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인공지능 스타트업 미스트랄AI의 최근 투자 유치에는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이 핵심 투자자로 참여했다. 유럽의 첨단기술 기업에 유럽 자본이 공급된 사례지만, 유럽 금융시장에서는 여전히 예외에 가깝다. 기술이 부족해서도, 투자할 돈이 없어서도 아니다. 회원국별 규제와 금융제도가 자금을 국경 안에 묶어두고 있어 성장 가능성이 큰 기업조차 대규모 자본이 필요해지면 미국 시장을 찾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은 상품과 사람, 서비스와 통화가 자유롭게 이동하는 단일시장을 구축했다. 프랑스에서 생산한 제품은 독일로 넘어가고, 이탈리아 노동자는 네덜란드에서 일한다. 20개 회원국은 같은 유로화를 사용한다. 자본의 이동은 사정이 다르다. 은행 규제와 예금보험, 기업 도산 절차, 연기금 운용 기준이 국가별로 나뉘어 있어 하나의 통화권 안에서도 저축과 투자는 국경에 가로막힌다. 유럽은 상품시장과 통화를 통합했지만, 투자 위험을 함께 부담하는 금융체계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위험은 함께 부담하지 않아
14일(현지시간)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유럽연합(EU)은 단일통화를 사용하면서도 은행 감독 규정과 예금보험, 기업 도산 절차, 연기금 운용 기준, 벤처투자 세제는 회원국별로 달리 운용하고 있다. 유로화는 하나지만 투자 실패와 금융기관 부실에서 발생한 손실을 처리하는 제도는 국가별로 갈라져 있는 셈이다. 유럽은 통화의 국경을 없앴지만 자본과 위험을 함께 나누는 금융체계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IMF는 이 미완성 구조를 유럽의 성장 잠재력을 억누르는 핵심 요인으로 지목했다. 국경 간 은행 영업을 가로막는 규제와 제도적 장벽을 낮추면 EU의 장기 국내총생산(GDP)이 약 2% 증가할 수 있다고 추산했다. 국경 간 벤처캐피털 투자를 제약하는 법률·세제상 마찰을 줄이고 연기금과 보험사의 장기 위험자본 공급을 확대하면 약 1%의 추가 성장 효과가 발생한다. 금융시장 개혁만으로 EU의 장기 GDP를 약 3% 끌어올릴 수 있다는 계산이다.
효과는 금융 부문에 머물지 않는다. 창업과 기술투자, 연구개발, 인력 양성을 촉진하는 기업 역동성 개혁을 금융시장 통합과 함께 추진하면 혁신기업에 공급되는 자본이 늘어나면서 개혁 성과가 약 1%포인트 더 확대될 수 있다. 금융개혁의 직접 효과 약 3%와 혁신개혁을 증폭하는 효과 약 1%를 합하면 금융 통합이 장기 GDP에 미치는 기여도는 약 4%에 이른다. 기업 역동성과 혁신을 높이는 개혁 자체의 효과까지 더하면 전체 증가 폭은 두 자릿수로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 IMF의 분석이다.
이는 정부가 재정을 투입해 단기 수요를 끌어올리는 경기부양 효과와 성격이 다르다. 유럽 내부에 이미 축적된 저축이 회원국 국경을 넘어 생산성과 성장 가능성이 높은 기업으로 흘러가도록 자본의 이동 경로를 바꾸는 데서 나오는 구조적 성장이다. 유럽에 돈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돈이 EU 밖으로 빠져나가기 전에 EU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유럽 진짜 국경, 금융사 장부에 남아 있어
유럽 단일시장에서 상품과 사람의 국경은 낮아졌다. 자본의 국경은 금융회사 장부에 그대로 남아 있다. 독일 은행이 자국 기업에 대출할 때는 감독 규정과 예금보험, 기업 도산 절차를 익숙하게 적용할 수 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기업에 돈을 빌려주려면 현지 규제와 법률, 담보권 행사와 채권 회수 절차를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 회원국별 제도 차이가 국경 간 금융거래에 추가 비용을 부과하는 구조다.
이 비용은 관세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다. 대출금리에 반영되고 투자심사 기간을 늘리며, 더 많은 담보와 높은 위험가중치를 요구하게 만든다. 금융회사는 정보가 부족하고 자금 회수 가능성이 불확실한 외국 기업보다 사정을 잘 아는 자국 기업을 선택한다. 이른바 자본의 자국 편향이다.
