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바나나는 특별한 과일이었다. 감기라도 걸려 병원에 다녀오면 부모님은 노란 바나나 한 송이를 사 오셨다. 병문안을 갈 때도 바나나는 빠지지 않는 선물이었다. 지금처럼 수입 과일이 넘쳐나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바나나는 '귀한 과일'의 대명사였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바나나는 외화를 들여와야 수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수입 과일이었다. 당시에는 값도 비쌌고, 어린아이에게 바나나 한 개를 사주는 것이 작은 사치처럼 여겨졌다. 그러던 바나나가 1991년 수입 자유화 이후 가격이 크게 낮아졌고, 이제는 편의점과 마트 어디에서나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가장 친숙한 과일이 되었다.
너무 흔해져 오히려 특별함을 잃은 과일이 되었지만 세계를 여행하다 보면 바나나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삶을 담고 있는 중요한 식재료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바나나는 과일이 아니라 주식이다
우리는 바나나를 디저트나 간식으로 먹지만, 세계에는 바나나를 밥처럼 먹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특히 아프리카와 중남미에서는 플랜테인(Plantain)이라는 요리용 바나나가 주식 역할을 한다. 우리가 먹는 노란 바나나보다 크고 단단하며 전분 함량이 높아 생으로 먹기보다는 반드시 익혀 먹는다.
우간다에서는 삶은 플랜테인을 절구에 찧어 만든 마토케(Matoke)가 대표 음식이다. 소고기나 염소 고기 스튜와 함께 먹는데 우리나라의 감자나 쌀밥 같은 존재다.
가나에서는 잘 익은 플랜테인을 콩과 함께 볶아 먹는 레드레드(Red Red)라는 요리가 유명하다. 플랜테인의 달콤함과 토마토소스, 콩의 고소함이 의외로 잘 어울린다.
도미니카공화국에서는 삶은 플랜테인을 으깨 버터와 치즈를 넣은 망구(Mangú)를 아침 식사로 즐긴다. 여기에 계란프라이와 살라미를 곁들이면 든든한 한 끼가 된다.
쿠바와 푸에르토리코에서는 플랜테인을 얇게 썰어 두 번 튀긴 토스톤(Tostones)이 국민 간식이다. 감자튀김보다 담백하고 바삭한 식감 덕분에 맥주 안주로도 사랑받는다.
바나나는 세계적으로 연간 1억t 이상 생산되며, 쌀·밀·옥수수 다음으로 중요한 식량작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나라마다 바나나는 전혀 다른 음식이 된다
세계를 여행하다 보면 바나나는 같은 재료인데도 나라에 따라 전혀 다른 음식으로 변신한다.
태국에서는 '클루아이 부엇치(Kluay Buat Chi)'가 대표 디저트다. 잘 익은 바나나를 코코넛밀크에 넣고 설탕과 소금을 약간 넣어 끓이는데,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다.
필리핀에서는 투론(Turon)이 가장 유명하다. 바나나와 잭프루트를 춘권 피에 돌돌 말아 흑설탕을 입혀 바삭하게 튀긴 간식이다. 길거리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으며 커피와 함께 즐기는 국민 간식이다.
인도 남부 케랄라 지방에서는 파잠 포리(Pazham Pori)가 유명하다. 잘 익은 바나나를 길게 썰어 강황을 넣은 반죽을 입혀 튀기는데,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 오후 차와 함께 먹는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피상 고렝(Pisang Goreng)을 즐긴다. 바나나튀김 위에 초콜릿 시럽, 치즈, 연유를 듬뿍 올려 디저트처럼 먹는다.
브라질에서는 바나나를 모차렐라 치즈와 함께 오븐에 구워 고기 요리의 곁들임 음식으로 내기도 한다.
베네수엘라에서는 플랜테인을 세로로 잘라 구운 뒤 치즈를 넣어 만든 카노아(Canoa)가 인기다. 작은 배 모양을 닮아 '카누'라는 이름이 붙었다.
미국에서는 오래된 바나나를 버리지 않고 바나나 브레드를 만들어 먹는 문화가 있다. 대공황 시절 식재료를 아끼기 위해 시작된 음식이 지금은 가장 인기 있는 홈베이킹 메뉴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얼린 바나나에 초콜릿을 입힌 초코 바나나가 여름 축제의 대표 간식이며, 최근에는 바나나를 이용한 샌드위치와 크림 디저트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바나나는 스무디, 팬케이크, 요거트볼, 샐러드, 오트밀, 빙수, 케이크 등 다양한 디저트의 주재료가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바나나는 사라졌다
우리가 지금 먹는 바나나는 대부분 캐번디시(Cavendish) 품종이다.
하지만 195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세계 바나나 시장은 그로 미셸(Gros Michel)이라는 품종이 지배했다. 향이 훨씬 진하고 달콤했지만 '파나마병'이라는 곰팡이병 때문에 거의 멸종하다시피 했다. 그 빈자리를 대신한 것이 캐번디시 품종이다. 병에 비교적 강하고 운송이 쉬워 세계 시장을 장악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캐번디시마저 TR4(열대 레이스4)라는 새로운 곰팡이병이 빠르게 확산하면서 위기를 맞고 있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를 계속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먹는 바나나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가장 흔하지만 가장 세계적인 과일
예전에는 귀해서 특별했고, 지금은 흔해서 소중함을 잊고 지낸 과일. 하지만 세계를 여행하며 만난 바나나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하루 세 끼를 책임지는 주식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축제의 간식이었으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족의 추억이 담긴 음식이었다.
우리 식탁 위 바나나 한 개는 필리핀의 길거리에서 갓 튀겨낸 투론이 되기도 하고, 태국의 달콤한 코코넛 디저트가 되기도 하며, 우간다에서는 한 가족의 저녁 식사가 되기도 한다.
다음번 마트에서 바나나 한 송이를 장바구니에 담게 된다면, 잠시 그 긴 여정을 떠올려 보자. 열대의 뜨거운 햇살 아래 자란 바나나가 수천 킬로미터를 건너 우리 식탁에 오르기까지, 그 안에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삶과 문화, 그리고 음식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평범한 바나나 한 개가 세계를 가장 맛있게 여행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플랜테인= 아프리카와 중남미,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주로 재배하며 주식으로 섭취하는 요리용 바나나다. 일반 디저트용 바나나에 비해 당도가 낮고 전분 함량이 높아 단단하며 고구마나 감자와 유사한 맛이 나기 때문에 대개 굽거나 튀겨서 조리해 먹는다.
여성경제신문 전지영 푸드칼럼니스트(foodnetworks@hanmail.net)
전지영 세계식문화 칼럼니스트
식품영양학 전공 후 청와대 비서실 영양사를 거쳐 외식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학 겸임교수 및 농식품 컨설턴트로 활동 중이다. 음식을 단순히 먹는 대상이 아닌 한 사회의 시간과 기억을 이어주는 언어로 바라보며 유엔식량기구(FAO)와 주요 언론에 칼럼을 연재해 왔다. 식탁 위 한 그릇의 음식에서 세계의 문화와 삶을 읽어내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기록하는 사람으로 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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