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와 핵물질 농축·재처리 가능성을 열어 놓은 원자력 협정을 맺었다고 알려지며 중동 지역이 핵확산 경쟁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일었다. 이란 핵협상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미 에너지부는 22일(이하 현지시간) 보도자료를 통해 미국과 사우디가 평화적 원자력 협력 협정, 일명 '123 협정'을 맺었다고 밝혔다. 에너지부는 협정이 미 원자력 기술 수출 확대, 미 고임금 일자리 창출 및 장기적 경제 성장, 미 에너지·국가 안보 태세 강화, 전세계 비확산 기준 보강, 미·사우디 전략적 파트너십 심화 효과를 가져올 거라고 설명했지만 구체적 협정 내용을 공개하진 않았다.
123 협정은 미국이 핵물질과 관련 장비 수출 때 1954년 원자력법 123조에 근거한 협정을 필요로 해 붙은 별칭이다. 미국은 한국 포함 24개국 정부, 국제원자력기구(IAEA),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27개국) 등 51곳 정부 및 기구와 123 협정을 맺고 있다. 123 협정은 협정 대상국에 국제원자력기구 안전조치 수용, 농축·재처리 때 미국 동의 및 핵물질 군사 목적 사용 금지를 요구한다.
외신 "사우디에 농축·재처리 길…제한적 사찰 가능성도"
복수의 외신은 이번 협정이 사우디 내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 연료 재처리 길을 열어줬다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협정의 핵심 조항 중 하나가 미국과 사우디의 2년간 합동 연구 결과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미 기업들이 사우디 내 우라늄 농축 시설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농축 시설 건설 땐 핵심 기술은 이전하지 않는 '블랙 박스' 방식이 도입된다는 보도다. 신문은 연구 결과 미국이 농축 시설 건설에 반대하게 될 경우 사우디는 향후 10년간 단독으로 혹은 다른 외국 파트너들과 농축 공정을 시행할 수 없다는 내용도 협정에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이에 더해 사우디에 실시될 핵사찰도 제한적일 수 있다는 보도다. 미 CNN 방송은 한 당국자를 인용해 사우디에 국제원자력기구의 강도 높은 핵사찰을 수용하도록 하는 표준 협정인 '추가 의정서' 서명 의무가 없다고 전했다. 사우디는 이 의정서 준수 땐 이론적으로 왕궁이나 이슬람 성지 메카 등에 대한 사찰관 출입을 막을 수 없다는 우려로 서명을 꺼려 왔다. 미 당국자는 CNN에 추가 의정서와 유사하지만 사우디가 반발했던 부분은 빠진 양자 안전조치 합의가 이번 협정에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이 지난 2009년 사우디의 이웃국 아랍에미리트(UAE)와 맺은 원자력 협정엔 국제원자력기구 핵사찰 수용과 자체 농축 및 재처리 금지, 이른바 '골드 스탠더드'가 포함됐는데 보도에 따르면 사우디엔 이러한 기준이 적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을 포함해 원자력 발전소를 운영하는 여러 국가는 연료로 쓰이는 농축 우라늄을 자체 생산하지 않고 미국 등으로부터 수입한다.
사우디 왕세자, 2018년 인터뷰서 "이란이 핵폭탄 개발한다면 뒤따를 것"
핵물질 농축과 재처리 모두 이론적으로 핵무기 개발로 연결될 수 있는 데다 핵사찰까지 제한될 수 있다는 보도에, 분쟁이 끊이지 않는 중동 내 핵확산 및 군비 경쟁 우려가 제기됐다. <뉴욕타임스>(NYT)를 보면 미 싱크탱크 카네기국제평화재단 핵정책 프로그램 공동책임자 제임스 액턴은 이번 협정이 "놀라울 정도로 근시안적"이라며 "이는 핵확산을 진정으로 원하는 나라에 통로를 제공하는 걸로 보인다. 사우디가 이 시설을 국유화해 핵폭탄을 제조하는 데 사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란 및 튀르키예(터키), 이스라엘과 지역 맹주 자리를 놓고 경쟁 중인 사우디의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는 2018년 미 CBS 방송에 "이란이 핵폭탄을 개발한다면 우리도 가능한 빨리 뒤따를 것"이라며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바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을 보면 미 비영리단체 비확산정책교육센터 헨리 소콜스키 소장은 "사우디가 가는 길로 아랍에미리트, 튀르키예, 이집트도 갈 것이다. 이 사태가 행복한 결말로 끝날 거라는 생각은 망상"이라고 비판했다.
123 협정을 맺은 다른 국가들이 비슷한 조건을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뉴욕타임스>는 아랍에미리트와의 협정엔 인접국이 더 유리한 조건을 얻게 될 경우 미국과 "협의"를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이 포함돼 있다고 지적하며 협정 내용 공개 땐 다른 국가들도 동일한 대우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협정을 의회가 검토할 예정인 가운데 의원들 사이에서도 반대가 나왔다. 민주당 소속 브래드 셔먼 하원의원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의회는 이 협정이 아랍에미리트와의 협정에서와 같은 골드 스탠다드 안전 장치를 갖춘 경우에만 승인해야 한다"며 "중동 지역의 핵 확산을 막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는 대통령이 미국 기업 이익만을 위해 확산을 조장해선 안 된다"고 꼬집었다. 다만 대통령 거부권을 피하기 위해선 3분의 2 이상 의원이 협정에 반대해야 하는데 공화당 다수인 양원에서 이는 현실적이지 않다는 전망이다.
이란, 핵협상서 사우디와 동일 조건 요구 가능성
사우디 내 농축 가능성이 열려 있다면 이번 협정은 미·이란 핵협상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협상 재개 때 "이란은 사우디에 대한 양보를 놓치지 않고 똑같은 조건을 요구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우디가 핵개발 길로 나아가는 걸 막기 위해 트럼프 정부가 이란 핵무기 개발 능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압력이 더 커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뉴욕타임스>를 보면 미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 핵문제 프로젝트 책임자 헤더 윌리엄스는 "당장 사우디의 핵무기 개발을 막으려면 사찰, 비축분 처리, 곡괭이산을 포함해 핵시설 현황에 대한 구체적이고 강력한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며 이에 실패한다면 여러 나라들이 핵무기 제조 능력 확보를 위해 경쟁을 벌이는 핵확산 연쇄 반응의 위험이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번 합의로 미 원자력 기업들은 수혜를 입을 전망이다. <월스트리트저널> 미 원전기업 웨스팅하우스가 AP1000 원자로 공급으로 협정 최대 수혜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사우디가 중국과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돈독한 파트너십을 강조하게 된 상황도 외교적으로 나쁠 것이 없다는 평가다. 미 워싱턴 소재 아랍걸프국가연구소 선임연구원 크리스틴 디완은 협정이 "상업적·지정학적 측면에서 미국에 큰 승리로, 미국 기업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사우디와 미국을 더 긴밀하게 묶을 것"이지만 "국제 비확산 체제에 미치는 피해는 상당하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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