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22일(이하 현지시간) 민간 원자력 협정에 서명했다.
미국 원전 기술과 장비가 사우디 시장에 진출할 길이 열렸지만, 사우디의 자체 핵물질 농축·재처리를 잠재적으로 허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핵무기 개발 가능성까지 거론돼 중동 정세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미국이 이란의 핵 보유를 인정할 수 없다며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에 이란의 라이벌인 사우디에는 사실상 핵보유로 이어질 수 있는 길을 터준 셈이어서 이란의 강한 반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다.
미·사우디 원자력 협정…UAE 이후 중동 내 두번째
UAE 보다 기준 완화…"사우디에 농축·재처리 허용"
22일 미 에너지부에 따르면 크리스 라이트 에너지부 장관과 압둘아지즈 빈 살만 사우디 에너지부 장관은 이날 평화적 원자력 협력 협정과 별도의 양자 안전조치 협정에 서명했다. 에너지부는 "이번 합의가 수십 년간 수십억달러 규모 협력의 법적 토대"라고 밝혔다.
미 에너지부는 "높은 수준의 핵 안전과 비확산 기준을 유지한다"고 밝혔지만 구체적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외신에 따르면 미국은 사우디에 원전을 건설하고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을 이전하되, 미국 인력만 접근 가능한 '블랙박스' 방식이 논의되고 있다. 문제는 사우디가 일정 조건 충족 시 자국 우라늄을 직접 농축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기존 협정의 핵심 조항인 '미국 승인 없는 농축·재처리 불가' 원칙을 대통령 면제권으로 무력화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번 합의는 미국 원자력법 제123조에 따른 '123 협정'이다. 지금까지 한국을 포함해 24개국 정부, 국제원자력기구(IAEA),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27개국) 등 51개 정부·기구와 26건의 123 협정이 체결됐다.
이 협정은 핵물질과 관련 장비를 제조·수출하는 미국 기업의 거래를 규율하고 사찰 의무와 핵비확산을 위한 틀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데 원자력 기술의 중요도를 감안해 미국 의회가 승인해야 발효된다.
원자력법 123조가 요구하는 협정 조건은 ▲이전된 핵물질·장비에 대한 IAEA 안전조치(세이프가드) 적용 ▲비핵보유국의 전면적 IAEA 안전조치 수용 ▲핵무기 및 군사적 목적 전용 금지 ▲농축·재처리 시 미국의 사전 동의 필수 ▲고농축 우라늄·플루토늄 생산 시 미국의 별도 승인 ▲IAEA 안전조치 미준수 시 핵물질·장치 반환 등이다.
이번 협정이 발효되면 미국 정부와 기업은 사우디 원전 사업에 원자로와 핵물질, 관련 기술·장비를 공급할 수 있다.
미국은 웨스팅하우스의 AP1000 원자로를 독점 공급할 전망이며, 계약 규모는 수십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우디는 원전 건설을 통해 원유를 수출용으로 돌리고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으며, 미국의 '인증'을 통해 역내 위상을 강화할 수 있다.
이번 협정은 지난 2009년 UAE와 맺은 협정과 비교해 보면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과 UAE의 협정에선 미국의 요구대로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플루토늄 생산)와 우라늄 농축을 아예 포기한다는 '골드 스탠더드'가 적용됐다.
반면 이번에 미국은 사전동의 조항을 근거로 사우디와 2년간 공동연구를 통해 상업적 타당성과 필요성이 인정되면 사우디 영토 안에서 재처리나 우라늄 농축을 할 수 있도록 협정을 맺었다.
사우디 영토에 관련 시설을 설치하되 사우디인의 접근을 배제하고 미국이 독점 운용·통제하는 '블랙박스' 방식이라고는 하지만 핵무기 개발을 위한 잠재적 핵활동으로 여겨지는 재처리·농축을 향한 길이 열린 셈이다.
사우디, '숙원' 핵기술 보유국 가능해져…이란핵도 견제
중동정세 혼란 불가피 "이스라엘·이란 분노 촉발"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체결한 원자력 협정이 발효될 경우 중동 지역에서 '핵 도미노'가 촉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이 이란에는 핵 프로그램 폐기를 요구하면서도 사우디에는 완화된 조건을 허용한 점은 '이중잣대'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뉴욕타임스(NYT)는 22일 이번 협정을 "중동 전쟁이 격화하는 와중에 사우디를 미국 주도 질서에 묶어두기 위한 시도"라고 분석했다. 원자로 건설에 10년 이상이 소요되고 이후에도 미국 기술을 사용해야 하는 만큼 양국 간 안보·상업적 유대가 강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란과의 전쟁으로 미국 동맹국들이 불만을 표출하는 가운데, 사우디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역시 미군 항공기의 사우디 영공 사용을 제한하는 등 갈등을 빚은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원자력 협정을 승인한 것은 사우디를 달래고 관계를 강화하려는 조치로 해석된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의 디나 에스판디아리 연구원은 "사우디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극심한 불만을 품고 있는 시점에 주어진 '당근'"이라며 "미국이 한발 양보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석유 의존형 경제를 다각화하기 위해 원자력 협정 체결에 공을 들여왔으며, 이란이 핵무기를 확보할 경우 사우디도 핵을 보유하겠다고 공언해왔다. 이번 협정은 사실상 미국의 승인 속에 사우디가 핵 잠재력을 확보한 셈이다.
