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한스경제 임준혁 기자 | 미국 정부가 1922년 이후 104년 간 고수해 온 외국 조선소에서의 자국 해군 함정 건조 금지란 ‘터부(taboo)’를 깨고 국내 조선업계에 최대 1600조원 규모의 전투함·급유함(지원함) 건조 가능성을 타진했다.
최근 캐나다 차세대 잠수함 프로젝트(CPSP) 수주전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의 벽을 넘지 못해 독일에 고배를 마신 K-조선이 한미 조선 협력 프로젝트 ‘마스가(MASGA)’와 연계해 미국 함정 건조를 목표로 지금껏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거대 시장에 진입할 첫 단추가 끼워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다만 외국에 배타적인 미국 내 관련 법·정책 개정과 지금까지 해외 방산 수출에 외교적 지원에 머문 우리 정부의 역할도 전략을 근본적으로 다시 짜는 수준의 ’정책적 리빌딩‘ 작업이 선제적으로 보조를 맞춰야 한다는 지적이다.
15일 업계에 따르면 미 국방부와 해군은 최근 HD현대중공업·한화오션·삼성중공업 등 국내 조선3사에 일제히 전투함과 중형급 급유함에 대한 정보요청(RFI·Requests for Information)을 보냈다. RFI는 사업 발주에 앞서 업체들의 기술력과 공급 능력, 참여 의사 등을 파악하려는 일종의 사전 시장 조사다.
▲ 마스가 출범 후 美 당국 첫 건조 역량 공식 확인
지난해 8월 마스가 출범 이후 미국 정부(국방부·해군) 측에서 RFI 등으로 한국 조선소의 함정 건조 역량을 공식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동시에 미 해군이 외국 조선소에 전투함 건조 가능성을 공식 타진한 것 역시 지난 1922년 이후 한 세기만에 현실로 다시 부활했다.
미국 당국으로부터 RFI를 수신한 조선3사는 즉시 대응했다.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은 미 국방부에 전투함 설계·건조 실적과 건조 능력, 인적 역량, 연간 건조 가능 규모 등의 정보를 회신했다. 급유함과 관련해서는 삼성중공업을 포함 3사 모두 미 해군에 관련 자료를 제출한 상태다.
현재로썬 아직 RFI 단계인 만큼 구체적인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단정하기 힘들다는 신중론이 약간 우세하지만 앞으로 미국이 공식적인 입찰 제안요청(RFP·Requests for Proposals) 등을 통해 한국과의 협력을 본격화할 수 있다는 시각에도 점점 힘이 실리고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지난달 개최된 G7 정상회의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재명 대통령에게 직접 '군함 10척의 신속 건조 가능 여부'를 타진한 지 한 달 만에 미 국방 안보 핵심 공급망 재편을 위한 실무 절차가 공식화한 것이란 분석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 104년 만의 외국조선소 전투함 건조 가능성 타진
미국이 지난 1920년 제정한 ’존스법(Jones Act)‘은 자국 연안을 항해하는 선박(군함·상선 포함)은 반드시 미국에서 건조해야 한다는 조항을 담고 있다. 이와 함께 해군 함정의 건조·수리를 해외에 맡기지 못하도록 규정한 '반스-톨레프슨법 수정법'을 적용하며 해외 조선소의 함정 건조를 제도적으로 차단해 왔다.
이러한 가운데 미 당국에서 먼저 국내 조선3사에 RFI를 발송한 미증유의 정책적 대전환은 미 해군의 심각한 건조 능력 저하와 서태평양 지역에서 급속도로 팽창하는 중국의 해군력을 견제하려는 절박한 위기감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해군력 강화를 위해 2024년 말 기준 296척인 함정을 오는 2054년까지 381척으로 늘린다는 목표다. 이에 투입되는 예산은 1조726억달러(약 1600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미국 함정시장 공략에 있어 한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지정학적 접근성 및 중요성의 최대 수헤국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 中 해군력 견제...韓 산업적 해상 제조 기반 차용론
실제 미국이 중국의 해군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방국이자 조선 강국인 한국의 도움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2024년 중국 군사력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해군은 세계 최대 규모의 함정·잠수함 370여척을 보유하고 있다. 2030년에는 435척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미국의 중국 해군 견제는 단순히 함정 척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이 중국과의 장기전을 치를 경우 탄약과 함정 건조 및 유지·보수·정비(MRO) 역량이 치명적으로 부족하다. 보고서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같은 핵심 우방국의 '산업적 해상 제조 기반'을 빌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전문가는 “미국은 단순 지역 동맹의 이해관계를 넘어서 실질적인 대중국 억제력을 즉각 확보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라며 “캐나다 CPSP 수주전에서 드러난 나토식 정치 논리보다는 실제 세계 최고 수준의 건조 능력과 정밀한 공기 관리 역량을 갖춘 한국 조선소를 파트너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환경이 조성됐다”고 말했다.
다만 미 해군 함정의 최종 수주 성사 및 건조 계약 체결을 위해서는 여전히 높은 미국 내 법적 장벽을 넘어서야 한다. 앞서 소개한 ’존스법‘과 ’반스-톨레프슨법 수정법‘의 개정이 우선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 “2027 국방수권법 개정...韓 건조 예산 편성 유도 필요”
전문가들은 미 해군 내부에 깊숙히 스며들어 작용하는 특유의 보수적 기류와 자국 조선 산업 노조의 반발을 무력화하기 위한 측면에서 한국이 정치·외교적 차원에서 선제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미 의회가 '2027 회계연도 국방수권법(NDAA 2027)' 개정을 통해 한국 조선소에 대한 특별 '국가안보 면제 조항(National Security Waiver)'을 공식 승인하고 NSW 승인에 따른 국내 조선소에서 건조될 함정에 대한 예산이 편성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CPSP 수주전에서 한국은 잠수함의 성능·기술적 차별성에서는 독일과 대등하거나 심지어 앞섰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뤘다. 하지만 나토 동맹이란 그들만의 리그에 따라 캐나다는 독일을 선택했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이 캐나다에 제안한 KSS-III급 잠수함의 기술적 탁월함 하나만 강조할 경우 나토 및 미국이 주도하는 거대한 국제정치의 역학 관계를 넘어설 수 없다”며 “이제는 방산 전략의 근본부터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방산 수출 프로젝트 지원과 관련 현재 각 부처별로 파편화된 대응을 지양하고 고도로 정교하고 전문화된 한미 안보·방산 외교를 일관되게 지휘할 '범정부 차원의 통합 컨트롤타워'를 서둘러 조직·운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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