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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면 우산을 펴야 한다. 신발은 젖고 바짓단은 축축해진다. 비가 그치면 상황이 나아질까. 이번에는 뜨거운 아스팔트와 눅눅한 공기가 기다린다. 편의점까지 왕복 20분. 라면 한 봉지를 사러 나섰다가 땀과 빗물로 샤워하고 돌아올 바에는 차라리 배달비를 내는 편이 낫다.
장마와 폭염이 번갈아 이어지면서 편의점 퀵커머스 주문이 빠르게 늘고 있다. 이달 6일부터 12일까지 CU와 이마트24의 퀵커머스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각각 189.3%, 188% 증가했다. GS25 역시 이달 초 관련 매출이 전년 동기보다 54% 늘었다. 비가 내리거나 기온이 치솟을수록 소비자의 손가락은 편의점 앱의 주문 버튼으로 향했다.
주문 목록은 거창하지 않다. 라면과 생수, 얼음컵, 과자, 아이스크림처럼 집 앞 편의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물건들이다. 라면 한 봉지 1000원, 얼음컵 하나 1000원, 생수 한 병 1000원. 장바구니에 담긴 상품값보다 배달비가 더 비싼 경우도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주문한다. 이들이 산 것은 생수 몇 병만이 아니다. 우산을 펴고 신발을 신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일, 빗길을 걷고 다시 젖은 우산을 말리는 일까지 한꺼번에 덜어낸 것이다.
과거 배달은 짜장면이나 치킨처럼 한 끼 식사를 주문하는 수단이었다. 최소 주문금액을 채우려 필요하지 않은 메뉴까지 추가하는 일도 흔했다. 지금은 편의점까지 배달의 문턱이 낮아졌다. 음료 하나가 부족하거나 갑자기 아이스크림이 당겨도 스마트폰을 몇 번 두드리면 된다. 배달이 특별한 날의 서비스에서 일상의 심부름으로 바뀐 셈이다.
돈으로 시간을 사는 소비는 새롭지 않다. 빨래는 세탁특공대에, 장보기는 새벽배송에, 음식물 쓰레기는 밀키트에 맡긴 지 오래다. 이제는 집 앞 편의점에 다녀오는 몇 분까지 구매 대상이 됐다. 시간이 부족해서만은 아니다. 갈 수 있지만 가고 싶지 않은 마음, 할 수 있지만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돈으로 해결한다. 소비자는 물건보다 귀찮음을 없애는 데 지갑을 연다.
특히 비와 더위는 배달비의 체감 가격을 낮춘다. 맑고 선선한 날의 배달비 3000원은 아깝다. 폭우가 쏟아지고 체감온도가 35도를 넘는 날의 3000원은 제법 합리적으로 느껴진다. 문밖의 불쾌함이 커질수록 배달비는 낭비가 아니라 외출 방지 보험료가 된다. 편의점 퀵커머스가 파는 진짜 상품은 라면도, 얼음컵도 아닌 셈이다.
물론 주문 버튼을 누르는 순간 잠깐의 죄책감은 따라온다. 고작 몇백 미터를 움직이지 않으려고 배달비를 냈다는 자책이다. 하지만 창밖에는 비가 옆으로 내리고 현관문을 열면 뜨거운 김이 밀려든다. 이 정도 날씨라면 게으름에도 정상 참작이 필요하다.
사는 게 팍팍할수록 사람들은 작은 수고부터 줄인다. 오늘 저녁에도 누군가는 편의점 불빛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며 생수와 라면을 장바구니에 담을 것이다. 배송비가 물건값보다 비싸다는 사실을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결제 버튼을 누른다. 우산 대신 배달비를 사는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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