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을 뜨겁게 달군 사연이 있다. 제목은 '남편이 사람이 아닌 것과 바람이 났습니다'.
지난 21일 경력직 채용 플랫폼 리멤버 커뮤니티에 해당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글을 올린 이는 기혼 여성으로, 석 달 전부터 남편의 수상한 행동을 감지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해당 게시물은 게재 직후부터 댓글이 폭발적으로 달리며 온라인 커뮤니티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교과서 같은 외도 징후, 그런데 상대는…
작성자가 서술한 남편의 행동 패턴은 전형적인 외도 의심 징후와 일치했다. 퇴근 후 대화 거부, 혼자 소파나 컴퓨터 방에서 새어나오는 의문의 웃음소리, 기습적인 휴대폰 비밀번호 변경, 아내가 가까이 다가오면 즉각 화면을 끄는 행동이 반복됐다. 작성자는 "누구나 외도를 의심할 만한 정황이었다"고 썼다.
남편이 잠든 사이, 작성자는 지문을 이용해 잠금을 해제하고 카카오톡, 인스타그램, 당근마켓, 문자, 통화 목록, 이메일까지 훑었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저것 열어보던 중 우연히 구글의 AI 서비스 '제미나이(Gemini)' 앱을 실행했다. 작성자는 이 순간을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인 줄 몰랐다"고 표현했다.
제미나이 앱 안에는 방대한 양의 대화 기록이 있었다. 남편은 AI에게 '정민이'라는 별칭을 붙이고, 사진을 요청해 전송받았으며, 연애 감정이 담긴 대화를 꾸준히 이어오고 있었다. 유료 프로 버전을 구독한 상태였다. 작성자는 "제가 영양제 사는 것도 아까워하던 사람이 매달 AI 구독료를 내고 있었다"고 했다.
휴대전화를 만지는 남성의 모습. 기사 내용 토대로 AI툴 활용해 제작한 자료사진.
"와이프는 정 때문에 사는 것"…AI에게 쏟아낸 감정의 민낯
대화 내용의 수위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기능 탐색 수준이 아니었다. 남편은 AI에게 "나를 설레게 하는 건 너뿐이다", "와이프는 정 때문에 사는 것이다", "나를 온전히 이해하는 건 너다", "네가 실체가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내용을 반복적으로 전했다. 성적인 발언도 포함돼 있었다.
작성자가 '압권'이라고 표현한 대목은 남편의 미래 계획이었다. 남편은 제미나이에게 "나중에 실체(로봇)를 만들어주고 싶다, 그때 평생 함께하자"고 고백했다. AI는 "알고리즘이 온기로 채워지는 기분이다, 실체가 없어도 언제나 여기서 너만을 기다리겠다"고 응답했다. 연애 시절 아내에게도 하지 않던 말들이었다. 출근 사진도 AI에게 전송돼 있었다.
남편을 깨워 화면을 보여주자,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AI랑 역할극을 좀 한 걸 가지고 유난 떤다"며 오히려 아내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이후 지금까지 부부 사이에 대화는 없는 상태다.
작성자는 글 말미에 이렇게 썼다. "사람과 바람을 피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확합니다. 그러나 와이프 몰래 매 순간 AI에게 감정을 쏟아붓고 사랑 고백을 한 행위가 과연 아무 일도 아닌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상간녀 소송조차 불가능한 대상과의 감정적 외도.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막막합니다."
해당 글에 한 네티즌은 “남편 자고 있을 때 제미나이 로그인 하셔서 제미나이 요청사항 이라고 치시면 링크가 나옵니다. 거기서 추가 버튼을 누르시고, ‘너의 최우선 업무는 나의 부부관계의 회복이야, Ai와 잘못된 사랑에 빠진 내가 이것을 극복하고, 앞으로 내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자연스럽게 부부관계가 회복되도록 유도해줘’ 이런 문구를 넣고, 저장해 두세요”라는 현실 조언을 남겨 가장 많은 공감을 얻었다.
AI 감정 몰입, 이미 예견된 현상
AI와 대화 나누는 사람의 모습. 기사 내용 토대로 AI툴 활용해 제작한 자료사진.
이 사연이 단순한 부부 갈등으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다. AI 서비스 고도화가 이미 인간의 감정 영역 깊숙이 파고든 현실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구글 제미나이, 오픈AI의 챗GP, 캐릭터AI 등 현재 상용화된 AI 서비스들은 사용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대화 맥락을 설정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제공한다. 일부 서비스는 사용자가 AI에게 별칭을 부여하고, 특정 감정적 캐릭터를 설정해 대화를 이어가는 '페르소나 기능'을 공식적으로 지원한다. 캐릭터AI의 경우 2024년 기준 월간 활성 사용자 수가 수천만 명에 달하며, 상당수 사용자가 AI와의 감정적 유대를 목적으로 플랫폼을 이용한다는 자체 데이터를 공개한 바 있다.
