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에 지친 직장인들의 발길이 편의점과 김밥집으로 향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그 김밥이 예전 같은 '서민의 한 끼'가 아니다. 재료가 다양해지고 품질이 상향 평준화되면서 가격대도 크게 벌어졌다. 이제 김밥은 2000원대 가성비 상품부터 6000원을 넘는 프리미엄 메뉴까지, 저마다 다른 '계급'을 갖춘 음식이 됐다.
김밥값, 1년 새 7.4% 뛰었다
한국소비자원 가격정보종합포털 참가격에 따르면 올해 1월 서울 지역 김밥의 평균 가격은 3800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1월(3538원)과 비교하면 1년 만에 7.4% 오른 수치다. 좀 더 긴 흐름으로 보면 상승 폭은 더 가파르다. 2024년 3월 3323원이던 서울 시내 김밥 가격은 올해 3월 3800원까지 뛰어, 2년 만에 14.35% 올랐다. 이는 같은 기간 전체 외식 물가 지수 상승률(25.2%)과 비교하면 낮아 보이지만, 2021년 대비 김밥 물가 지수 상승률(37.8%)만 놓고 보면 오히려 전체 외식 물가보다 더 가파르게 오른 셈이다.

이제 동네 김밥집에서도 야채김밥 한 줄이 4000원을 넘어선 지 오래고, 참치김밥이나 치즈김밥처럼 인기 있는 메뉴는 한 줄에 5000원에서 6000원을 내야 하는 경우도 흔하다. 계란과 시금치 등 주재료 수급이 불안정해지면서 가격 변동 폭이 커진 영향이 크다. 다만 가격만 오른 것은 아니다. 속재료를 가득 채운 프리미엄 김밥이 시장의 주류로 자리 잡으면서 양과 영양 면에서는 예전보다 훨씬 풍성해졌다는 평가도 함께 나온다.
프랜차이즈 김밥집은 오히려 흔들린다
문제는 가격 인상이 매출 증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 프리미엄 김밥의 선두 주자로 한때 가맹점 수 업계 1위였던 '고봉민김밥人' 운영사 케이비엠의 매출은 2022년 365억원에서 2025년 271억원으로 급감했다. 급격한 원가 상승을 버티지 못해 영업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다. 실적 악화는 가맹점 이탈로 이어져, 2022년 541개였던 매장 수도 2년 만에 100개 가까이 줄었다. 가격을 올릴수록 손님이 떠나는 악순환이 골목 김밥집과 프랜차이즈 본사 모두를 옥죄고 있는 셈이다.
편의점 김밥,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다
이런 흐름 속에 반사이익을 보는 곳이 있다. 바로 편의점이다. 프랜차이즈 분식점의 일반 김밥 가격이 4000원 이상인 반면, 편의점 김밥은 2000원에서 3000원대로 1000원 이상 저렴하다. GS25의 김밥 매출은 2023년 37% 성장한 데 이어 지난해에도 21% 늘며 매년 20% 이상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가격만 저렴한 것이 아니라 구성도 다채로워졌다. 세븐일레븐은 냉장 보관 환경에서도 밥의 수분감과 찰기를 유지하는 '라이스 프로젝트' 기술을 적용한 '올 뉴(All New) 김밥' 프로젝트로 김밥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김 표면 참기름 함량도 기존보다 2배 늘려 풍미를 높였고, 대표 상품인 '듬뿍참치김밥'을 시작으로 '스팸땡초김밥', '2800알찬김밥' 등을 순차적으로 리뉴얼했다. CU는 소식좌를 겨냥한 꼬마김밥과 5조각 김밥으로 양을 줄이는 대신 가격 부담을 낮췄다.
가격대도 세분화됐다. 편의점 대표 상품인 삼각김밥은 2026년 기준 개당 1200원에서 1900원 사이에서 판매되며, 2개를 묶은 상품은 2000원에서 2300원, 크기를 키운 대용량 삼각김밥은 1600원에서 1900원 수준이다. 일반 줄김밥의 경우 2900원짜리 기본형 상품부터 재료를 푸짐하게 채운 3000원 중반대 상품까지 폭이 넓어, 그날 지갑 사정에 맞춰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다양해졌다.