IMF는 회원국마다 다른 은행 규제와 금융안전망, 특히 예금보험과 기업 도산제도가 국경 간 은행 대출을 제약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장벽을 낮추면 저축이 국가와 기업 사이에서 더 효율적으로 배분되고, 기업도 더 많은 금융회사를 상대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어 금융비용이 내려간다. IMF는 이 효과만으로도 EU의 장기 국내총생산이 약 2% 증가할 수 있다고 추산했다.
이는 은행 수를 늘려 얻는 성장이 아니다. 기업의 국적에 따라 자금조달 비용이 달라지는 구조를 바로잡아 얻는 성장이다. 독일 기업은 독일 은행에, 스페인 기업은 스페인 금융시장에 의존해야 한다면 EU는 완전한 단일 경제권으로 보기 어렵다. 하나의 통화를 사용하면서도 자본시장은 27개로 나뉜 구조에 가깝다.
유럽 기업의 경쟁 상대는 미국과 중국의 대륙 규모 기업이다. 유럽 기업이 실제로 이용하는 금융시장은 여전히 국가 단위다. 대륙 규모의 경쟁을 국가 규모의 자본으로 치러야 하는 셈이다. 유럽의 기술기업이 초기 연구개발은 역내에서 진행하면서도 본격적인 성장 단계에 들어서면 미국 자본시장을 찾는 구조적 이유다.
▲창업은 유럽에서 하고, 성장은 미국서 한다
신생 기술기업은 은행 대출과 잘 맞지 않는다. 담보로 내놓을 자산이 적고 안정적인 매출도 없다. 실패 위험은 높은 반면 기업가치의 상당 부분은 특허와 소프트웨어, 핵심 인력, 성장 가능성처럼 당장 현금화하기 어려운 무형자산에 놓여 있다. 은행 대출보다 벤처캐피털과 주식금융이 필요한 이유다.
유럽의 벤처자본시장은 회원국별로 잘게 나뉘어 있다. 투자계약과 조세 체계, 상장제도, 연기금 운용 규정이 국가마다 달라 대규모 범유럽 펀드가 조성되기 어렵다. 연기금과 보험회사가 장기간 위험을 감수하며 혁신기업에 투자할 수 있는 자금도 충분히 공급되지 않는다.
자금 수요는 기업이 성장할수록 급격히 커진다. 초기 연구개발에는 수천만유로가 필요하지만 반도체와 인공지능, 바이오, 우주, 방위산업 분야에서 양산시설을 구축하고 세계시장에 진출하려면 수십억유로가 들어간다. 유럽 금융시장은 아이디어를 검증하고 기술을 개발할 초기 자금은 공급한다. 기업을 세계적 규모로 키우는 성장자본은 충분히 대지 못한다.
이 때문에 유럽 기업은 역내에서 기술을 개발한 뒤 본격적인 확장 단계에 들어서면 미국 자본시장을 찾는다. 후속 투자와 기업공개, 인수·합병도 미국 시장에서 추진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유럽이 교육과 연구개발, 초기 투자 비용을 부담하면 미국 금융시장이 성장 단계의 기업을 흡수하는 구조다. 기술은 유럽에서 태어나지만 기업가치는 미국에서 커진다.
IMF는 국경 간 벤처투자를 가로막는 법률·세제상 장벽을 낮추고 연금·보험제도 개혁을 통해 장기 위험자본을 확충하면 EU의 장기 국내총생산이 약 1% 추가로 증가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핵심은 국경을 넘는 절차를 간소화하는 데만 있지 않다. 유럽 전역의 혁신기업에 장기간 투자할 수 있는 위험자본의 절대 규모를 키우는 데 있다. 유럽의 문제는 벤처자본이 국경을 넘지 못한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국경을 넘어설 만큼 크고 오래 버틸 자본 자체가 부족하다는 데 있다.
▲IMF 핵심 숫자, 3%가 아니라 4%다
IMF가 추산한 금융시장 개혁의 직접 효과는 장기 국내총생산(GDP)의 약 3%다. 국경 간 은행 통합에서 약 2%, 벤처자본 공급 확대와 투자 장벽 완화에서 약 1%가 나온다. 이 수치만 보면 금융개혁의 효과는 금융 부문 안에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IMF가 주목한 대목은 금융개혁이 기업 역동성과 혁신을 높이는 다른 개혁의 성과까지 키운다는 데 있다.
