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빌딩 숲 안쪽에 서울풍물시장이 위치한다. 중고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특수 상권이다. 만물시장, 벼룩시장, 마지막 시장 등 여러 별명은 서민들 생활사를 대변한다. 과거 청계천 복원 공사 직후 동대문운동장 시대를 마감했다. 이후 옛 숭인여중 부지에 건립된 2층 실내 상가에 정착했다. 골동품, 구제 의류, 단종 전자기기가 매대를 빽빽하게 채운다. 아날로그 감성을 쫓는 방문객 발걸음이 계속된다. 무질서했던 옛 노점 풍경은 정돈된 실내 구역에 수용됐다. 비바람 제약 없는 쾌적한 환경에서 중고품을 탐색하는 편의성을 갖췄다. 희귀 중고품이 모이는 거대 유통망이 도심 한복판에 섰다.
◇미나리밭 판자촌에서 싹튼 도깨비 장터 생명력
출발점은 한국전쟁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폭격에 집을 잃은 피란민들은 청계천 주변 미나리밭에 판잣집을 지었다. 뚝섬 나루터에서 실어 온 땔감, 왕십리 배추가 쏟아지던 배후 상권에 빈민들이 생계를 위해 좌판을 펼쳤다. 미군 부대 유출품, 전국에서 모아들인 고물이 거래 중심에 섰다. 낮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인파로 붐빈다. 어둠이 내리면 상인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사람들은 신출귀몰한 모습을 빗대 도깨비 장터라 불렀다. 버려진 고물도 솜씨 좋은 기술자 손을 거치면 번듯한 상품으로 둔갑했다. 고장 난 시계, 찌그러진 냄비, 밑창 닳은 구두가 새 생명을 얻었다. 가난 속에서 밥벌이를 포기하지 않았던 상인들 생존력이 척박한 흙바닥에 뿌리를 내렸다. 폐허 속에서 희망을 건져 올린 공간이었다.
◇새마을운동 기회 활용한 골동품 만물상 전성기
1960년대에서 1970년대 국가 주도 근대화 작업이 속도를 냈다. 새마을운동 여파에 초가집이 헐리자 옛 목가구, 도자기, 고서가 길거리에 쏟아졌다. 수집상들은 전국 산골짜기를 돌아다녔다. 헐값에 사들인 물건에서 높은 가치를 보유한 문화재가 발굴되기도 했다. 이윤을 노리는 중간 상인, 수집가들이 황학동 골목에 집결했다. 희귀 골동품 점포만 130곳을 웃돌았다. 가짜 유물이 유통된다는 비판이 일자 상인회는 자정 노력을 벌였다.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점주들은 서로 감시망을 가동했다. 옛 물건 가치를 지키려는 사투가 계속됐다. 귀한 유물들이 모이는 거래소로 명성을 떨쳤다. 다락방 구석에 잠자던 골동품들이 부활하는 전성기였다. 상인들 눈썰미는 전문가 못지않게 예리했다. 세월의 때를 닦아내 숨은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이 시장 생태계를 지탱했다.
◇철거 강제 이주 반복한 유랑 상인들의 역사
호황기는 짧았다. 1980년대 아시안게임, 올림픽 국제 행사 개최를 앞둔 시점 서울시는 강압적 도시 정비에 나섰다.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황학동 골동품상 대다수는 외곽 장안평 구역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활기를 잃은 거리를 중고 가전제품, 기계 수리 점포가 채웠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가 터지자 일자리를 잃은 실직자들이 생존을 위해 거리로 나왔다.
삼일시민아파트 주변 4차선 도로는 생계형 노점상으로 덮였다. 2003년 시작된 청계천 복원 공사는 또 다른 타격을 입혔다. 삶의 터전을 잃은 상인들은 동대문운동장 축구장 안으로 밀려났다. 천막을 친 채 장사를 이어가던 동대문 시대도 짧았다. 공원화 사업에 밀려 옛 숭인여중 빈터로 다시 짐을 쌌다. 봇짐을 수없이 싸서 푸는 유랑의 역사였다. 도시 개발 이면에서 벼랑 끝으로 밀려난 상인들 흔적이 골목마다 배어 있다.
◇번역기 켜는 외국인 글로벌 명소
아픔을 딛고 일어선 실내 복합 장터는 최근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구하기 힘든 팝송 LP판, 빈티지 가죽점퍼, 수동 필름 카메라를 찾는 해외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스마트폰 번역 앱을 켠 외국인들이 서툰 한국말 억양으로 흥정을 시도한다. 국경을 초월한 K빈티지 열풍이 골목 구석구석을 달군다. 상인들은 미소에 손짓 발짓을 동원해 글로벌 손님을 맞이한다. 한국 근현대사를 생생하게 체험하려는 외부인 발길이 급증한다. 국적과 언어 장벽은 아날로그 감성 앞에서 사라진다. 대형 백화점 명품 쇼핑에 지친 여행자들은 먼지 속에서 희귀한 아이템을 발굴한다. 한국 1970년대 시대상이 묻어나는 물품들은 문화 상품으로 기능한다. 낡은 카세트테이프, 필름 카메라 셔터 소리에 열광하는 젊은 외국인들 모습은 신설동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청춘1번가 레트로 감성 풍맛골 먹거리 연계
건물 2층 안쪽에 조성된 테마존 청춘1번가는 방문객에게 시간 여행을 선사한다. 1960년대 옛 포목점, 이발소, 흑백 사진관 풍경을 세트장처럼 재현했다. 오래된 청춘다방 좁은 DJ 부스에서는 전축 바늘을 타고 옛 가요가 흘러나온다. 장터 유람 백미는 출출한 배를 채워주는 길거리 미식이다. 식당가가 모인 풍맛골 구역에서는 기름에 튀겨낸 고기튀김, 가마솥에서 끓여낸 소머리국밥, 철판 위에서 익어가는 호떡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저렴한 먹거리는 뻐근한 다리를 쉬어가게 해준다. 걸어서 닿을 수 있는 용두동 주꾸미 미식 골목까지 동선을 묶어 반나절 복합 투어가 완성된다. 물건을 매매하는 상업 구역을 탈피해 근현대 역사 박물관으로 성장했다. 버려진 물건을 거둬들여 정성껏 쓰다듬어 온 상인들 손길이 최고 수준 빈티지 명소를 일구어냈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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