컬럼비아대 글로벌 에너지 정책센터의 카렌 영 연구원은 "사우디가 역내 위상을 높이고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할 기회"라며 "이란의 역량을 따라잡거나 능가할 수 있는 능력을 미국 승인 아래 확보했다고 자랑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이번 협정이 중동 지역 군비경쟁을 촉발할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에스판디아리 연구원은 "수십 년간 유지해온 미국의 핵 비확산 기조를 뒤집는 일"이라고 지적했고, 영 연구원 역시 "중동 전역에서 핵기술 확보 경쟁을 촉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이란과 다른 잣대를 사우디에게 적용한 것에 대한 반발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미 하원 외교위원회 소속 브래드 셔먼 의원은 22일 청문회에서 "미군은 이란이 우라늄을 농축하고 재처리하려 한다는 이유로 폭격하고 있는데, 미국은 이제 사우디와 농축과 재처리를 허용하는 합의를 추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차이가 있다면 웨스팅하우스(미국의 대표적인 원전 설계·건설 업체)가 이번 거래로 돈을 번다는 것뿐"이라며 상업적 이익 때문에 핵비확산 원칙이 흔들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이날 '사우디의 우라늄 농축은 실수다(Saudi Nuclear Enrichment Is a Mistake)'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협정을 정면 비판했다. 사설은 "사우디는 자국에서 우라늄을 농축할 필요가 없다"며 농축 시설은 결국 핵무기 개발의 잠재적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번 협정이 2년간 공동 연구 뒤 사우디 농축 여부를 결정하도록 한 데 대해 "무엇을 더 연구한다는 것이냐"며 사실상 시간을 벌기 위한 형식적 절차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쿠웨이트대 바데르 알사이프 조교수는 "이번 협정은 이스라엘과 이란의 분노를 촉발하고 역내 불확실성을 가중시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후티 반군, 홍해 사우디 유조선 공격…"해상 봉쇄 위반"
이란 협상단장 "우리가 석유 못 팔면 아무도 못 판다"
당장 이란의 지원을 받는 후티 반군은 홍해상 사우디 유조선을 향한 공격에 나섰다.
영국해사무역기구(UKMTO)는 23일 사우디 알슈카이크 남서쪽 약 70해리(130㎞) 해상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신고를 접수했다고 밝혔다. UKMTO는 "유조선 선장이 정체불명의 발사체에 맞았다"고 보고했으며, 이로 인해 선내 화재가 발생해 승무원들이 진화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까지 인명 피해나 환경 오염은 보고되지 않았다.
사건 직후 예멘의 친이란 무장세력 후티 반군은 자신들이 사우디 유조선 두 척을 겨냥한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고 주장했다. 후티 측은 공격 대상 선박이 '엔셀라(ENCELA)'호와 '라이리아(LAYLIA)'호라며, 이들이 자신들이 선언한 해상 봉쇄령을 위반했다고 밝혔다.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이란 의회 의장도 원유 수출 및 해협의 안보와 관련해 강경한 입장을 천명했다.
갈리바프 의장은 22일 엑스(X) 계정에 "우리가 석유를 판매하지 못하는 지역에서는 그 누구도 석유를 팔지 못할 것"이라며 "우리의 안보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기반 시설(인프라)도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란군도 자국의 인프라가 공격당하면 역내 석유 수출이 불가능하게 할 것이며, 역내 에너지, 전력 및 경제 기반 시설도 공격하겠다고 경고했다.
이란군을 통합 지휘하는 하탐 알안비야 중앙사령부는 성명을 통해 "호르무즈 해협은 계속 폐쇄될 것이며, 해협을 통과하고자 하는 모든 선박은 반드시 지정된 항로를 이용해 사전 공지된 통항 절차를 철저히 준수해야만 한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 대통령이 또다시 이란의 인프라를 표적으로 삼겠다고 위협했다"면서 "이런 위협이 실행될 경우, 이란군은 단 한 방울의 원유도 수출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며, 역내 모든 석유, 가스, 전력 및 경제 기반 시설이 우리의 타격 표적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폴리뉴스 김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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