기업 설립 절차를 간소화하고 연구개발을 지원하며 기술 인력을 양성하면 성장 가능성이 큰 사업과 기업이 늘어난다. 투자 대상이 많아지는 것이다. 금융시장이 회원국별로 갈라진 상태에서는 이 기업들이 사업화와 시장 확대 단계에서 필요한 자금을 제때 확보하기 어렵다. 기술과 사업성이 있어도 성장자본이 도착하지 않는다.
반대로 금융시장만 통합하고 기업 환경을 개선하지 않으면 늘어난 자본이 투자할 만한 신규 사업을 찾기 어렵다. 성장기업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금 공급만 확대되면 돈은 기존 주식과 부동산, 국채 등 이미 형성된 자산시장으로 몰릴 수 있다. 유럽의 성장 정체는 투자할 기업이 부족한 문제와, 유망한 기업에 자금이 도달하지 않는 문제가 겹친 결과다.
IMF 모형에 따르면 기업 진입과 숙련 인력 형성, 연구개발을 촉진하는 기업 역동성 개혁만 시행해도 EU의 장기 GDP는 약 7% 증가할 수 있다. 여기에 금융시장 장벽을 함께 낮추면 혁신기업이 성장자본을 더 원활하게 확보하면서 개혁 효과가 약 1%포인트 추가된다. 은행·벤처자본 개혁의 직접 효과 약 3%까지 포함하면 전체 장기 GDP 개선 폭은 약 11%에 이른다.
IMF가 이번 직원 토론 노트에서 제시한 약 4%는 금융개혁의 직접 효과만을 뜻하지 않는다. 국경 간 은행 통합에 따른 약 2%, 벤처자본 확대에 따른 약 1%, 금융 통합이 기업 역동성과 혁신 개혁의 효과를 증폭하는 약 1%포인트를 합친 수치다.
금융은 여러 성장산업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혁신기업을 만들고 기술을 상용화하며 산업정책을 실제 성장으로 연결하는 기반시설이다. 금융시장이 통합되지 않으면 유럽의 산업정책은 기업을 만들어도 키우지 못한다. 금융 통합은 다른 모든 개혁이 작동하도록 만드는 성장의 증폭기다.
▲EU, 통화동맹은 만들었지만 위험공유체계는 완성 못해
유럽은 1999년 유로화를 출범시키며 회원국의 통화정책 권한을 유럽중앙은행(ECB)에 맡겼다. 회원국 사이의 환율 변동과 환전 비용이 사라졌고, 단일통화는 역내 교역과 투자를 확대하는 기반이 됐다. 반면 은행 부실과 예금 손실이 발생했을 때 그 책임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에 관한 제도는 끝내 통합하지 못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뒤이은 유럽 재정위기는 이 균열을 드러냈다. 유럽 은행들은 자국 국채를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국가 재정이 흔들리면 국채 가격이 하락해 은행의 건전성이 악화했고, 정부가 은행을 구제하면 공공부채가 늘어 국가 재정이 다시 약해졌다. 국가와 은행이 서로의 부실을 키우는 이른바 ‘주권·은행 간 악순환’이었다.
EU는 위기 이후 유럽중앙은행을 중심으로 한 단일감독체계와 부실은행 정리제도를 구축했다. 은행연합의 마지막 축인 공동예금보험은 완성하지 못했다. 한 회원국 은행에서 발생한 손실을 다른 회원국이 함께 부담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정치적 합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통화는 공동으로 사용했다. 손실은 국가별로 부담했다. IMF가 유럽예금보험제도 도입과 금융안전망 완성을 요구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회원국마다 다른 예금보험과 은행 정리제도, 거시건전성 규제를 조화시키면 은행이 자국 정부와 경제에 과도하게 묶이는 현상을 완화하고, 국경 간 대출과 자본 이동을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통합의 목적은 유럽에 대형 은행 몇 곳을 더 만드는 데 있지 않다. 한 국가에서 발생한 충격이 그 나라 정부와 은행, 기업을 동시에 흔드는 연결고리를 끊는 데 있다. 프랑스의 예금이 독일 제조업에 공급되고, 독일 연기금이 스페인 인공지능 기업에 투자하며, 네덜란드 보험자금이 폴란드 방위산업으로 흘러가면 특정 국가의 경기 침체와 금융 부실 위험은 유럽 전역으로 분산된다.
