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각 위기감 속 스타머와 차별화 카리스마·성공 스토리 부각
'맨체스터리즘' 지방분권·균형발전 설파하는 온건좌파
(런던=연합뉴스) 김지연 특파원 = 영국 집권 노동당 새 대표로서 차기 총리 자리를 확정한 앤디 버넘(56) 하원 의원은 카리스마 있는 이미지와 지방행정 능력을 바탕으로 당내 탄탄한 지지기반을 쌓은 정치인이다.
버넘 대표는 16일(현지시간) 저녁 마감된 당 대표 경선 후보 등록 절차에서 단독 지명돼 17일 새 당 대표로 취임했다. 오는 20일에는 키어 스타머 총리의 뒤를 이어 영국의 제59대 총리로 공식 취임할 예정이다.
버넘 대표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실 입성은 하원의원으로 당선돼 중앙 정치에 복귀한 지 한 달 만에 초고속으로 이뤄졌다.
2024년 7월 총선에서 노동당이 하원 650석 중 412석을 휩쓰는 압승으로 14년 만의 정권 교체를 이뤘을 때만 해도 영국 중앙 정치 1번지인 런던 웨스트민스터에서 앤디 버넘이란 이름은 거의 오르내리지 않았다.
지난 2017년부터 잉글랜드 북부 그레이터 맨체스터 시장으로서 '북부의 왕'이란 별명을 얻을 만큼 지역에선 확고한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중앙 정가에선 그 만한 위상을 갖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제1야당 시절 노동당은 좌파 제러미 코빈 대표 체제에서 '좌향좌 노선'을 걷다가 중도파 스타머가 집권한 뒤 코빈을 당에서 축출하는 과정에서 혼란을 겪었는데, 버넘은 중앙 정치판에서 벗어난 덕에 파벌 다툼에 휘말리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웨스트민스터에서 "술집에 블레어파·브라운파·코빈파가 들어갔더니 바텐더가 '앤디, 뭐 드릴까요?'라고 물었다"는 농담이 떠돌 정도로, 버넘은 당내 여러 진영과 모두 가까웠다. 당내에서 득세하는 진영에 그때그때 합류했다는 비판이기도 하지만, 어느 쪽에서도 배척되지 않고 꾸준히 기반을 쌓아왔다는 뜻도 된다.
그는 리버풀 교외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5세의 나이에 노동당에 가입했다. 케임브리지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인디밴드와 축구 애호가다.
20대 시절 의회 연구관, 의원 보좌관을 지내다가 2001년 31세 나이로 하원에 처음 입성해 17년간 하원의원을 지냈다.
내각 경험도 풍부한 편이다. 토니 블레어·고든 브라운 정부에서 문화부·보건부 장관과 재무부 수석 부장관, 내무부·보건부 차관을 역임했다. 코빈 대표의 제1야당 시절엔 예비내각 보건·교육·내무장관 등을 맡았다.
2010년과 2015년 당 대표 경선에 도전했다가 각각 에드 밀리밴드, 제러미 코빈에게 밀린 그가 정치적 입신에 본격 성공한 건 지방에서다. 2017년 63.4% 득표율로 신설 그레이터 맨체스터 시장에 당선됐고 2021년 67.3%, 2024년 63.4% 득표율로 재선과 3선을 달성했다.
잉글랜드 북부 산업지대와 남부 수도권의 오랜 마찰 속에 보리스 존슨 정부가 본인의 요구에 턱없이 못 미치는 코로나19 팬데믹 봉쇄 보상안을 제안하자 정부에 공개적으로 강하게 맞서 주목받았다.
버넘 시장 재임기에 그레이터 맨체스터는 전국 평균을 훌쩍 넘는 경제 성장률을 보였고, 대중교통 체계 개선과 주택 신축 정책을 야심 차게 추진했다.
스타머 총리가 당내 소통 부족과 간판 정책의 잇단 유턴, 국정 비전 부족으로 역대급 '비호감도'에 허우적 대며 실각 위기에 몰리고 있던 노동당으로선 카리스마와 성공 스토리를 가진 버넘 의원이 가뭄에 단비가 됐다.
버넘 의원을 구원투수로 선택한 노동당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맨체스터 메이커필드 지역구의 노동당 하원의원이 자진 사퇴해 보궐선거판을 만들어줬고, 버넘을 '우익 영국개혁당을 막고, 정부의 변화를 이뤄낼 유일한 주자'로 세웠다.
선거 압승으로 버넘의 가능성을 확인하자 끝까지 버티려던 스타머 총리를 내각 안팎에서 압박해 사임 발표를 끌어냈다. 당 대표 경선에 그간 거론됐던 잠룡들 중 아무도 나서지 않았고, 80% 넘는 당 소속 하원의원들이 버넘을 지지해 경선 가능성을 차단했다.
버넘은 스타머 총리보다는 왼쪽, 코빈 전 대표보다는 오른쪽에 있는 온건좌파로 꼽힌다.
기업 친화적인 정책이 필요하며 주택과 공공 인프라, 교통, 교육 등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는 권한을 지역에 맡겨 각 지역에 맞는 경제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는 '맨체스터리즘'(Manchesterism)을 설파한다.
이를 바탕으로 지방 분권과 지역 균형 발전을 가장 차별화한 정책으로 추진할 것으로 전망된다. 버넘은 맨체스터에 제2 총리실을 세워 각 지역과 경제 정책을 조율하겠다고 공약했다.
버넘 의원은 이날 당 대표 취임 연설에서도 "경제 개혁, 더 많은 공공 통제, 재산업화, 지역사회로 권력 되돌려주기 등 '선명한 노동당'(Distinctively Labour) 비전"을 실현해 나가겠다고 공언했다.
기존 재정 규칙 준수를 약속했고, 근로자 소득세와 국민보험료, 부가가치세를 인상하지 않겠다고 한 2024년 노동당 총선 공약을 지키겠다는 입장이다. 현 내각의 '이민 문턱 높이기' 기조에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 대표 경선에서 선출돼 제1야당인 노동당을 4년간 이끌다가 총리가 됐던 스타머 총리보다도 실제 중앙 정치에서 제대로 검증받은 적은 없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4년간 예비내각을 꾸리면서 준비했던 스타머 총리도 국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던 만큼 '버넘호'의 짧은 준비 기간은 불안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경제 성장 둔화와 빈약한 공공 재정에 따른 경제적 한계, 좌우 포퓰리즘의 득세와 기성 정당 체제의 붕괴란 정치적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많다.
버넘 대표는 네덜란드 태생 마케팅 임원 출신인 부인 마리프란서 판헤일과의 사이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마리프란서 여사는 전임 스타머 총리 부인 빅토리아 여사와 비슷하게 공개석상 등장이 드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cheror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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