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 SF 연작소설 '이름 없는 것들의 밤' 출간
인류 말살하려는 기계에 맞선 사투 그려…"인간다움 정의할 수 없어"
"우크라이나 전쟁·가자지구 폭격에 영향"…공감과 연대 강조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과학소설(SF)은 과학적 상상력과 접목된 문학의 한 장르를 일컫는 용어로, 때로 현실과 거리가 먼 가벼운 장르물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SF는 먼 미래에 대한 터무니 없는 공상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가장 날카롭게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소설가 정보라(50)에게 SF는 특히 동시대의 암울한 현실을 좀 더 정확하게 바라보기 위한 거울에 가깝다.
부커상과 전미도서상, 필립 K. 딕상, 로커스상, 어슐러 K. 르 귄상 등 세계적 문학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며, 한국 SF의 저력을 입증한 그가 신작 디스토피아 SF로 돌아왔다.
현대문학에서 '이름 없는 것들의 밤'을 펴낸 정보라를 서면 인터뷰로 만났다.
◇ 인류 문명 비판적 성찰…'인간다움'에 관한 철학적 질문 던져
신작은 1부 '밤이 오면 우리는'과 2부 '예언자', 3부 '우리는 악마에게서 왔다' 등 세 편으로 구성된 연작소설이다.
1부는 작품집 전체의 세계관을 여는 작품으로, 핵실험과 전쟁 등 인간의 오판으로 위기에 처한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작품 속 기계 문명 시스템은 "지구상 다른 모든 생물종을 위한 최선의 안전장치는 인류 문명의 종말"이라는 '합리적' 결론에 도달하고, 인류를 제거하려 한다.
작가는 이에 맞선 인간과 비(非)인간인 '흡혈인', '인간-로봇', '인조인간' 등 다양한 존재의 사투를 하드보일드한 문장으로 그려낸다. 특히 유혈이 낭자한 전투가 펼쳐지는 가운데 "난 사람이에요"라고 주장하는 인조인간의 등장은 '인간다움'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작가가 생각하는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작가는 2013년부터 2021년까지 대학에서 'SF를 통한 자아의 발견'이라는 교양수업을 진행한 적 있다며 "학생들과 함께 매 학기 도달한 결론은 '인간다움'을 정의할 수 없다는 점"이라고 답했다.
인간은 이렇게 저렇게 생긴 생물이라고 정의하면 그 외모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이 인간에서 배제되고, '생각하는 존재'라고 정의하면 잠드는 순간 모든 사람이 인간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어째서 인간다움을 정의해선 안 되는지, 어떤 새로운 종류의 인간다움이 시대나 기술 변화와 함께 나타나는지 탐구하는 것은 매우 즐거운 경험이었다"며 "인간은 불완전하고 복잡하고 다면적인 존재다. 그 정도만 확실한 것 같다"고 말했다.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등에 영향…SF로 풀어낸 비극적 현실
작품의 2부와 3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및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정보라는 '작가의 말'에서 언급했다.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 등 참상을 SF로 풀어낸 이유도 궁금했다.
정보라는 "군사력은 이제 기술력이고 실제로 SF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라며 "화면 속으로 전쟁을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SF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실제로 사람이 죽고 다치는 일이 몇 년씩 이어지는데 이 상황을 흥미진진한 이야기처럼 바라볼 수는 없다"며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대를 강조했다.
아울러 그가 그려낸 미래의 디스토피아는 단순히 상상력의 산물만은 아니다.
그는 작품을 쓰는 데는 실제 전쟁이나 혁명 등 극단적이고 위험한 상황을 경험한 작가들이 남긴 작품들을 최대한 참조했다며 "3부의 인공지능 공장 구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폴란드에 지었던 트레블린카(Treblinka) 강제수용소 자료를 참조했다"고 설명했다.
정보라는 또 '작가의 말'에서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힘의 논리를 강요하며 인간존재를 자기들의 이득에 맞춰 바꾸려는 집단이나 체제가 있었다"며 "1부와 2, 3부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이런 폭력적인 집단, 비인간적인 체제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이번 작품에서 억압적 체제의 최대 피해자인 여성이 저항의 구심점이 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려냈다.
작품 속 여성을 그릴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는지를 묻자, 작가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들려줬다.
"1945년 초 나치의 패배가 확실시되던 무렵 독일군이 소위 '죽음의 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의 모든 수인(옥에 갇힌 사람)들을 다 살해하고 화장장을 해체해서 독일로 가져가려 한다는 소식이 수인들 사이에 전해집니다. 그래서 수인들이 탈출을 계획하는데 이때 여성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정보라는 "3부 등장인물 중에서 '테린'과 '사피르'의 이름은 아우슈비츠 봉기를 주도했던 여성들의 이름과 성에서 따 왔다"며 "실제 역사에 남은 여성들의 이야기와 제가 현실에서 만나는 여성 활동가들의 모습을 최대한 압축적으로 소설에 반영하기 위해 애쓰는 편"이라고 했다.
◇ '30년 내공' 한국 장르문학 약진…"창작·번역 지원 필요"
최근 한국 작품이 세계적 SF 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등 한국 장르 문학이 도약할 수 있었던 비결로는 다양성을 꼽았다.
정보라는 "한국 장르 소설은 대단히 범위가 넓고 다루는 주제와 소재도 상상할 수 없이 다양하다"며 "'등단'이라는 검증 시스템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완성도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그만큼 더 자유롭다고 생각한다"고 해석했다.
또 "한국 장르문학은 태생부터 PC통신이나 인터넷 동호회 등에서 독자들과 직접 소통하는 방식으로 성장해서 독자의 요구에 민감하고 변화에 저항이 별로 없다"며 "독자들의 안목도 지금 한국 장르 문학을 키우는 데 굉장히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미 30년 이상 쌓여 있던 한국 장르 문학의 내공이 최근에 빛을 발할 기회를 얻은 것 같다"며 "앞으로도 이런 약진이 계속 이어지려면 작가들이 계속 작품을 발표하고 독자와 소통할 기회가 안정적으로 주어져야 하고, 창작과 번역 양쪽에 지원이 충실하게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kih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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