금융통합은 성장정책인 동시에 위기보험이다. 유럽이 통화동맹을 완성했다면, 이제 남은 과제는 위험을 함께 부담하는 금융동맹을 만드는 일이다.
▲작은 회원국일수록 금융의 국경은 더 높다
금융시장 분절이 모든 회원국에 같은 비용을 부과하는 것은 아니다. 독일과 프랑스처럼 국내 금융시장의 규모가 큰 국가는 자국 안에서도 상당한 자본을 조달할 수 있다. 인구와 금융자산이 적은 회원국의 기업은 사정이 다르다. 기술력과 성장성이 있어도 출발부터 작은 자본시장에 갇힌다.
같은 기술과 생산성을 갖춘 기업이라도 어느 나라에서 창업했느냐에 따라 확보할 수 있는 자금의 규모와 비용이 달라지는 셈이다. EU 단일시장은 상품 판매에는 대륙 규모의 시장을 제공하지만, 기업의 성장을 뒷받침할 금융에는 같은 규모의 경제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IMF 분석에서도 규모가 작은 회원국과 업력이 짧은 기업이 금융통합의 혜택을 상대적으로 더 크게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국 안에서 대출기관과 투자자를 찾기 어려운 기업일수록 국경 간 자금 공급이 확대될 때 선택지가 크게 늘어나고 자금조달 비용도 낮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통합은 자본 배분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유럽 안에서 기업의 성장 가능성이 출생 국가의 금융시장 규모에 좌우되는 구조를 완화하는 지역 균형 정책이기도 하다.
EU가 기술기업에 같은 보조금을 지급하더라도 성장자본에 접근할 기회가 다르면 경쟁 조건은 같아지지 않는다. 지원금은 출발선을 맞출 수 있다. 금융시장이 갈라져 있으면 결승선까지 갈 수 있는 기업은 여전히 국적에 따라 달라진다.
▲기업 도산법은 성장정책이다
유럽 금융통합 논의에서 기업 도산법은 기술산업이나 성장전략과 거리가 먼 법률 문제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자본 이동을 결정하는 핵심 제도다. 금융회사는 대출이 정상적으로 상환됐을 때 받을 이자만 계산하지 않는다. 기업이 실패했을 때 채권을 얼마나, 얼마나 빨리 회수할 수 있는지도 함께 따진다.
회원국마다 도산 절차와 채권 회수 기간, 담보권의 우선순위가 다르면 해외 기업에 대한 대출 위험은 커진다. 금융회사는 법률적 불확실성을 대출금리와 담보 요건에 반영한다. 제도 차이가 곧 위험 프리미엄이 되는 셈이다.
창업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기업 실패가 장기간의 파산 절차와 경영자의 경제활동 제한으로 이어지는 국가에서는 실패 비용이 높아진다. 투자자는 더 높은 수익률을 요구하고, 기업가는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기보다 위험을 피하려 한다. 실패를 정리하는 제도가 경직될수록 창업과 재도전도 위축된다.
IMF는 회원국별 기업 도산제도를 조화하는 한편, 기업이 선택할 수 있는 EU 공통의 이른바 ‘제28 법체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27개 회원국의 기업법을 모두 통합하기 어려운 만큼, 국경을 넘어 영업하려는 기업이 공통으로 적용받을 수 있는 별도의 법적 선택지를 마련하자는 구상이다.
이는 법률 규정을 정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유럽 기업이 회원국마다 다른 27개 법체계를 각각 검토하지 않고 하나의 대륙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사업을 확장하도록 만드는 금융 기반시설이다. 상품 이동에 도로와 통관 체계가 필요하듯, 자본 이동에는 예측 가능한 도산·채권 회수 제도가 필요하다.
