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현대인은 매일 수많은 콘텐츠를 스쳐 지나간다. 그중 어떤 장면은 뜻밖에 발길을 붙잡고 짧지만 오래 기억에 남는다. ‘편한숏’은 그 순간에 주목한다. 이야기 속에서 장면이 품은 감정과 맥락을 읽어낸다. 영화, 드라마, OTT 등 서사가 있는 영상 콘텐츠를 바탕으로 화면 속 짧은 순간을 통해 지금 이 시대와 우리가 마주한 질문들을 함께 들여다본다. [편집자주] |
※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미디어는 각자만의 힘을 가진다. 같은 이야기를 담는다 해도 영화는 소설이, 소설은 영화가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영화만의 특기라면 관객이라면 누구나 다음 장면을 예측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것이리라. 단순한 장면을 몇 분씩 이어가면서도 그 시간을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것. 감각으로 관객을 끌고 가는 것. 전날 개봉한 나홍진 감독의 <호프(hope)> 는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그 힘을 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밀어붙이는 작품이다. 호프(hope)>
군인을 비롯한 공권력이 옆 동네 산불을 진화하러 떠난 사이 작은 항구 마을 '호포'에 정체불명의 괴생명체가 나타나 주민들을 죽이고 마을은 쑥대밭이 된다. 80년대 접경지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질감은 오히려 서부극에 가깝다. 볼트액션을 다루는 포수들이 등장하고 말을 타고 침엽수림을 누비며 경찰차로 아무도 없는 로를 질주한다. 외계 침공에 초점을 맞춘 영화에서 느끼기 어려운 로드무비와 서부극을 뒤섞은 분위기다.
이런 장르적 질감은 미장센에서 특히 살아난다. 하루의 오후만을 배경으로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어스름이 내려앉는 시간까지의 빛을 집요하게 활용한다. 해는 길어지고, 괴생명체의 시선을 피해 숨은 주인공이 작은 틈새로 동태를 살필 때 그 얼굴 위 내려앉는 노을이 아름답다. 제작진은 세계에서 2세트 뿐이라는 독일제 빈티지 렌즈를 공수해 촬영했다고 한다. 몸값을 톡톡히 한다.
초반부 연출도 인상적이다. 영화는 쉽게 괴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호포항 출장소장 고범석(황정민 분)의 시점을 따라가며 관객 역시 제법 긴 시간 미지의 괴수를 쫓는다. 엉망이 된 장터와 가게, 허공 높이 떠올랐다 떨어지는 자동차, 부서진 건물과 울부짖는 소리만으로 존재를 상상하게 만든다. 작은 마을을 돌며 추격하는 구조라 자칫 반복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서스펜스가 그 지루함을 압도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여기서부터 드러난다. 관객으로서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씬에서 결말은 예상할 수 있다. 주인공이니까 여기서는 살아남겠구나. 예고편에서는 봤는데 아직 안 나온 장면이 있으니 지금 죽지는 않겠구나. 그렇게 계산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런데 <호프> 는 그 계산을 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뒤에서 괴수가 달려오고 옆에서 말을 탄 채 달리고 있는 포수 고성기(조인성 분)를 경찰차에 태워야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성기는 탑승에 성공할 듯 말 듯 몇 번을 실패하고 괴수는 그런 성기를 잡을 듯 말 듯, 아슬아슬 가까워졌다 멀어진다. 같은 긴장을 반복하는데도 지루하지 않다. 속도감 있는 편집, 사운드가 계속 관객의 감각을 밀어붙인다. 괴수가 엄청난 속도로 달리며 유발하는 진동, 경찰관 성애(정호연 분)가 유탄을 격발할 때의 충격파를 온몸으로 받으며 관객은 몰입하게 된다. 호프>
소설로 쓴다면 두 페이지 남짓 써도 지루할 수 있을 장면이 영화에서는 체감상 5분 넘게 이어진다. 그런데도 시계를 보게 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힘일 것이다.
