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3일,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KCC그룹 계열사 명단에 낯선 이름 하나가 새로 올랐다. '호두나무'라는 작은 회사다. 사람의 뇌파와 생체신호를 분석해 예술 작품으로 바꿔주는 곳으로, KCC의 원래 사업인 건자재·페인트·실리콘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런데 이 회사 대표는 다름 아닌 정몽진 KCC 회장의 장남 정명선(1994년생) 씨였다. 그동안 회사 경영에 전혀 나서지 않던 오너 3세 장남이 처음 맡은 경영자 자리가, 하필 그룹 본업과 아무 상관 없는 개인 회사였다는 점이 재계의 눈길을 끌고 있다.
사실 호두나무는 원래 형편이 넉넉지 않은 회사였다. 작년 말 기준으로 회사 재산은 700만 원, 현금은 20만 원밖에 없었다. 빚이 재산보다 많은 '자본잠식' 상태였고, 그동안 정몽진 회장 등 가족들에게 돈을 빌려 겨우 버텨온 것으로 확인됐다. 상황이 바뀐 건 올해 1월 23일이다. 정몽진 회장이 5억 원을 혼자 투자해 이 회사 지분 71.43%를 확보하고 최대주주가 됐다. 같은 날 아들 정명선 씨는 이 회사의 이사로 취임했다. 지금도 이 회사는 정명선 씨 혼자 이사를 맡고 있어, 견제할 다른 임원이 없는 구조다. 아버지의 자금 투입 덕분에 지분 요건을 채운 호두나무는 두 달 뒤인 3월 KCC 계열사로 공식 편입됐고, 사무실도 경기도 가평에서 서울 강남 역삼동으로 옮겼다. 지난 7월 10일에는 2억 5,000만 원을 추가로 투자받는 계획도 발표됐다.
시점이 묘하다. KCC 본업 실적은 요즘 좋지 않다. 작년 매출은 6조 4,838억 원, 영업이익은 4,276억 원으로 1년 전보다 각각 2.6%, 9.2% 줄었다. 올해 1분기 영업이익도 881억 원에 그쳐 1년 전보다 14.8% 감소했다. 회사 본업이 흔들리는 이 시기에, 오너 3세 장남이 처음 맡은 경영자 자리가 그룹과 무관한 개인 회사였던 셈이다. KCC 측은 "법적으로 어쩔 수 없이 계열사로 편입됐을 뿐, 본사와 실제 거래는 없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재계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훗날 경영권을 물려받을 때 쓸 자금을 미리 쌓아두는 통로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회사가 계열사로 편입됐다는 소식이 알려진 직후 정명선 씨가 그동안 올렸던 SNS 게시물을 모두 지운 점도 이런 해석에 힘을 보태고 있다.
한편 남매간 경쟁 구도도 함께 주목받는다. 누나인 정재림 KCC 상무(경영전략부문장)는 3조 5,000억 원 규모의 미국 실리콘 회사 '모멘티브' 인수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실력을 입증해왔다. 지난해 숙부인 정몽익 KCC글라스 회장으로부터 남매가 나란히 KCC 본사 주식을 물려받으면서, 두 사람이 보유한 지분율은 현재 1.06%로 정확히 같아졌다. 이후 두 사람 모두 이 주식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려 KCC 주식을 추가로 사들인 것으로 파악된다. 각자의 대출 잔액은 100억 원 안팎까지 불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사촌인 정몽익 회장의 차남 정한선 씨도 최근 3주 사이 KCC글라스 주식을 사들였는데, 매입 대금의 96.5%를 빌린 돈으로 충당했다.
문제는 이렇게 빚을 내서 주식을 사는 방식이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담보로 잡은 주가가 일정 수준 아래로 떨어지면, 은행이 돈을 더 내라고 요구하거나(추가 담보 요구) 심하면 담보로 잡힌 주식을 강제로 팔아버릴 수도 있다(반대매매). 이 경우 그동안 어렵게 늘려온 지분이 한순간에 줄어들 수 있다. 정명선 대표가 서둘러 자신만의 돈줄을 만들려 한 이유도 이런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나온다.
1.06%로 완전히 똑같아진 남매의 지분 경쟁은 이제 "누가 먼저 돈을 더 확보하느냐"의 싸움으로 넘어갔다. 모멘티브 인수라는 확실한 성과로 앞서가는 누나와, 아버지의 지원을 발판 삼아 미래 자금을 모으는 동생. KCC 경영권을 둘러싼 조용한 경쟁은 이미 시작됐다.
[폴리뉴스 박수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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