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호르무즈 해협과 파나마운하를 둘러싼 지정학적 갈등이 심화하면서 항만의 전략적 가치가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덕분에 세계 주요 항만을 운영하는 리카싱 가문의 'CK그룹'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도 부쩍 커졌다. 1950년 작은 플라스틱 제조업체에서 사업을 시작한 리카싱 가문은 항만 사업을 통해 홍콩 최고 부호이자 세계적인 로열패밀리로 자리매김 했다.
"바다를 장악했다" 글로벌 항만 네트워크 9% 틀어 쥔 홍콩 재벌가문 '리카싱'
최근 파나마 운하 운영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 간의 신경전이 고조되고 있다. 세계 교역의 핵심 통로로 꼽히는 파나마운하 양 끝에 위치한 발보아와 크리스토발 항만은 당초 홍콩 재벌 기업인 'CK그룹(청쿵그룹)'이 파나마 정부로부터 운영권을 확보해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 돌연 파나마 운하 인근의 항만을 비롯해 전 세계 43개 항만을 미국 블랙록 등이 이끄는 컨소시엄에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매각의 표면적인 이유는 사업포트폴리오 재편이었으나 실질적으론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중국 영향력 축소 목적의 압박이었다.
이 때 항만의 실질적인 주인인 파나마 정부가 매각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쉽게 말해, 세입자 간에 거래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파나마 정부는 해당 운영권 계약의 적법성을 다시 들여다봤고 파나마 대법원의 위헌 판결을 근거로 항만 운영권을 회수했다. CK그룹은 매각
협상도 지연되고 운영권도 잃게 되자 파나마 정부의 운영권 회수 조치에 대해 국제 중재를 제기했다. 파나마 정부의 결정에 미국과 중국은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중국의 영향력 축소에 미국은 크게 환영한 반면 중국은 강하게 반발했고 현재까지도 양국 간 외교적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파나마 운하 운영권을 둘러싼 미·중 간에 신경전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파나마운하를 비롯한 세계 해상 요충지의 전략적 가치가 부쩍 높아졌기 때문이다. 앞서 미국 CNN은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으로 파나마운하의 전략적 가치가 다시 부각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글로벌 항만 업계 안팎에선 민간 기업이 운영하는 항만도 국가 안보,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맞물리면 국가 간 외교 갈등의 희생양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리카싱 가문이 구축한 글로벌 항만 네트워크는 단순한 물류 자산을 넘어 국가 간 이해관계가 맞물리는 전략 인프라가 됐다"며 "앞으로는 사업 경쟁력뿐 아니라 지정학적 리스크를 얼마나 관리하느냐가 기업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재 CK그룹의 가장 큰 과제는 미·중 갈등 속에서 기업의 상업적 중립성을 유지하는 것이다"며 "글로벌 핵심 인프라 기업은 이제 국가 안보와도 연결되는 만큼 지정학적 리스크 관리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고 분석했다.
전쟁 피난민, 타고난 흑수저, 자수성가 등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닮은 리카싱 성공신화
파나마 운하 사태의 희생양으로 전락한 CK그룹은 홍콩 최고의 재벌 가문으로 꼽히는 리카싱 가문이 소유하고 있다. 리카싱 가문은 'CK 허치슨 홀딩스(이하 CK허치슨)'와 'CK 에셋 홀딩스(이하 CK에셋)'을 통해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중 CK허치슨은 항만과 유통, 통신, 인프라 등의 사업을 영위하는 핵심 계열사다. CK허치슨의 해상 물류 자회사인 '허치슨포트'는 현재 24개국에서 53개 항만과 295개 선석을 운영 중이며 전 세계 컨테이너 해상 물동량의 약 9%를 차지하고 있다. CK허치슨은 지난해 항만 사업 부문에서 매출액 488억9500만 홍콩달러(약 8조5000억원)를 올렸다. 전년 대비 8% 증가한 금액이다. 같은 기간 컨테이너 처리 물동량도 9010만 TEU(6m 크기 컨테이너 기준 환산 화물량)로 3% 증가했다.
