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규제에는 비용이 따른다. 중요한 것은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하느냐다. 지금의 대출 규제는 금융시스템의 위험을 줄이는 대신, 자산 형성의 출발선에 선 청년과 신혼부부에게 가장 큰 부담을 지우고 있다는 점에서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정부와 금융당국의 가계부채 관리 기조가 한층 강해지고 있다. 시중은행들은 주택담보대출 한도를 잇달아 축소하고 있으며, 일부 은행은 대출 접수 자체를 제한하고 있다. 카드론 역시 한도가 줄어드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금융당국은 수도권 부동산 과열과 빠르게 늘어난 가계부채를 감안하면 금융시스템 안정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는 입장이다.
정부의 문제의식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우리나라의 가계부채는 경제 규모와 비교해 높은 수준이며, 국제기구 역시 지속적으로 관리 필요성을 제기해 왔다. 과도한 레버리지는 금리 상승기에는 금융회사뿐 아니라 가계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부동산 가격 상승기에 무분별한 대출이 투기를 자극했던 경험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정책은 목표만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같은 정책이라도 그 부담을 누가 떠안는지에 따라 평가는 달라진다. 지금의 대출 규제가 가장 먼저 영향을 미치는 계층은 다주택자보다 오히려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청년과 신혼부부라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현금 자산이 충분한 사람에게 대출 규제는 선택지 하나가 줄어드는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자기자본이 많지 않은 사회초년생에게 대출은 선택지가 아니라 출발선 자체다. 대출이 사라지면 집을 늦게 사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진입할 기회 자체를 잃는다. 규제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만 결과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대부분의 직장인은 월급만 모아 집을 사지 않는다. 부모 세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집을 마련하고, 수십 년 동안 성실하게 원리금을 상환하며 자산을 만들어 왔다. 대출은 위험을 동반했지만 동시에 계층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금융의 순기능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주택담보대출을 단순히 '빚'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은 현실과 다소 거리가 있다. 실거주 목적의 대출은 미래의 근로소득을 현재의 자산으로 연결하는 금융 장치다. 금융학에서도 이를 소비성 차입과 구분한다. 생산적 투자나 자산 형성을 위한 신용은 개인의 경제활동을 촉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문제는 최근의 규제가 이러한 구분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지다. 주택담보대출 한도는 단기간에 절반 수준으로 축소되고, 은행 창구에서는 하루 차이로 대출 가능 여부가 갈리는 사례까지 나타나고 있다. 일부 신혼부부는 잔금일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대출 조건이 바뀌면서 자금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짜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카드론 역시 차주의 신용도 변화와 무관하게 한도가 줄었다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현상은 금융학에서 말하는 '신용할당'(Credit Rationing)과 유사하다. 자금 공급이 인위적으로 제한되면 금융기관은 위험을 줄이기 위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고객부터 선택한다. 이는 개별 차주의 상환 능력과 무관하게 시장 진입 자체가 어려워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결국 가장 먼저 시장에서 밀려나는 사람은 자산이 가장 적은 계층이다. 신용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담보가 부족하고 자산 축적의 시간이 짧다는 이유만으로 금융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정책은 또 다른 역설과 마주한다. 정부는 투기 수요를 억제하기 위해 대출을 조이지만, 실제 시장에서는 현금을 충분히 보유한 계층일수록 규제의 영향을 덜 받는다. 반대로 실거주 목적의 청년층은 대출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규제의 충격을 그대로 떠안는다. 의도는 투기 억제였지만 결과적으로는 현금 보유 여부가 시장 진입을 결정하는 구조가 강화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역시 최근 여러 보고서를 통해 청년층의 자산 격차 확대 원인 가운데 하나로 주택시장 진입 시기의 차이를 지목한 바 있다. 단순히 집값 상승만이 문제가 아니라, 시장에 늦게 진입할수록 자산 축적의 시간이 짧아지고 세대 간 격차가 확대된다는 것이다.
결국 지금의 대출 규제는 단순한 금융정책을 넘어 '시간의 불평등'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만들 수 있다. 집을 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산을 만들 기회를 늦게 갖게 되는 것이다. 그 차이는 10년, 20년 뒤 개인의 자산 규모뿐 아니라 결혼과 출산, 소비와 노후 준비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금 필요한 질문은 '대출을 얼마나 줄일 것인가'가 아니라 '투기적 레버리지는 억제하면서도, 미래를 준비하는 실수요자의 사다리는 어떻게 지킬 것인가'다. 금융정책이 답해야 할 질문은 바로 여기에 있다. 비슷한 고민은 해외에서도 반복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이다. 1980년대 후반 자산 가격이 급등하자 일본 정부는 금융기관의 부동산 대출을 강하게 제한하는 '부동산 융자 총량규제'를 도입했다. 금융시스템의 과열을 막겠다는 취지였다.