▲금융시장 개혁은 유럽의 산업안보 정책이다
기업 도산제도의 조화는 유럽이 추진하는 전략적 자율성과도 연결된다. 유럽은 반도체 생산능력을 확충하고 인공지능 모델을 개발하며, 에너지와 방위산업 공급망을 역내에 구축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기술을 보유하는 것만으로 전략적 자율성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기술을 기업으로 성장시킬 자본을 외부에 의존하면 확장 과정에서 지분과 경영권, 생산 거점까지 외부 자본에 넘어갈 수 있다. 인공지능과 반도체, 우주, 바이오, 청정에너지, 방위산업은 장기간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분야다. 초기 기술개발보다 양산시설과 데이터센터, 임상시험, 해외 판매망을 구축하는 단계에서 더 많은 자금이 들어간다.
유럽 금융시장이 이 성장자본을 공급하지 못하면 기업은 미국 자본시장으로 이동한다. 미국 투자자에게 지분을 넘기고 미국 거래소에 상장하며, 연구소와 본사, 핵심 인력도 자본이 집중된 지역으로 옮길 가능성이 커진다.
유럽이 공공재정과 연구개발 보조금으로 기술을 키운 뒤, 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하는 단계에서 미국 금융시장에 넘겨주는 구조다. 연구개발의 비용은 유럽이 부담하고 기업가치 상승의 과실은 미국 자본시장이 가져간다.
금융시장 개혁을 은행산업 경쟁력 강화 정책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유럽이 반도체와 인공지능, 에너지와 방위산업을 역내에 남겨두고 전략기술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한 산업안보 정책이기도 하다.
공장은 보조금으로 지을 수 있다. 기업 생태계는 지속적으로 위험을 부담하는 성장자본 없이는 유지할 수 없다.
▲유럽에 부족한 것은 자본이 아니라 ‘자본 배분 체계’다
유럽의 금융 문제는 흔히 미국보다 자본시장의 규모가 작다는 비교로 설명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역내에 축적된 자금을 어느 국가의 어떤 기업으로 보낼 것인지 결정하는 체계가 회원국별로 분리돼 있다는 데 있다.
유럽 가계와 기업이 보유한 저축은 은행 예금과 국채, 자국 금융상품에 집중돼 있다. 각국 연기금과 보험회사도 규제와 오랜 운용 관행에 따라 안전자산을 선호한다. 장기간 손실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자금이 인공지능과 반도체, 바이오 등 성장 가능성이 큰 기술기업으로 충분히 이동하지 못하는 구조다.
자본 자체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위험을 공동으로 평가하고 여러 국가와 투자자가 분산해 부담하는 제도가 부족하다. 은행연합과 자본시장 통합의 목적도 시중에 돈을 더 푸는 데 있지 않다. 유럽 전역의 저축을 생산성과 성장 가능성이 높은 기업으로 보내고, 투자 실패에 따른 위험은 대륙 전체에 분산하는 자본 배분 체계를 구축하는 데 있다.
이는 금융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럽의 통치구조와 정치적 책임 분담에 관한 문제다. 어느 국가의 저축을 어느 국가의 기업에 투자할 것인지, 투자에 실패했을 때 발생한 손실을 누가 부담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금융통합이 수십 년째 속도를 내지 못한 이유도 기술적 해법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다. 회원국들은 성장의 이익은 함께 누리기를 바라면서도 다른 나라에서 발생한 금융 손실까지 공동으로 부담하는 데에는 소극적이었다.
단일통화는 환율과 통화정책에 관한 주권을 공유하는 결단이었다. 단일자본시장은 자본 배분의 권한과 실패의 책임을 함께 나누는 결단이다. 유럽에는 후자가 더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다.
▲세 갈래 개혁, 하나의 성장 회로로 연결해야
IMF가 제시한 유럽 금융시장 개혁은 크게 세 축으로 나뉜다. 먼저 은행 규제와 거시건전성 감독, 예금보험과 부실은행 정리제도, 기업 도산 절차를 조화해 은행연합을 완성해야 한다. 연기금과 보험회사가 장기 위험자본을 더 많이 공급하도록 운용 규정을 개선하고, 원천징수와 투자계약, 거래소 접근 등 국경 간 주식·벤처투자에 수반되는 제도적 마찰도 줄여야 한다. 창업과 기술투자, 연구개발과 인력 양성을 촉진해 자본이 투자할 수 있는 혁신기업의 수도 늘려야 한다.