CK허치슨은 허치슨포트 외에도 ▲글로벌 헬스·뷰티 유통기업 A.S.왓슨(75.05%) ▲전력·가스 등 기반시설 사업을 담당하는 CK인프라(75.67%) ▲이동통신 사업을 영위하는 허치슨텔레콤홍콩(66.09%) ▲바이오기업 CK라이프사이언스(45.31%) ▲미디어·전자상거래 기업 TOM 그룹(36.13%) 등을 자회사로 두고 있다. 또한 CK에셋은 주거 및 상업용 부동산 개발과 임대, 호텔사업 등을 영위하고 있다. 리카싱 가문 소유의 부동산 역시 CK에셋이 전담해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항만·물류를 비롯해 유통, 통신, 바이오, 미디어 등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CK그룹의 창업주는 리카싱이다. 그의 성공 스토리는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자주 비견된다. 1928년 중국 광둥성 차오저우에서 태어난 그는 1940년 중일전쟁을 피해 가족과 홍콩으로 이주했지만 15세에 아버지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됐다. 학업을 포기한 그는 시계 회사에서 시계줄과 벨트를 팔며 생계를 이어갔고 22세가 되던 1950년 그동안 모은 돈으로 플라스틱 제조업체 '청쿵'을 설립했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 인기를 끌던 플라스틱 조화를 만들어 수출하면서 큰 성공을 거뒀다.
그는 사업을 통해 번 돈을 부동산에 투자했다. 특히 1967년 홍콩 폭동으로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을 때 토지와 건물을 공격적으로 사들였다. 당시에는 무모한 도박이라는 평가도 나왔지만 이후 홍콩 경제가 빠르게 회복되면서 부동산 시세도 급등했다. 덕분에 리카싱은 홍콩을 대표하는 부호 반열에 오르게 됐다. 리카싱이 부동산 다음으로 눈을 돌린 곳은 항만 사업이었다. 그는 1979년 영국계 복합기업 '허치슨 왐포아' 지분을 인수했다. 당시 거래는 오랜 기간 영국의 지배를 받던 홍콩의 경제 질서를 뒤흔든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이후 리카싱은 '허치슨 왐포아'를 앞세워 항만 사업을 키워나갔다. 특히 리카싱은 단편적인 항만 수만을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글로벌 해상 물류의 핵심 길목을 선점하는 전략을 펼쳤다. 1991년 영국 최대 컨테이너항인 펠릭스토우항 인수, 1997년에는 파나마운하 양단의 발보아항과 크리스토발항의 운영권 취득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덕분에 리카싱의 이름 뒤에는 '홍콩의 항만왕' '홍콩의 슈퍼맨' 등의 수식어가 붙기도 했다.
이런 리카싱을 옆에서 묵묵히 내조한 인물은 아내 총유에밍이다. 1933년생인 그는 홍콩대학교를 졸업한 뒤 1963년 리카싱과 결혼했다. 청쿵 설립 초기 함께 근무하며 사업을 돕기도 했다. 회사가 어느 정도 반열에 오른 후에는 다시 전업주부로 돌아가 내조와 양육에만 전념했다. 그는 1990년 새해 첫날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배우자를 잃은 리카싱은 가문 승계 작업에 집중했다. 올해로 만 97세인 리카싱은 2018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CK허치슨과 CK에셋의 선임고문을 맡는 한편 리카싱재단을 중심으로 교육과 의료, 과학기술 등 다양한 분야의 사회공헌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CK그룹은 장남 빅터 리가 이끌고 있다. 1964년생인 그는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에서 토목공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1985년 아버지 회사 청쿵에 입사하며 경영 수업을 시작했다. 이후 그룹 핵심 계열사를 거치며 경영 경험을 쌓았고 2018년 리카싱의 은퇴와 함께 CK허치슨과 CK에셋 회장직을 물려받았다. 반면 차남 리처드 리는 그룹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독자적인 기업가의 길을 걸었다. 1966년생인 그는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컴퓨터공학을 중퇴한 뒤 퍼시픽센추리그룹(PCG)을 세웠고 정보통신기업 PCCW를 인수하며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보험사 FWD그룹을 설립해 아시아 금융시장에서 입지를 넓혔으며 현재도 그룹 승계 대신 독자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CK그룹의 3세 승계 작업도 서서히 진행되고 있다. 빅터 리 회장 슬하에는 3녀 1남이 있는데 그 중 장녀 미셸 리는 1996년생으로 영국 런던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는 2017년 할아버지 리카싱 창업주와 기업 행사에 동행하며 처음으로 대중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리카싱재단 이사와 CK에셋 기업사업개발부 매니저 등을 역임하며 차근차근 경영 수업을 받고 있다. 홍콩 현지에선 CK그룹 3세 가운데 가족 사업에 공식적으로 참여하는 인물은 현재까지 미셸 리가 유일하다는 점에서 그를 차기 회장으로 보는 시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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