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반지도 없이, 세례도 없이, 한 여성의 조용한 불복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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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반지도 없이, 세례도 없이, 한 여성의 조용한 불복종

프레시안 2026-07-18 09:03:15 신고

3줄요약

고아, 그리고 조숙한 회의주의자

메리 페닝턴(Mary Penington, 1623~1682)은 1623년 영국 켄트 지방 군인 존 프라우드 경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네 살도 되기 전에 부모를 모두 잃고 후견인 집을 전전하며 자랐는데, 아홉 살 무렵부터는 후견인의 과부 누이 캐서린 스프링엣 부인 집에서 자랐다. 이 부인은 의술, 심지어 외과수술까지 다룰 줄 아는 인물이었다. 당시 귀족집안 안주인에게 이런 가정의술은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메리가 어릴 때부터 실용적 지식과 자립성을 몸에 익히며 자랐다는 점은 훗날 그가 남편 없이도 집안 살림과 재산을 혼자 꾸려나가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열여덟 살에 메리는 그 집 아들 윌리엄 스프링엣과 결혼하는데, 이때 결혼반지를 끼지 않았다. 지금이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엔 "저 부부 뭔가 좀 이상하다"는 뒷말이 나올 만한 파격이었다. 사회적 체면 따위는 처음부터 안중에 없었던 모양이다.

전쟁, 사별, 그리고 세례를 거부한 갓난아기

1642년 잉글랜드 내전이 터지고 남편은 의회파 군인으로 참전했다가 병을 얻어 눕는다. 만삭의 몸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남편에게 달려갔지만 1644년 2월,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은 죽는다. 며칠 뒤 유복녀가 태어났고, 이름을 라틴어로 "윌리엄의 여성형"에 해당하는 굴리엘마 마리아 포스투마로 지었다. 죽은 아버지 이름을 그대로 딸에게 새겨 넣은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친척들이 아이 세례를 받으라고 목사까지 여럿 보내 설득했지만 메리는 끝까지 거부했다. 영국국교회 자체를 이미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갓 남편을 잃고 갓난아기를 안은 젊은 과부에게 이 정도 고집을 부리게 만든 신념이 무엇이었을지, 후대 사람들은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재혼, 그리고 퀘이커라는 이름의 위험한 선택

10년 뒤 만난 아이작 페닝턴 (1616~1679)은 런던시장을 지낸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1654년 둘은 결혼했고, 1658년에는 부부가 함께 퀘이커교의 초기 지도자인 조지 폭스(1624~1691)의 설교를 듣고 퀘이커가 된다. 당시 퀘이커는 지금 생각하는 온건한 평화주의 종교모임이 아니라, 국가와 국교회 양쪽 모두에게 "위험분자" 취급을 받던 신흥 '이단집단'이었다. 퀘이커들은 “모든 사람이 신 앞에 평등하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계급사회인 영국에서 왕이나 귀족 앞에서 경의를 표시하는 모자를 벗지 않고, 충성선서를 거부하고, 계급존칭을 안 쓰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지배층 입장에서 퀘이커들은 골치 아픈 존재였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선택의 대가는 혹독했다. 시아버지가 반역죄로 몰려 재산이 몰수되면서 살던 집까지 빼앗겼다. 메리는 여기서 진가를 발휘한다. 재산관리와 건축설계에 밝았던 그녀는 남은 자금을 긁어모아 잉글랜드 남동부, 버킹엄셔 주에 있는 소도시 애머샴(Amersham) 근처에 우드사이드라는 집을 사들이고 손수 개축해 가족의 새 거처를 마련했다. 남편 아이작은 선서거부와 퀘이커모임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여섯 차례나 투옥되었지만, 그동안 집안이 파산하지 않은 건 순전히 메리의 수완 덕이었다.

딸의 결혼, 그리고 펜실베이니아

이 부부의 딸 굴리엘마는 1672년 청년 윌리엄 펜(William Penn, 1644~1718)과 결혼한다. 윌리엄 펜은 훗날 신대륙 아메리카에 펜실베이니아를 세우고 첫 주지사가 된다. 한편 남편 아이작이 1679년 세상을 뜨자 메리는 급격히 쇠약해졌고, 1680년경 딸의 집에 머물다 1682년 9월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남편 곁에 나란히 묻혔다.

죽고 나서 한참 뒤에야 그녀가 직접 쓴 자전적 기록이 발견되어 출간되었는데, 평생 "찾아 헤맸으나 얻지 못했다"고 쓸 만큼 치열하게 신념을 갱신해 온 사람이었다.

한국에 던지는 질문

메리 페닝턴의 삶에서 눈에 띄는 건 화려한 무용담이 아니라, 아주 사소해 보이는 반복적 거부들이다. 반지 없는 결혼, 세례거부, 그리고 남편이 여섯 번이나 감옥을 들락거리게 만든 "선서거부"라는 그 조용한 고집. 국가와 교회가 요구하는 형식적 충성서약 하나 하지 않겠다고 버틴 대가로 감옥살이를 감수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뒤에서 살림을 붙잡고 버틴 배우자. 이 조합이 결국 역사를 바꿨다.

2024년 12월 3일 이후 한국사회가 곱씹은 질문도 결국 비슷하다. 상부의 부당한 명령에 "예"라고 서명하지 않은 이들, 계엄문건에 도장을 안 찍겠다고 버틴 실무자들, 위법한 지시를 받고도 이행을 거부한 군인과 경찰들이 있었다. 반면 자리를 지키려 순순히 서명한 이들도 있었다. 페닝턴 부부의 이야기가 시사하는 건 단순하다. 권력이 요구하는 형식적 동의 한 줄을 거부하는 용기, 그리고 그 거부가 몰고 올 대가를 감당할 채비를 하는 현실감각. 이 둘이 같이 있어야 저항이 오래 간다. 신념만 있고 일상생활이 무너지면 저항은 지속되지 못한다. 메리처럼 실존적인 집안 살림을 붙드는 손이 있어야 이상적인 신념도 버틸 수 있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메리 페닝턴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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