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스티아는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언덕 위의 오래된 마을이다. 수천 년의 역사와 오늘의 삶이 하나의 풍경을 만드는 곳이다. 마을 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자연스럽게 잇닿아 있는 아크로폴리스 광장이 나타난다. 고대의 대리석 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거나, 받침을 잃고 쓰러져 있다. 한때 화려했던 건축물의 기초였을 커다랗고 네모진 돌덩어리가 곳곳에 무너져 있다.
세바스티아라는 이름은 로마의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뜻한다. 비잔틴 시대 헤롯왕이 아우구스투스에게 땅을 받아 건설한 도시다. 이 화려했던 시대 전에 이 땅은 '사마리아'였다. 구약에서는 번영과 타락의 도시로 기록되고, 신약에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등장하는 바로 그 사마리아다. 지금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모스크에서 예배를 보고 올리브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마을이다.
그 이름에 어울리게 이 마을에는 여러 시대의 흔적이 쌓여있다. 로마의 원형극장과 신전 터, 사마리아의 건물터, 세례자 요한이 갇혔다고 전해지는 감옥 터가 있다. 또 참수당한 세례자의 시신을 제자들이 안치했다는 지하무덤도 있다. 그 흔적 위에 교회와 성당과 모스크가 차례로 세워졌다. 나비 야히야 모스크, '세례자 요한'을 뜻하는 아랍어다. 로마시대 교회와 십자군 시대 바실리카의 흔적은 지금도 모스크의 벽과 기둥 속에 남아 있다.
서로 다른 양식과 색깔의 석재가 하나의 건축물 안에서 공존하며 이 땅이 품어온 시간을 보여준다. 유적의 시간은 로마와 사마리아를 거슬러 청동기 시대까지 올라간다. 저마다 자기의 시간 속 이야기를 품은 채 한 공간에 겹쳐 있다. 나 같은 짧은 방문객은 금방 수천 년의 시대를 판별하는 걸 잊고 오래된 도시의 아득함에 빠져 신화와 상상을 머릿속에 펼칠 뿐이다.
길은 유적과 자연을 잇고 가른다. 마을 길은 원형극장과 신전 터를 지나 자연스럽게 능선으로 이어진다.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아름답다. 요르단강 서안지구 특유의 낮은 구릉과 계곡이 부드럽게 이어진다. 환한 햇빛을 받은 황톳빛 땅에 올리브나무와 관목의 모둠이 탁한 초록으로 얼룩져 있다. 이 땅 위에, 흰 구름이 만든 그림자가 바람을 따라 천천히 언덕을 건너간다.
사람들도 유적과 자연 위에 자기의 시간을 쌓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대를 이어 올리브 농사를 짓고 기름을 짰다. 흙을 지키기 위해 쌓은 돌 축대와 올리브 나무 사이의 가지런한 쟁기질 흔적은 사람들이 자연 속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삶을 일궈 온 시간을 전해준다.
그동안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임을 열었고, 학생들은 유적지로 수학여행을 했다. 아이들은 지금도 원형극장 계단을 뛰어 오르고, 무대 마당에서 전통 춤 '답케'를 춘다. 폐허가 됐던 성당 위에 세워진 모스크에서는 지금도 예배가 이어진다. 우리가 찾았을 때 예배 시간을 알리는 아잔 소리가 마을 전체에 울리고 있었다. 뜻은 알지 못했지만, 노을 속을 흐르는 그 소리는 해 질 녘까지 밖에서 놀이에 팔려있는 아이를 향한 어머니의 부름처럼 따뜻하게 들렸다.
시간은 돌기둥과 벽돌의 얼룩에만 새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올리브와 선인장 위의 먼지에, 사람들 저마다의 기억과 사는 일상에도 함께 쌓여가고 있었다.
그러나 세바스티아엔 오래된 역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맞은편 언덕에는 이스라엘의 불법 유대인 정착촌이 보였다. 그들은 농부들의 올리브밭 출입을 막고 나무에 불을 질렀다. 이 폭력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채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가자지구 집단학살 이래로 관광객이 끊기며 식당은 문을 닫았고 빈집의 깨진 창문은 방치됐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지 않는다. 자신들이 떠나는 순간 이 땅 역시 빼앗길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오늘도 묵묵히 견디며 유적과 삶을 함께 지켜내고 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세바스티아는 지금 지워질 위기에 놓였다. 이스라엘은 얼마 전 이 땅을 빼앗겠다고 토지수용을 발표했다. 또 유적 관리를 명분으로 새로운 관리 기구를 설치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마을을 국립공원이라는 이름의 불법 유대인 정착촌으로 바꾸려는 계획이다. 곳곳에 도로와 울타리를 만들어 출입을 막고 마을 공동체를 조각내고 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유적지로부터 떼어내고, 결국에는 쫓아내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팔레스타인 땅이다. 점령국 이스라엘이 이렇게 땅을 빼앗고 주민들을 약탈하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고 전쟁범죄다.
이런 식으로 팔레스타인 땅을 강제로 차지한 후 현지 주민들을 온갖 괴롭힘으로 쫓아내고 그 땅을 빼앗는 수법은 그들이 이스라엘을 세울 때부터 지금까지 해온 일이다. 세바스티아에서는 이 수법에 유적지 보호와 발굴이라는 명분을 하나 더 얹었다. 예루살렘 실완 등지에서 이미 하고 있는 짓이기도 하다.
세바스티아의 가치는 돌기둥이나 집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서 삶을 일구는 사람들의 기억과 노동, 예배와 축제, 놀이가 이어지는 동안 새롭게 의미가 부여되면서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살아 있는 유산이 된다. 이것이 유네스코의 정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세바스티아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긴급 등재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면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의 훼손과 약탈을 더욱 면밀히 감시할 수 있게 된다.
이 문화유산의 등재 여부를 결정할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오는 19일부터 부산에서 열린다. 의장국 한국은 중요한 책임을 안고 있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또다시 국익과 동맹을 이유로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인류의 보편적 정의를 외면하는 국익은 있을 수 없다. 이를 외면하면서 일본의 사도 광산 등재 문제에 인류의 양심을 요청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일제가 강탈하려던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역 주민이 지켜냈던 우리의 역사를 자랑할 수 있을까?
세바스티아를 지킨다는 것은 과거를 보존하는 일이 아니다. 지금도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와 기억, 그리고 미래를 함께 지키는 일이다. 그것이 부산에서 열리는 세계유산위원회가 외면해서는 안 될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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