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ose the important over the urgent."
긴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하라.
파친코의 작가 민진 리가 지난 5월 예일대학교 클래스 데이 연설에서 던진 이 문장은 그가 서른여섯 해에 걸쳐 도달한 결론의 압축판이다. 그는 이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 전체를 펼쳐 보였고 그 끝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이 남겨둔 두 개의 시간 개념,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꺼내 들었다.
낭비였는지 의심했던 시간들
민진 리는 서른여섯 해 전 같은 자리에서 졸업생으로 서 있었다. 역사학을 전공했고 역사학 교수가 되고 싶었지만 성적도 교수진의 지지도 얻지 못했다. 캠퍼스를 떠나며 그가 품었던 질문은 하나였다. '4년을 낭비한 것은 아닐까.'
이후의 삶도 답을 서둘러 주지 않았다. 맨해튼 로펌 변호사 자리를 2년 만에 그만두고 소설을 쓰기로 했을 때 그는 스물여섯이었다. 소설 쓰는 법조차 몰라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첫 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은 12년 후, 두 번째 소설 <파친코> 는 다시 10년 후에 나왔다. 이번 가을 세 번째 소설을 앞두고 그는 쉰여덟이다. 서른 해 동안 세 권의 책. 아버지는 늘 더뎠던 어린 그에게 '거북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파친코> 백만장자를>
그 느린 속도가 실제로 무언가를 만들어낸 지점은 대학 3학년, 한 시간 남짓 머물렀던 다과회였다. 한국사 수업에서 일본인 교수의 편견 어린 채점에 항의한 그는 익명의 살해 협박 편지를 받았다. 무너져 있던 그를 다시 세운 건 한 목사의 격려였고 그 말을 따라 참석한 다과회에서 재일한국인 가족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4년의 대학 생활 중 단 한 시간이 이후 수십 년에 걸쳐 <파친코> 를 써 내려가게 만든 씨앗이 됐다. 파친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민진 리는 이 경험들을 다시 읽어내는 도구로 두 개의 그리스어 단어를 꺼냈다. '크로노스'는 시계로 잴 수 있는 시간, 마감과 성과의 시간이다. 서른이 되기 전에 얼마를 모아야 한다는 압박이 여기 속한다. 데드라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죽음을 연상시킨다는 사실을 그는 지적했다. 뛰어난 성취를 좇는 사람일수록 크로노스에 깊이 매몰되고 목표에는 언제나 기준과 기한이 따라붙기에 희망과 불안이 한 몸으로 온다.
'카이로스'는 적절한 순간, 결정적인 기회다. <오디세이아> 에서 오디세우스가 결정적인 행동을 취하는 순간마다 등장하는 시간이다. 크로노스가 잴 수 있는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알아채야 하는 시간이다. 문제는 이 둘이 겪는 순간에는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협박 편지를 받았던 그날, 다과회에서의 그 한 시간은 당시엔 그저 고통스럽거나 사소했다. 그 순간이 카이로스였다는 사실은 서른 해가 지나서야 드러났다. 오디세이아>
민진 리는 이 두 시간을 동시에 지니는 감각을 시간의 이중 초점 안경이라 불렀다. 지금 이 순간의 급박함과 그것이 나중에 어떤 의미를 가질지를 동시에 보는 시선, 자신의 삶을 그 순간의 주인공이 아니라 뒤에서 서술하는 작가의 눈으로 바라보는 방식이다.
중요한 것을 알아보는 법
그가 지금의 청년들을 불안의 세대라 부른 이유가 여기 있다. 팬데믹, 전쟁, 기후 위기,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격변까지 감당해야 했던 세대에게 세상은 끊임없이 긴급함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긴급함과 중요함은 다르다. 문자메시지와 DM(다이렉트 메시지)은 긴급해 보이지만 대부분 중요하지 않다. 중독적인 충동도 마찬가지로 긴급하다고 느껴지지만 오히려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 크로노스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한 채 매번 긴급한 것에 반응하며 소진된다.
카이로스의 시선이 필요한 이유다. 지금 벌어지는 일이 나중에 어떤 의미를 가질지 상상할 수 있는 사람만이 당장의 소음 속에서 중요한 것을 골라낼 수 있다. 민진 리는 이것이 오디세우스처럼 언제나 영리하게 결단을 내리는 능력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그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요한 요구를 처리하고 계속 배우며 자기 몫을 해내는 일을 반복했을 뿐이다. 그 반복이 서른 해 후에 무엇이 됐는지는 당시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모든 시간은 결국 이야기가 된다
아들이 세 살이던 해, 그는 간경변 진단을 받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조차 알 수 없던 그 순간 참여할 수 있었던 임상시험을 만났고 병은 완치됐다. 이 역시 훗날 카이로스로 불렸다. 그 순간은 저절로 온 행운이 아니다. 협박을 받고도 수업을 포기하지 않고, 열두 해와 열 해라는 긴 크로노스를 버텨낸 축적이 없었다면 다과회의 한 시간도 임상시험이라는 기회도 그저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카이로스는 크로노스를 성실하게 통과한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무늬가 아닐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결국 희망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의 실패와 지체도 언젠가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는 것. 서른여섯 해 전 캠퍼스를 떠나며 자신의 시간을 낭비라 여겼던 학생이 결국 그 시간 전부를 재료로 삼아 파친코를 완성해냈듯이 말이다. 지금이 크로노스인지 카이로스인지는 아무도 미리 알 수 없다. 다만 안경을 쓰고 삶을 끝까지 읽어낼 용기가 있다면 모든 시간은 결국 이야기가 된다.
핵심 노트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구분: 시계로 재는 시간과 성과의 시간에만 갇혀 살면 긴급함과 중요함을 구분하지 못한 채 매번 소진됩니다. 지금 벌어지는 일이 나중에 어떤 의미를 가질지 상상하는 시선이 있어야 진짜 중요한 것을 알아볼 수 있다.
낭비처럼 보인 시간의 재해석: 대학 시절의 좌절과 협박 편지, 우연히 참석한 한 시간짜리 다과회처럼 당시엔 고통스럽거나 사소해 보였던 순간들도 서른 해가 지나서야 결정적인 기회, 즉 카이로스였음이 드러났다.
카이로스는 크로노스를 버텨낸 사람에게만 보인다: 협박을 받고도 수업을 포기하지 않고, 소설 쓰는 법을 몰라도 다시 배우기를 택하며 열두 해와 열 해라는 긴 시간을 성실하게 통과했기에 다과회의 한 시간과 임상시험이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을 수 있었다.
여성경제신문 최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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