셰프와 손잡은 편의점, ‘미식 플랫폼’을 노린다
편의점 업계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유명 셰프와의 협업으로 화제성까지 잡으려 하고 있다. 특히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에 출연한 셰프들과의 콜라보가 잇따르고 있다. 세븐일레븐은 흑백요리사 시즌2에 출연한 후덕죽 셰프와 손잡고 '고추잡채불고기김밥'을 선보였고, 요리 예능에서 화제를 모은 안유성 셰프와 함께 만든 '안유성 명란타마고김밥'도 3500원에 내놨다.
GS25는 흑백요리사 시즌2 우승자 최강록 셰프를 비롯해 '서울엄마' 우정욱 셰프, 최유강 셰프, '중식마녀' 이문정 셰프, '프렌치파파' 타미 리 셰프 등과 협업해 개발한 메뉴를 차례로 선보였다. 이 가운데 '서울엄마 소불고기김밥'은 우정욱 셰프가 운영하는 한식 다이닝 겸 김밥 브랜드 '가지가지김밥' 상품을 벤치마킹해 개발했다. 이마트24도 '중식여신'으로 알려진 박은영 셰프와 손잡고 간편식 5종을 선보였는데, 앞서 조선호텔 손종원 셰프와 낸 간편식 6종이 매출 상위권을 꾸준히 지킨 데 힘입어 라인업을 확대한 것이다. GS25는 한식당 을지로보석을 운영하는 조서형 셰프와도 손잡고 '조서형의 통영식 비빔김밥'을 3400원에 출시했다.
김밥집 순례자 ‘김밥대장’, 전국 맛집을 편의점으로
셰프 콜라보 못지않게 눈에 띄는 것은 '김밥 큐레이터'로 불리는 개인 크리에이터와의 협업이다.

인스타그램 계정 '김밥대장(@gimbapzip)'을 운영하는 정다현씨는 퇴사 후 5년 넘게 전국 750곳이 넘는 김밥집을 찾아다니며 '전국김밥일주' 프로젝트를 이어온 인물이다. 대한민국 김밥 홍보대사이자 전라남도 김 홍보대사로 위촉됐고, SBS '생활의달인'에 '김밥덕후 달인'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가 발굴한 지역 맛집 레시피는 실제 편의점 상품으로도 이어졌다. GS25는 '전국김밥일주' 시리즈를 통해 마포구 김밥 맛집 '롤앤롤'의 매운잡채김밥, '부자영김밥'의 불고기미나리김밥 등을 정다현씨 큐레이션으로 편의점용 상품화했다.
정다현씨는 별도로 자신만의 김밥 브랜드를 목표로 팝업 매장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봄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에서 연 팝업에서는 군포 부자영김밥의 미나리삼겹살김밥, 부산 큰손김밥의 불닭유부팽이김밥, 제주 엉클통김밥의 갈치김밥, 속초 장흥김밥의 명란김밥 등 전국 각지의 이색 김밥을 재현해 선보였는데, 오픈 8분 만에 대기 마감될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올봄에는 서해 활쭈꾸미와 미나리를 조합한 제철 김밥으로 다시 한번 팝업을 열었고, 겨울에는 남해 섬초 시금치 김밥을 주제로 안국역 인근에서 팝업을 진행했다. 다만 이 팝업 김밥은 편의점 상품과 달리 한 줄에 6000원, 어묵 한 꼬치에 1500원 수준으로, 프리미엄 구성에 걸맞은 가격대를 보였다. 그는 그동안 쌓은 아카이브를 엮어 전국 김밥 맛집 안내서 『전국김밥일주』를 출간하기도 했다.
“가격대별로 최대 가성비 찾는 게 특징”
전문가들은 이 같은 변화를 소비자들의 전략적 대응으로 해석한다. 이은희 인하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는 현재의 절약 상황을 '가격대별 선택지의 다양화'로 분석했다. 이 교수는 "과거와 달리 현재는 편의점에서 가격대별로 소비자가 점심을 해결할 만한 식품이 다양하게 나와 있다"며 "소비자들이 스스로 저렴한 가격대 안에서도 최대의 가성비를 내는 상품을 발견해내는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통신사 할인이나 구독 서비스, 오전 시간대 반값에 판매하는 타임 세일 등을 활용해 편의점 김밥을 더 저렴하게 구매하는 요령이 SNS를 통해 활발히 공유되고 있다. 편의점 도시락이나 인근 대학·기업 구내식당 식권을 선호하는 흐름도 함께 확산하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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