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유럽의 관문' 헝가리가 한국 배터리 기업들의 유럽 시장 핵심 거점으로 자리매김했다. 삼성SDI와 SK온 등 국내 배터리 대기업들이 메머드급 생산 기지를 구축한 데 이어 양극재·음극재 등 핵심 소재 협력사들까지 동반 진출하면서 거대한 'K-배터리 전초기지'가 완성됐다. 유럽 현지 완성차 기업 공장들과의 접근성, 저렴한 인건비와 파격적인 세제 혜택, 유럽연합(EU)의 공급망 규제 해소 등이 결정적 이유로 지목됐다.
대기업 끌고 소부장 中企 밀고…유럽의 관문 헝가리에 생겨난 K-배터리 생태계
관련업계 등에 따르면 국내 배터리 기업들의 헝가리 현지 투자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가장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곳은 삼성SDI다. 삼성SDI는 헝가리 괴드 시에 위치한 기존 1·2공장의 생산 라인에서 유럽 시장용 고부가가치 배터리인 '젠5(Gen.5)'와 '젠6(Gen.6)'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제3공장 건설 가능성도 꾸준히 거론되고 있다. 유럽 현지 완성차 기업인 BMW가 현지 데브레센에 짓고 있는 전기차 전용 공장에 발맞춰 배터리를 적기에 공급하기 위한 포석으로 분석된다.
SK온 역시 헝가리에 코마롬 1·2공장, 이반차 3공장 등 총 3곳의 생산 기지를 두고 있다. 가장 늦게 가동에 돌입한 이반차 공장의 경우 현지 인력 채용에 나서는 등 본격적인 풀가동 채비에 나서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의 경우 모기업인 LG화학이 헝가리에 대신 진출해 있다. 특히 얼마 전 일본 '도레이'(Toray)와 설립한 헝가리 전기차(EV)용 분리막 합작사 지분 전량(50%)을 인수하며 100% 자회사로 편입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헝가리와 인접한 폴란드에 생산기지를 두고 있다.
대기업 계열 배터리 기업들의 헝가리 진출에 발맞춰 배터리 소재 및 부품, 장비(소부장) 등의 협력사들도 하나 둘 헝가리로 향하고 있다. ▲동화기업 전해액 생산 공장 ▲솔루스첨단소재 전지박 공장 ▲W-Scope 분리막 공장 ▲에코프로비엠(EcoPro BM) 양극재 공장 등 배터리 소부장 분야에서만 최소 20개 이상의 한국 기업들이 헝가리에 진출한 것으로 파악됐다. 덕분에 과거 원거리 수송 과정에서 발생하던 물류비용과 리드타임(납기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구조적 혁신이 가능해졌다.
헝가리 현지에 진출한 배터리 소부장 업체 소속 직원 최민석 씨(45·남·가명)는 "배터리 생산은 핵심 기술 유출 방지와 고품질 유지를 위해 원소재 조달부터 배터리 셀 조립까지 완벽한 수직 계열화가 필수적이다"며 "헝가리 현지에서 한국 기업들끼리 하나의 촘촘한 가치사슬을 완성했기 때문에 경쟁국 기업들이 쉽게 틈새를 치고 들어오지 못하는 독점적 생태계 구축이 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헝가리에 생겨난 K-배터리 생태계는 헝가리 정부의 파격적인 현금 보조금에 힘입어 그 규모가 빠르게 커질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최근 개최된 한국 신흥모노리(신흥에스이씨 헝가리 법인)의 생산능력 확장 사업 투자금 인계식에서 페테르 시야르토(Péter Szijjártó) 헝가리 외교통상부 장관은 정부가 신흥기업의 450억 포린트 규모 확장 사업에 36억 포린트(HUF)의 대규모 현금 지원을 단행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번 공장은 신흥기업의 유럽 첫 공장이자 핵심 기지로, 매 달 2000만개의 전기차 배터리 핵심 부품이 생산될 예정이다.
