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한스경제 석주원 기자 |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의 가파른 성장세에 힘입어 전례 없는 랠리를 펼치던 글로벌 반도체 기술주들이 최근 동반 폭락세를 맞이하며 전 세계 증시를 뒤흔들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지수의 기준 역할을 하는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SOX)는 고점 대비 20% 하락하며 급격한 조정을 겪고 있으며 주간 낙폭 기준으로도 상당한 하락세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아시아 반도체 공급망 전반으로 고스란히 전이돼 일본의 키옥시아가 하루 새 16% 넘게 폭락하고 대만의 TSMC가 7.3% 빠지는 등 파장이 커지고 있다.
국내 반도체 생태계 역시 양대 축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유례없는 수준의 폭락을 겪으며 투자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최근 한 달간 유가증권시장 시가총액 1위인 삼성전자는 최고점 대비 최대 34.0% 급락했으며 시총 2위인 SK하이닉스는 최고점 대비 최저점 하락률이 43.8%에 달하는 혹독한 조정을 치렀다.
▲ ‘AI 도파민 숙취’와 AI 인플레이션 우려
시장 전문가들은 이번 주가 폭락을 두고 “AI 랠리라는 도파민이 끝난 뒤 찾아온 숙취”라는 비유를 사용하며 단일 악재가 아닌 복합적 요인이 겹쳐 발생한 위기라고 진단하고 있다.
그간 시장을 이끌어온 원동력은 하이퍼스케일러들의 막대한 설비투자(CAPEX) 경쟁이었다. 문제는 올해까지 AI 설비투자가 5000억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실제 소비자의 연간 AI 서비스 지출은 120억달러 수준에 머물러 있어 심각한 투자 대비 수익(ROI) 불균형에 대한 경고음이 커졌다.
이와 함께 메타가 AI 인프라 중 미사용분을 외부에 임대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인프라 수요가 정점을 지난 것 아니냐는 우려를 키우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글로벌 파운드리 1위 기업인 TSMC가 연간 설비투자 가이던스를 기존 520억~560억달러에서 600억~640억달러로 대폭 상향한 점은 시장에서 중장기 마진 압박 및 감가상각비 부담이라는 악재로 인식돼 주가 조정을 유발한 것으로 풀이된다.
여기에 메모리 반도체(HBM 및 고용량 SSD) 등 부품 가격 급등은 전통적인 기업용 IT 예산을 갉아먹는 역효과를 냈다. 대표적으로 IBM은 잠정 매출액이 전망치를 단 3.7% 밑돌았음에도 AI 비용 상승으로 인한 하드웨어 및 인프라 지출이 7% 감소하는 부작용이 숫자로 증명되며 하루 만에 주가가 25.21% 폭락하는 최악의 하루를 보냈다.
다만 웨이저자 TSMC 회장은 지난 16일 2분기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2029~2030년까지 수요가 매우 강할 것으로 예측되며 일시적 조정이 있을 수는 있지만 확신하기는 어렵다”며 장기적 수요는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다른 자리에서는 “공급과 수요 격차가 매우 크며 AI 모멘텀이 2030년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 중국 ‘키미 K3’ 쇼크와 구글 제미나이의 기술 병목
소프트웨어 분야에서의 예기치 못한 경쟁 구도 다변화 역시 물리적 하드웨어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심리적 방아쇠가 됐다. 중국의 AI 스타트업 문샷AI가 공개한 오픈소스 모델 ‘키미 K3’는 2조8000억개의 매개변수 규모를 갖췄음에도 학습 가중치를 전면 오픈소스 형태로 무료 공개하겠다고 밝혀 시장에 큰 충격을 줬다.
평가 과제당 처리 비용 기준으로 키미 K3는 0.94달러 수준을 기록해 앤트로픽의 클로드 페이블 5(2.75달러) 대비 비용 효율성이 매우 뛰어나며 미국 최상위 독점 모델과의 기술 격차를 단 2~3개월로 좁힌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고성능 모델의 무료 개방은 서구권 빅테크들의 고비용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회의론을 자극했다.
