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정혜련 작가] 전시장을 걷다 보면 유독 발걸음을 천천히 멈추게 만드는 작품들이 있다. 화려한 색채도, 거대한 규모도 아니지만 오래 바라보게 되는 그림.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열린 ‘난초의 향기는 바람을 타고 천 리를 가네’ 전시는 나에게 그런 시간이었다.
평소 한국화를 전공하고 지금도 한지 위에 아크릴채색으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작가로서 난 그림은 익숙한 소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단순히 난초를 감상하는 시간이 아니라, 옛 화가들이 한 줄기 난초에 담아낸 정신과 삶의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며 작품을 감상하니 붓끝 하나에도 작가의 철학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난초는 사군자 가운데에서도 가장 그리기 어려운 대상으로 꼽힌다. 잎은 단순해 보이지만 붓을 머뭇거리는 순간 생명력을 잃고, 꽃은 화려하지 않지만 품격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난을 그린다는 것은 식물의 형태를 재현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닦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림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먹 한 번 머금은 붓이 종이 위를 지나가는 속도, 힘을 주었다가 빼는 호흡, 그리고 넓은 여백까지도 모두 계산된 표현이 아니라 오랜 시간 쌓여온 수행의 결과처럼 느껴졌다. 화면은 단순했지만 그 안에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시간이 담겨 있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같은 난초를 그렸지만 작가마다 표현이 모두 달랐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힘차고 곧게 뻗은 잎으로 기개를 표현했고, 또 다른 이는 부드럽게 휘어진 선으로 여유를 담아냈다. 같은 소재라도 결국 드러나는 것은 작가 자신의 성품과 삶이었다. 그림은 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그리는 것이라는 말을 다시 떠올렸다. 나는 작품 속에서 난초보다 ‘선’을 오래 바라보았다. 한국화에서 선은 단순히 형태를 만드는 요소가 아니다. 선에는 호흡이 있고, 감정이 있으며, 시간의 흔적이 남는다. 붓을 너무 의식하면 선이 굳어지고, 마음이 조급하면 화면도 함께 흔들린다. 결국 좋은 선은 기술만으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전시를 관람한 뒤 참여한 전시 연계 프로그램인 합작도 그리기 역시 오래 기억에 남는다. 한 사람이 완성하는 그림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하나의 화면을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붓놀림이 어색하게 느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완성된 그림은 예상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저마다 다른 선들이 모여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모습은 마치 여러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예술은 혼자 만드는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언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보다 함께 그리는 경험이 더 큰 울림으로 남았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평소 나는 행복을 전하는 캐릭터 ‘몽다’와 친구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전통적인 한국화 기법 위에 현대적인 감성을 더해 한지와 아크릴채색으로 작업하며, 행복과 희망, 따뜻한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번 전시를 보면서 문득 나의 작업 역시 전통과 현재를 연결하는 작은 다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은 오래된 것을 그대로 지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 오늘의 사람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이어갈 때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난초를 그리던 선비들의 정신도 지금 시대에는 또 다른 모습으로 이어질 수 있다. 누군가는 디지털 드로잉으로, 누군가는 캐릭터로, 또 다른 누군가는 교육을 통해 그 정신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청소년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예술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수업을 진행한다. 학생들에게 늘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그림은 잘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사람이 오래 그린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만난 난초들도 결국 화려한 기교보다 한 사람의 마음을 담아낸 그림이었기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
전시 제목처럼 난초의 향기는 바람을 타고 천 리를 간다고 한다. 실제 난초의 향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 사람의 올곧은 마음과 정성, 그리고 예술을 향한 진심은 시간이 흘러도 누군가에게 전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전시장을 나오며 나 역시 다시 붓을 들고 싶어졌다. 더 화려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조금 더 진심이 담긴 선 하나를 그리고 싶어서였다. 어쩌면 좋은 그림은 기술보다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가장 오래된 진리를, 한 줄기 난초가 조용히 일깨워 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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