당시 시야르토 장관은 "한국 기업들은 현재 헝가리에서 네 번째로 큰 투자 기업 집단을 형성하고 있으며 헝가리 정부가 2014년 이후 67건의 한국 투자 유치에 전폭적인 지원을 제공해 5조 포린트 이상의 투자액을 유치하고 1만9000개의 신규 일자리를 창출했다"고 강조했다. 헝가리 정부의 이러한 '동방 개방 전략' 덕분에 양국 간 무역 규모는 연간 60억 달러를 돌파하며 가파른 우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한국인 인구만 1만5000명 육박…헝가리 흔드는 거대한 '코리아타운'의 탄생
K-배터리 생태계는 헝가리 현지의 인구 구조와 경제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헝가리 중앙통계청(KSH)에 따르면 10년 전만 해도 1000명 안팎에 불과했던 현지 거주 한국인은 배터리 공장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급격히 증가했다. 현지 한인 사회와 소식통에 따르면 최근 헝가리에 거주하는 한국인 수는 최소 1만2000명에서 최대 1만5000명 수준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 사회의 급격한 성장은 부다페스트 도심과 공장 배후 도시들의 풍경도 송두리째 바꿨다. 주재원 가정이 몰린 부다페스트 북부 부촌인 부다 2·3구역과 페스트 13구역에는 이미 거대한 한인 커뮤니티가 형성돼 있다. AISB(미국국제학교), BISB(영국국제학교) 등 유명 국제학교의 한인 학생 비율은 특정 국적의 과도한 쏠림을 막는 '국가별 쿼터제(학년당 약 20% 제한)' 제한선까지 도달했다. 이미 한국인 주재원 자녀들이 입학 허가를 받기 위해 대기하는 학교들도 적지 않아.
상권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부다페스트 도심(페스트 5·6·7구역)을 중심으로 이미 수십 개의 한국 음식점이 들어섰으며 지금도 하나 둘 늘고 있다. 주말이나 평일 저녁이면 퇴근 후 소주를 곁들이며 회식을 즐기는 한국인 근로자들과 현지 헝가리인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또 한국인 고객을 대상으로 한 미용실부터 법률 및 컨설팅 사무소, 치과 등이 성업 중이다. 이 중 한국 미용실의 경우 뛰어난 기술력으로 현지 중국인 등 타 아시아계 부유층 고객까지 대거 흡수하며 지역 명소로 자리 잡았다.
부다페스트 도심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자영업자 정서윤 씨(42·여·가명)는 "과거에는 가끔 찾아오는 한국 관광객이나 유학생이 손님의 전부였는데 배터리 기업 직원들이 유입된 이후에는 한국인 손님이 많이 늘었다"며 "손님이 늘면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는지 한식에 관심을 가지는 헝가리 로컬 손님과 인근 중국계 이민자 손님들의 방문도 눈에 띄게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인 거주자가 늘어난 덕에 지난달 13일 부다페스트 마르기트섬(Margitsziget)에서 열린 헝가리 최대 규모 한국문화축제 '2026 코리아온(KoreaON)'도 대성공을 거뒀다. 주최 측에 따르면 당시 행사에는 무려 2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특히 올해는 단순히 K-pop과 푸드를 즐기는 이벤트성 행사를 넘어 현지 정·재계에 뿌리내린 'K-산업'의 압도적인 위상을 선보이는 동시에 한국과 헝가리 간에 동반자적 관계를 강조하는 계기가 됐다.
축제에는 삼성SDI, SK온, 에코프로비엠 등 국내 배터리 기업들의 홍보 부스가 따로 마련됐으며 카라초니 게르게이(Gergely Karácsony) 부다페스트 시장, 박철민 주헝가리한국대사 등이 참여했다. 당시 박철민 대사는 "헝가리와 대한민국의 양자관계는 확고한 전략적 동반자 관계다"고 강조한 바 있다. 축제 자체가 한국 배터리 산업이 헝가리 내에서 단순 외자 유치 대상이 아닌 일자리 창출과 첨단 기술 전수를 책임지는 동반자임을 헝가리 국민들에게 각인시키는 자리가 된 것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아직까지 마냥 안심할 단계는 아니라는 분석도 나온다. 최근 발생한 헝가리의 정치적 지형 변화는 K-배터리 산업의 최대 변수로 지목되고 있다. 16년 만에 친배터리 성향의 오르반 정부가 참패하고 배터리 공장의 환경 및 노동 규제 강화를 부르짖던 야당 '티사(Tisza)'가 압승을 거두는 정권 교체가 벌어졌다. 이에 우리 기업들이 기존에 누려왔던 파격적인 법인세 감면과 대규모 현금 보조금 혜택이 축소되거나 현지 환경 감시 단체들의 조업 중단 요구가 거세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게 됐다. 또 세계 1위 배터리 기업인 중국 CATL이 헝가리 데브레센에 역대 최대 규모인 10조원대 배터리 공장을 본격 가동하기 시작하면서 현지 인력 채용과 원소재 확보 경쟁은 한층 더 격화될 전망이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한국 기업들은 기술력과 현지화를 무기로 타국의 물량 공세를 돌파해야 하는 목표를 가지고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 것이기 때문에 공장 설립뿐 아니라 현지 대학·연구소와 협력해 기술 경쟁력을 높이는 과제도 안고 있다"며 "정부의 전략적 지원과 기업의 선제 투자가 맞물려 현지 진출에 성공한 만큼 앞으로는 유럽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다음 스텝을 밟아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Copyright ⓒ 르데스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