동시에 구글의 차세대 AI 모델인 ‘제미나이 3.5 프로’의 출시가 코딩 성능 미달로 인해 수개월 연기되고 알파벳의 주가가 최고가 대비 약 15% 하락하는 등 물리적 하드웨어 지출액을 뒷받침할 AI 소프트웨어의 개발 병목 현상도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 국내 자본 시장의 수급 왜곡과 레버리지 매도 폭탄
이번 조정 국면에서 가장 뼈아픈 타격을 입은 곳은 단연 국내 반도체 대장주들이다. SK하이닉스는 미국 나스닥 ADR 상장 첫날 공모가 대비 13% 급등하며 호재를 맞는 듯했으나 수급 분리 현상이 발생하며 거대한 역풍을 맞았다. 외국인이 달러로 쉽게 매매할 수 있는 미국 ADR을 사들이는 대신 국내 본주 시장에서는 거센 매도세를 쏟아낸 것이다.
실제로 외국인은 최근 20거래일 동안 SK하이닉스 한 종목에서만 무려 23조원어치를 순매도했으며 지난 13일 하루에만 외국인(1조4264억원)과 기관(1조4688억원)의 동반 매도 폭탄이 쏟아져 SK하이닉스 주가는 하루 만에 15.37% 폭락했다. 이는 1996년 상장 이후 일간 기준 사상 최대 낙폭이다.
국내 시가총액 1위인 삼성전자 역시 같은 날 외국인들의 무차별적인 매도세 속에 하루 만에 10.7% 폭락해 코스피 전체를 흔들었다. 블룸버그통신 등 외신은 이러한 폭락의 핵심 원인 중 하나로 국내 증시의 과도한 단일 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 상품 구조를 정조준했다.
골드만삭스 보고서에 따르면 13일 SK하이닉스 주가가 급락하자 해당 레버리지 상품을 운용하는 펀드들이 익스포저(위험 노출액)를 강제로 재조정하기 위해 당일 전체 거래 대금의 약 18%에 달하는 50억달러(약 7조원) 규모의 SK하이닉스 주식을 시장에 투매해야 했다.
이러한 강제 청산 매도 메커니즘이 주가 하락 폭을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증폭시켰으며 투기 심리와 변동성이 미국 ADR을 타고 글로벌 메모리 주식 전반의 투매로 수출됐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 ‘피크아웃’ 우려와 반등을 둘러싼 엇갈린 전망
일부 전문가들은 하이퍼스케일러들의 투자 규모가 증폭될수록 데이터센터 가동을 위한 인프라 설비 구축의 병목 현상이 가중되고 있으며 일반 PC와 스마트폰 시장의 수요 위축으로 재고 부담이 이어지면서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조기 종료를 가속화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주요 메모리 3사와 중국 기업들의 증설 라인이 가동되는 2027~2028년 무렵에는 수요 정체와 함께 심각한 공급 과잉이 도래할 것이라는 우려도 힘을 얻고 있다.
마이클 윌슨 모건스탠리 CIO는 지난 6일 보고서에서 “반도체 모멘텀 되돌림이 지수 내 대형주 일부에서 일어나고 있어 단기적으로 시장이 계속 눌릴 것”이라며 “하이퍼스케일러 쪽으로의 순환매가 전체 증시에서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투자은행들과 전문기관들은 이번 주가 폭락을 장기 침체 신호가 아닌 성장통이자 포지션 과열을 해소하는 일시적 조정으로 분류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자산운용사 로베코는 보고서를 통해 “소버린 AI가 각국의 최우선 국가 전략 산업으로 격상됐고 민간 빅테크 기업을 넘어 정부 예산이 투입되는 인프라 확장이 뒤를 받쳐주기 때문에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지속성은 시장의 우려보다 한층 길어질 것”이라며 일각에서 제기하는 피크아웃(정점 통과) 우려는 과도한 측면이 있다는 의견을 냈다.
반도체 장비 업계의 강자인 ASML이 최소 가격과 최소 물량을 명시한 장기 고정 계약을 통해 안정적 이익을 실현하고 있는 점 역시 반도체 산업이 유틸리티 중심의 비즈니스로 전환하고 있음을 증명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로저 다센 ASML 최고재무책임자는 “고객사들이 장비 도입 단계에서 최소 인도 가격과 최소 물량을 동시에 약정하는 등 전례 없는 구조의 장기 계약 형태로 설비 확보에 나서고 있다”며 “이는 변동성이 심했던 메모리 제조 공정이 예측 가능한 유틸리티 성격의 인프라 산업으로 질적 체질 개선을 이루고 있음을 증명한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결론적으로 최근의 반도체 중심의 폭락세는 AI 인프라 독점 시대에서 오픈소스 생태계 다변화로 넘어가는 과정의 과매도 구간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과열된 시장 심리가 진정 국면으로 들어선 만큼 기술 변화와 장기 공급 파트너십을 갖춘 우량 종목을 중심으로 대응해 나가는 가치 투자 전략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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