세 가지는 서로 떨어진 정책이 아니다. 하나의 성장 회로를 구성한다. 기업·혁신정책은 투자할 만한 기업과 사업을 만든다. 자본시장 개혁은 이들에게 장기 위험자본을 공급한다. 은행연합과 금융안전망은 특정 국가나 금융회사에 집중된 손실 위험을 유럽 전역으로 분산한다. 어느 한 축이라도 빠지면 회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금융시장만 통합하면 늘어난 자금이 신규 사업보다 기존 주식과 부동산, 국채로 몰릴 수 있다. 혁신기업만 늘리고 성장자본을 공급하지 못하면 유망 기업은 자금을 찾아 미국으로 이동한다. 은행 부문만 통합한 채 주식·벤처시장을 방치하면 담보가 부족한 신생 기술기업은 여전히 자금조달에서 밀려난다.
유럽의 성장전략도 재정지출과 보조금의 규모를 늘리는 방식에서 자본의 이동 경로를 바꾸는 구조개혁으로 옮겨가야 한다. 새로운 기금을 조성하거나 특정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면 당장의 투자와 생산을 유도할 수 있다. 금융시장을 통합하면 유럽 전역의 자금이 대륙 단위에서 기업을 평가하고, 성장 가능성이 높은 사업으로 지속적으로 이동할 수 있다.
보조금은 정부가 지원 대상을 정한다. 통합 금융시장은 자본이 성장기업을 찾아가게 만든다. 유럽이 필요한 것은 지원사업을 하나 더 만드는 일이 아니라, 역내 저축이 혁신기업으로 흘러가는 회로를 완성하는 일이다.
▲유럽은 시장 통합했지만 미래는 통합하지 못했다
유럽은 상품을 27개 회원국에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는 단일시장을 구축했다. 기업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자금은 여전히 국가별 금융시장에서 따로 조달해야 한다. 유로화라는 단일통화도 도입했지만, 은행 부실과 투자 실패에 따른 위험은 회원국이 각자 부담한다. 상품과 통화는 통합했으면서 자본과 손실을 함께 나누는 체계는 완성하지 못한 셈이다.
이 구조가 계속되면 유럽의 저축은 안전자산에 머물 수 있다. 성장 가능성이 큰 혁신기업은 자금을 찾아 미국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커진다. 미국은 하나의 거대한 자본시장에서 실패 위험을 넓게 분산하고, 성공한 기업이 창출한 수익을 대규모로 회수한다. 유럽은 실패 위험을 국가 안에 가둔 채 성공 가능성이 높은 기업을 미국 자본시장으로 보내는 구조다. 연구개발 비용과 초기 실패의 부담은 유럽에 남고, 기업가치 상승의 과실은 대서양을 건넌다.
IMF가 추산한 장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약 3%는 국경 간 은행 영업과 벤처투자를 가로막는 장벽을 완화했을 때 발생하는 직접 효과다. 금융 통합이 기업 역동성과 혁신 개혁의 성과를 끌어올리는 증폭 효과까지 더하면 기여도는 약 4%로 높아진다. 이번 분석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주식시장 통합과 더 광범위한 제도 개혁까지 추진할 경우 성장 효과는 더 커질 수 있다.
유럽의 다음 성장 동력은 새로운 돈을 만들어내는 데 있지 않다. 이미 역내에 축적된 저축이 프랑스와 독일, 스페인과 폴란드의 유망 기업으로 자유롭게 이동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프랑스의 저축이 독일 제조업과 스페인 인공지능 기업, 폴란드 방위산업에 공급되는 구조가 갖춰져야 국가별 자금이 대륙 차원의 전략자본으로 전환된다. 유럽에는 돈이 부족하지 않다. 돈이 국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루이스 브란다오-마르케스 IMF 유럽국 선진국팀 부팀장은 “은행 규제와 예금보험, 기업 도산제도의 차이를 줄여 국경 간 은행 통합을 진전시키고 장기 위험자본 공급과 벤처투자를 확대하면 EU의 장기 GDP를 약 3% 높일 수 있다”며 “금융개혁은 기업 역동성과 혁신을 높이는 개혁의 효과까지 증폭시키는 만큼, 유럽의 저축이 성장 가능성이 큰 기업에 공급되도록 금융시장과 실물경제 개혁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고 했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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