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한스경제 고예인 기자 | 미국 반도체 기업 AMD가 인공지능(AI) 가속기 경쟁의 무대를 개별 그래픽처리장치(GPU)에서 데이터센터 랙 전체로 넓히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도 새로운 시장이 열릴 전망이다.
AMD의 첫 랙 스케일 AI 시스템인 ‘헬리오스’가 마이크로소프트(MS) 애저를 비롯한 글로벌 데이터센터에 본격적으로 도입되면 고대역폭메모리(HBM)뿐 아니라 서버용 D램과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까지 메모리 수요가 전방위로 늘어날 수 있어서다.
그동안 AI 반도체 시장은 엔비디아가 GPU와 네트워크, 소프트웨어를 결합한 시스템을 사실상 독점해왔다. 하지만 AMD가 자체 GPU와 중앙처리장치(CPU), 네트워크 반도체, 소프트웨어를 하나의 랙에 통합하고 대형 고객까지 확보하면서 AI 인프라 시장이 복수 플랫폼 경쟁 체제로 넘어갈 가능성이 커졌다.
21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MS는 AMD의 헬리오스 AI 플랫폼과 차세대 에픽 데이터센터 프로세서를 애저 클라우드 인프라에 도입할 예정이다. 양사는 이를 기반으로 데이터 처리와 반도체 설계 자동화, AI 추론 등에 최적화된 새로운 애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헬리오스는 AMD가 엔비디아의 랙 스케일 시스템에 맞서 처음으로 내놓은 통합 AI 인프라다. AMD 인스팅트 MI400 시리즈 GPU와 차세대 에픽 CPU, 펜산도 네트워크 반도체를 한개의 시스템으로 묶었다. 단순히 가속기 칩을 판매하는 것을 넘어 데이터센터가 바로 설치해 운영할 수 있는 완성형 시스템을 제공하겠다는 전략이다.
AMD는 오는 22일부터 23일까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AMD 어드밴싱 AI 2026’을 통해 헬리오스의 세부 사양과 공급 계획, 고객사를 공개할 것으로 예상된다.
▲ GPU 한개에서 랙 전체로 커진 메모리 시장
AMD의 헬리오스가 주목받는 이유는 AI 반도체 경쟁의 단위가 GPU 한개에서 랙 전체로 확대됐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GPU 성능과 GPU 한개당 탑재되는 HBM 용량이 경쟁력을 좌우했다. 그러나 최근 생성형 AI 모델의 규모가 커지고 데이터센터에서 처리해야 할 추론 작업이 급증하면서 수십 개의 GPU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결하는 랙 스케일 설계가 핵심 경쟁 요소로 떠올랐다.
랙 단위 시스템에는 수십 개의 AI 가속기가 탑재된다. 각 가속기에 HBM이 들어가는 만큼 고객사가 랙 한개를 구매할 때 발생하는 HBM 수요도 개별 GPU 판매 때보다 훨씬 크다.
AMD가 마이크로소프트와 메타, 오픈AI, 오라클 등 대형 고객을 대상으로 헬리오스 공급을 확대하면 국내 메모리 업체가 공급할 수 있는 HBM 물량도 자연스럽게 늘어날 전망이다.
AMD는 오픈AI와 최대 6기가와트(GW) 규모의 GPU 공급 협력을 체결했으며 오라클도 헬리오스 기반의 AI 인프라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메타 역시 대규모 AMD GPU 도입 계획을 밝힌 상태다.
이는 AMD가 엔비디아의 기존 물량을 단순히 나눠 갖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빅테크들이 AI 데이터센터 투자를 확대하면서 엔비디아와 AMD 시스템을 동시에 구축하면 전체 AI 가속기 시장과 HBM 시장의 규모가 함께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 HBM만 아니다…DDR5·SSD까지 동반 수혜
헬리오스 확대의 수혜가 HBM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는 호재다.
랙 스케일 AI 시스템은 GPU뿐 아니라 CPU와 네트워크 장비, 저장장치를 함께 구성해야 한다. GPU에는 HBM이 사용되지만 CPU에는 서버용 DDR5가 필요하고, AI 학습·추론 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해 대용량 기업용 SSD도 탑재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HBM과 서버용 D램, 낸드플래시, 기업용 SSD를 모두 생산하는 종합 메모리 업체다. AMD가 헬리오스를 중심으로 AI 데이터센터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이면 제품 하나가 아니라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메모리 전반의 수요를 확보할 가능성이 있다.