당시 정책의 문제는 규제 자체보다 속도와 방식이었다. 대출이 급격히 위축되면서 부동산 시장의 유동성이 빠르게 얼어붙었고, 버블 붕괴와 맞물려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이 급증했다. 이후 일본 경제는 장기간 저성장과 디플레이션을 겪었다. 물론 '잃어버린 30년'을 총량규제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다. 버블 붕괴, 금융권의 부실채권 문제, 통화정책, 인구구조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다만 금융시장의 급격한 신용 수축이 경기 침체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만큼은 일본 사례가 분명하게 보여준다.
현재 은행들은 금융당국의 관리 목표를 맞추기 위해 대출 한도를 줄이고, 모집인을 통한 접수를 중단하며, 심사를 더욱 보수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카드사 역시 카드론 공급을 축소하는 분위기다. 각각의 조치는 합리적인 경영 판단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들이 동시에 이뤄질 경우 금융시장 전체에서는 신용 공급이 예상보다 빠르게 위축되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단순히 금리가 올라 돈을 빌리기 어려워지는 것이 아니라, 돈을 빌릴 수 있는 사람조차 시장에서 배제되는 현상이다. 결국 규제의 비용은 자산 규모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현금을 충분히 보유한 사람에게 대출 규제는 투자 방식을 바꾸는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현금이 부족한 사람에게 대출 규제는 시장에 들어갈 기회 자체를 잃는 문제다. 같은 정책이 누구에게는 불편함으로 끝나지만, 누구에게는 인생 계획 전체를 바꾸는 변수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정부가 고민해야 할 것은 총량보다 정밀성이다. 영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총부채상환비율(DTI)과 스트레스 테스트를 강화하면서도 생애 최초 주택 구입자를 위한 금융지원 제도를 병행했다. 캐나다 역시 대출 심사를 강화하는 한편, 실수요자의 금융 접근성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적 장치를 함께 운용해 왔다. 금융안정과 실수요 보호를 대립하는 개념으로 보기보다 동시에 추구해야 할 정책 목표로 접근한 것이다.
우리 역시 방향은 같아야 한다. 투기성 대출과 실거주 목적의 대출을 같은 잣대로 볼 이유는 없다. 다주택자의 레버리지 확대와 신혼부부의 첫 주택 마련은 경제적 의미도, 사회적 의미도 다르다. 획일적인 총량 규제보다 차주의 상환 능력, 자금의 사용 목적, 주택 보유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하는 정교한 관리 체계가 필요한 이유다.
생애 최초 주택 구입자나 신혼부부에 대한 정책금융 확대, 실거주 목적 대출의 예외 인정, 소득 중심의 심사 체계 고도화 등은 충분히 검토할 수 있는 대안이다. 금융안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실수요자의 기회를 지키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금융정책의 목적은 단순히 대출 잔액을 줄이는 데 있지 않다.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만드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청년층의 주거 안정과 자산 형성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 경제의 문제이기도 하다.
평범한 직장인에게 대출은 사치가 아니라 미래를 앞당기는 약속이었다. 은행에서 빌린 돈으로 집을 마련하고, 수십 년 동안 성실하게 원리금을 갚아 자신의 자산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우리 사회 중산층이 형성된 가장 보편적인 경로였다.
물론 과도한 부채는 경계해야 한다. 금융안정은 국가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책무다. 그러나 금융정책이 지켜야 할 것은 숫자만이 아니다. 그 숫자 뒤에 있는 사람들의 삶과 기회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대출은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청년들의 미래까지 함께 줄여서는 안 된다.
가계부채 총량은 언젠가 다시 조정할 수 있다. 하지만 한 번 놓친 내 집 마련의 기회와 자산 형성의 시간은 되돌리기 어렵다. 정책이 관리해야 할 것은 대출 총량만이 아니라 기회의 총량이다. 금융의 문턱을 높이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그 문 앞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하는 일일 것이다.
박성대 기자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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