물론 대본으로 한정해서 보자면 아쉬운 부분도 적지 않다. 특히 현실성 면에서 그러하다. 1980년대 접경 지역이라 해도 작은 어촌 마을 파출소가 보유한 총기가 지나치게 많고 평범한 청년이 초면의 말을 원나라 기마병마냥 자유자재로 다루며 마을 사람들은 외계인의 존재를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호프> 는 그런 의문을 생각할 여유를 애초에 허락하지 않는다. 미술과 액션, 사운드가 한꺼번에 몰아치며 관객의 사고보다 감각을 먼저 점령한다. 영화가 끝난 뒤에는 "말도 안 돼"보다 "어쨌든 재미 있었다"라는 감상이 우선한다. 제작팀의 의도이자 전략일 것이다. 호프>
특히 숲 속 추격 시퀀스는 압권이다. 흑마와 백마를 탄 포수들이 침엽수 사이를 가르며 달리고 불법 취득했을 게 뻔한 화기의 총성이 허공을 찢어놓는다. 외계 생명체를 명중시키자 동료가 "총 졸라 잘 쏘네"라고 말하는 순간마저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서부극 스타일 낭만이 현실성 공백을 메우는 것이다.
그래서 <호프> 는 영화관에서 봐야 하는 영화다. 놀이공원에서 길고 긴 줄을 기다렸다가 롤러코스터를 타고 난 뒤의 기분이 들 것이다. 이야기 하나를 들은 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체험'을 했다고 표현하는 편이 적절하겠다. 호프>
영화는 3분의 2 지점까지 쉼 없이 '떡밥'을 던진다. 어떻게 회수하려고 이렇게 많은 복선을 심었을까, 의구심이 밀려온다. 후반부에 이르면 조금씩 불안해진다. 설마 이대로 끝? 그 예감은 맞아떨어진다. 마지막은 해당작의 결말이라기보다 속편을 위한 거대한 프롤로그에 가깝다. 160분간 동안 쌓아온 긴장이 하나의 작품 안에서 완결되지 못한 점은 분명 호불호가 갈릴 대목이다.
그럼에도 엔딩의 외계인 간 대화는 흥미롭다. '이렇게까지 긴 시간을 할애해야 했을까?' 싶을 만큼 직전까지 잘 쌓아왔던, 이 작품의 백미인 서스펜스적 긴장이 깨지는 아쉬운 순간이긴 하다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외계인 언어가 번역되면서 시점이 뒤집힌다. 그동안 일방적인 침략자로만 보였던 존재에게도 나름의 이유와 사정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선과 악을 뒤집는다기보다 인간의 시선 하나로만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치에 가깝다.
그때 제목이 다시 떠오른다. Hope. 중반까지는 필히 인간의 희망을 말하는 제목처럼 보인다. 죽지 않으려는 호포 사람들의 희망. 심각한 순간에도 놓치지 않는 유머가 내일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상기시킨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면 그 희망은 미등록 체류 외계인에게도 존재함을 영화는 보이고 있다. 그들 역시 미래를 바꾸기를 바라고 어떤 꿈에 몸을 던지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책은 뒷 장부터 읽을 수 있다. OTT와 SNS에서 보는 영상은 언제든 멈추고 빨리 감을 수 있다. 지루하면 다른 콘텐츠로 옮겨 가기도 쉽다. 하지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기로 결심한 관객은 두 시간 넘는 시간을 작품에 온전히 맡긴다. <호프> 는 그 시간을 어떻게 붙들어야 하는지 잘 아는 작품이다. 영화는 다른 미디어가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호프> 는 영화여야만 하는 경험이다. 호프> 호프>
호프(HOPE), 2026
감독 나홍진
촬영 홍경표
미술 이후경
음악 마이클 에이블스
감상 전국 개봉관
*사운드와 편집이 만드는 또 다른 종류의 압박감,
<덩케르크(dunkirk, 2017)>덩케르크(dunkirk,>
*서스펜스·유머·미술 3종 세트를 한번 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inglourious basterds, 2009)>바스터즈:>
※ [편한숏]은 기자 개인의 감상을 담은 코너입니다.
여성경제신문 허아은 기자
ahgentum@seoulmedia.co.kr
*여성경제신문 기사는 기자 혹은 외부 필자가 작성 후 AI를 이용해 교정교열하고 문장을 다듬었음을 밝힙니다. 기사에 포함된 이미지 중 AI로 생성한 이미지는 사진 캡션에 밝혀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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