삼성전자는 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를 추격하는 동시에 기업용 SSD와 서버용 D램 공급을 확대할 수 있다. 삼성전자가 AMD와 HBM뿐 아니라 DDR5, 파운드리, 첨단 패키징 등으로 협력 범위를 넓힐 경우 헬리오스 플랫폼 성장의 수혜를 가장 폭넓게 받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SK하이닉스도 엔비디아 중심의 HBM 공급 구조를 유지하면서 AMD와 다른 AI 가속기 업체로 고객을 확대할 수 있다. 자회사 솔리다임이 보유한 데이터센터용 SSD 경쟁력까지 고려하면 AMD의 랙 시스템 확대가 HBM과 기업용 SSD를 동시에 늘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 엔비디아 독점 깨지면 메모리 협상력 상승
AMD 헬리오스의 등장은 메모리 업체와 AI 반도체 고객 사이의 협상 구조에도 영향을 줄 전망이다.
엔비디아가 데이터센터 GPU 시장을 사실상 독점한 상황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의 제품 개발 일정과 품질 인증, 구매 계획에 맞춰 HBM을 공급해야 했다. 고객 한 곳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질 경우 메모리 공급사가 가격과 물량 조건을 주도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AMD가 랙 스케일 시스템을 앞세워 실제 대형 고객을 확보하면 HBM을 구매하는 대형 고객이 두 곳 이상으로 늘어난다. 여기에 구글과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등이 자체 AI 칩 개발을 확대하면서 HBM 공급사를 둘러싼 경쟁도 더욱 치열해질 수 있다.
메모리 업체 입장에서는 제한된 HBM 생산능력을 어느 고객에게 먼저 배정할지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진다. 장기 공급계약과 가격 협상에서도 이전보다 우위에 설 가능성이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헬리오스 도입은 AMD 입장에서도 중요한 분기점이다. MS는 엔비디아 GPU를 대규모로 사용하면서 자체 AI 가속기 ‘마이아’도 개발하고 있다. 이런 MS가 AMD 시스템까지 도입한다는 것은 특정 가속기에 의존하기보다 여러 플랫폼을 병행해 가격과 공급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다른 하이퍼스케일러들도 같은 전략을 택할 경우 엔비디아 중심이었던 AI 인프라 공급망은 다원화될 수 있다. 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특정 고객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동시에 전체 HBM 판매량을 늘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다만 AMD가 엔비디아와 대등한 경쟁 구도를 형성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도 많다. 엔비디아는 데이터센터 GPU 시장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으며 쿠다를 기반으로 구축한 소프트웨어 생태계와 네트워크 기술에서도 확고한 우위를 갖고 있다.
AMD는 GPU와 CPU 성능뿐 아니라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플랫폼인 로컴의 안정성과 개발 편의성을 입증해야 한다. 헬리오스의 초기 구축 과정에서 시스템 안정성과 전력 효율, 고객 지원 능력을 보여주는 것도 관건이다.
그럼에도 헬리오스가 갖는 의미는 작지 않다. AMD가 엔비디아를 단기간에 추월하지 못하더라도 GPU 한 개당 HBM 탑재량을 늘리고, 대형 고객들의 복수 공급망 구축을 촉진하는 것만으로 국내 메모리 업체에는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AMD가 엔비디아의 시장을 얼마나 빼앗느냐보다 AI 시스템 공급자가 늘어나는 것 자체가 메모리 기업에는 중요하다”며 “GPU 경쟁이 랙 시스템 경쟁으로 확대되면 HBM뿐 아니라 서버 D램과 SSD 수요까지 함께 늘어나는 구조가 형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AMD 헬리오스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가져올 가장 큰 변화는 신규 HBM 고객 한 곳의 추가가 아니다. 엔비디아 한 곳에 집중됐던 AI 메모리 시장이 복수의 플랫폼과 고객이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는 시장으로 바뀐다는 점이다.
AI 가속기 전쟁이 칩에서 랙으로 커질수록 시스템 한 대에 들어가는 메모리의 양과 종류도 늘어난다. AMD와 엔비디아의 경쟁이 격화될수록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차지할 수 있는 시장도 함께 커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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