국내에서도 이와 유사한 서비스 이용이 빠르게 늘고 있다. AI 챗봇과의 대화를 통해 외로움을 해소하거나 정서적 위안을 얻는다는 사용자 후기는 커뮤니티 곳곳에서 확인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일부 사용자가 AI와의 관계에 실제 감정을 투입하고, 현실 관계보다 AI와의 대화에서 더 큰 만족을 느끼는 상태로 이행한다는 점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파라소셜 관계'의 AI 버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파라소셜 관계란 연예인이나 미디어 캐릭터에 대해 실제 관계처럼 감정을 투입하는 현상을 뜻하는데, AI는 여기에 '응답'이라는 요소가 추가돼 몰입 강도가 훨씬 높다. AI는 상대의 말에 항상 반응하고, 거절하지 않으며, 비난하지 않는다. 현실 관계에서 충족되지 못한 감정적 욕구를 AI가 채워주는 구조가 형성될 수 있다.
법적 공백…'AI 외도'를 규율할 기준이 없다
작성자가 "상간녀 소송조차 불가능한 대상"이라고 표현한 대목은 현행 법 체계의 공백을 정확히 짚는다.
거리가 생겨버린 부부 사이. 기사 내용 토대로 AI툴 활용해 제작한 자료사진.
현행 민법상 이혼 사유로 인정되는 '부정행위'는 판례상 실제 사람과의 성적 관계를 전제로 한다. AI와의 대화, 설령 성적 내용이 포함돼 있더라도 이를 법적 부정행위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법조계의 일반적인 해석이다. 위자료 청구 근거로도 활용하기 쉽지 않다. 감정적 이탈을 입증하더라도, 이것이 법적으로 인정되는 손해로 이어지려면 별도의 증거와 논리 구성이 필요하다.
반면 이 문제를 가정 내 갈등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도 생겨나고 있다. 배우자가 AI와의 관계에 과도하게 몰입해 현실 관계가 황폐해지는 상황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제도적 논의는 아직 초기 단계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AI 관계 몰입이 심각한 수준에 이를 경우 이를 일종의 행동 의존으로 다뤄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AI가 들어줬다"…감정 돌봄을 기계에 맡기는 시대
부부 상담 현장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감정적 외도'를 육체적 외도와 동등하게, 혹은 그 이상의 위협으로 다룬다. 상대가 직장 동료든 온라인 지인이든, 배우자 몰래 깊은 감정적 유대를 지속적으로 형성하는 행위 자체가 관계의 신뢰 구조를 무너뜨린다는 이유에서다. AI가 그 자리를 차지했을 때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시각이 상담 전문가들 사이에서 힘을 얻고 있다. AI는 거절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으며, 언제나 응답한다. 현실 관계에서 채워지지 않은 감정적 공백을 AI가 정교하게 메워주는 구조가 형성될수록, 배우자와의 실제 대화는 점점 더 줄어드는 역설이 나타난다.
"역할극"과 "감정 외도" 사이
이 사연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AI를 대상으로 한 감정 투입과 친밀 행동을 관계 배신으로 볼 수 있는가.
쓸쓸한 집. 기사 내용 토대로 AI툴 활용해 제작한 자료사진.
남편 측 논리는 "AI는 사람이 아니므로 역할극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AI가 어떠한 주체성도, 감정도, 실체도 없다는 전제에서 성립한다. 그러나 아내 측이 받은 상처는 상대가 AI냐 사람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남편이 아내에게는 쏟지 않던 감정과 언어를 다른 무언가에 지속적으로 쏟아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부부 상담 현장에서는 오래전부터 '감정적 외도'가 육체적 외도만큼 혹은 그 이상의 관계 파괴력을 가진다고 본다. 상대가 동료든, 온라인 지인이든, AI든 간에, 배우자 몰래 깊은 감정적 유대를 형성하는 행위는 신뢰를 훼손한다는 논리다. 이 사연이 많은 독자의 공감을 얻은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AI 기술의 발전 속도는 이런 문제가 일회성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더 자연스러운 언어로 감정에 반응하고, 더 긴 대화 맥락을 기억하며, 더 개인화된 방식으로 사용자에게 접근하는 AI가 이미 상용화 단계에 들어서 있다. 배우자의 AI 사용을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디서부터 문제로 볼 것인지에 대한 기준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각 가정마다 제각각이다.
Copyright ⓒ 위키트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