.
일본은행(BOJ)이 지난 6월 16일 정책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했음에도 확장 재정에 따른 건전성 우려가 엔화에 강력한 하방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투자증권 문다운 연구원은 “달러 자체는 약세인데 엔화만 밀리는 상황”이라며 “BOJ 긴축 효과보다 일본의 재정 리스크와 정부 개입에 대한 실망감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일본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도 투기 심리를 자극했다. 달러·엔 환율이 162엔 부근까지 치솟았음에도 적극적인 시장 개입이 이뤄지지 않자, 시장에서는 “당국이 용인하는 환율 상단이 높아졌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심리적 저항선이 무너진 데다 투기적 달러 매수세까지 더해져 엔화 약세는 가속화됐다. 가타야마 사쓰키 일본 재무상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적절하고 단호한 대응을 할 것”이라며 개입 가능성을 내비쳤지만, 엔화 약세 흐름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기준금리보다 ‘수급’이 갈랐다...달러 블랙홀 K-반도체
전문가들은 이번 디커플링의 근본적인 원인을 금리 차이보다는 ‘외환 수급 구조’에서 찾고 있다.
일본의 경우 펀더멘털 악화가 엔화 발목을 잡았다. 지난 22일 발표된 일본의 6월 무역수지는 4069억엔(약 3조6914억원) 적자로, 시장 예상치(1200억엔 적자)를 3배 이상 상회했다. 대신증권 조재운 연구원은 “적자 폭이 급격히 확대된 핵심 요인은 에너지 수입 비용의 재상승”이라며 “에너지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일본 특성상 최근 유가 반등이 수입 금액을 빠르게 끌어올렸다”고 분석했다.
반면 한국의 경상수지는 반도체 수출 호조로 역대 최대 흑자액을 기록했다. 국가별 수출액 순위를 살펴보면 일본과의 명암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2025년 1~4월 국가별 수출액 기준 일본은 5위, 한국은 7위였으나, 올해 같은 기간 한국이 일본을 대신해 5위 자리로 올라왔고 일본은 8위로 밀려났다.
외국인 투자 자금 유입도 원화를 지지했다.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한 해외 매출이 국내로 들어오며 달러 매도 물량이 늘었고, 주식예탁증서(ADR) 상장 이후 외환시장에 공급된 달러량도 증가했다. 이와 함께 전날까지 외국인 투자자들이 국내 주식을 4거래일 연속 순매수하는 랠리를 펼친 점도 원화 강세를 이끌었다.
iM증권 박상현 연구원은 “최근 엔·원 차별화는 외환 수급 개선의 영향이 가장 크다”며 “ADR 상장 이후 환전 물량이 출회되고 외국인 자금 유입이 이어지면서 원화가 상대적으로 강한 모습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정부와 외환 당국의 적극적인 시장 관리 역시 원화 변동성을 낮췄다. 국민연금과의 외환 스와프는 물론, 수출입 기업들의 외환 수급 쏠림을 막기 위한 정책적 노력이 유효했다. 앞서 정부는 환율 상승기에 수출입 기업들이 수입 대금 지급을 앞당기거나 수출 대금 회수를 미루는 행위가 시장 불안을 키울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에 산업통상자원부와 재정경제부 등 관계 부처에 수출기업 간담회를 열어 기업들이 보유한 달러 대금을 시장에 적극적으로 풀 수 있도록 협조를 구했다.
이 같은 조치는 실제 성과로 이어졌다. 지난 6월 1550원까지 치솟았던 달러·원 환율은 이날 1466원으로 마감하며 한 달 만에 80원 넘게 떨어졌다. 이와 관련 지난 14일 재정경제부 이형렬 국제금융국장은 한국은행·금융감독원·국가정보원·국세청·관세청 등이 참석한 ‘불법 외환거래 대응반 회의’에서 “주요 반도체 및 중공업 기업들의 선물환 매도 물량이 시장에 대규모로 출회되면서 외환시장 수급이 대폭 개선되고 쏠림 현상이 완화됐다”고 평가했다.
결과적으로 원화와 엔화 모두 글로벌 달러 흐름의 영향권에 있지만, 일본의 재정·무역 리스크와 한국의 반도체·정책 수급이라는 각국의 고유 요인이 강하게 작용하면서 일시적인 ‘엔·원 동조화 깨짐’ 현상으로 나타났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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