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0일, 여의도 국회도서관 대강당에 범상치 않은 손님이 왔다. 밑줄이 빼곡한 책 한 권을 들고 나온 도올 김용옥(1948~ ) 선생이다. 스스로를 "일반인 중 최초의 완독자"라 소개한 그는, 13년 만에 세상에 나온 <반헌법행위자열전> 1-4권 1차분을 들고 강단에 섰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노학자, 이날 제대로 무너졌다. "현대사를 다 안다고 자부했던 도올마저도 내가 얼마나 무식한 놈이었는가! 절절히 깨달았다"는 게 본인 육성이다. 아는 게 많기로 유명한 사람이 공개석상에서 자기 무식을 고백하는 장면, 흔히 볼 수 있는 구경거리는 아니다.
이 책 <반헌법행위열전> 1-4권은 지난 2015년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가 닻을 올린 뒤, 국가폭력을 휘두르고도 단 한 번 처벌받지 않은 자들을 추적해 온 작업이다. 정부 돈은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시민들이 다달이 보내준 5천 원, 만 원이 전부였다. 코로나 시절엔 그 후원마저 반 토막 났다는데, 그래도 연구진은 매주 월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모여 555번 회의를 했고, 원고 한 편을 일고여덟 번씩 고쳐 썼다. 50대에 시작한 연구자들이 이제는 평균 60대 후반, 벌써 노인정 나이가 됐다. 이쯤 되면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 아니라 역사와 함께 늙어가는 일이라 불러야 할 판이다.
"인간 빼고 역사는 성립하지 않는다"
도올은 이날 사마천(기원전 145?~기원전 86?)을 불러냈다.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황제의 기록인 '본기'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굳이 '열전'을 따로 두어 인간 개개인의 전기를 새긴 이유를 짚었다. 역사란 결국 인간이 만드는 것이고, 인간이야말로 역사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칭찬하는 역사, 이른바 '포(褒)'의 역사보다 잘못을 야단치는 '폄(貶)'의 역사가 훨씬 쓰기 어렵다고 짚었다. 하기야 누군가를 칭찬하는 글은 손이 술술 나가지만, 누군가의 죄를 조목조목 적어 후세에 남기는 일은 쓰는 사람도 각오가 필요한 법이다. 자칫하면 명예훼손 소장이 날아오니까.
도올은 이 폄의 역사가 중국에도, 일본에도, 베트남에도 없는 한국만의 발명품이라고 추켜세웠다. 국가가 만들지 못한 공소장을 시민이 5천 원씩 갹출해서 만들어낸 나라, 그것이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얘기다. 세계 어디에서도 못 봤다는 이 발명품, 특허라도 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다.
대통령 다섯의 민낯, 판검사들의 가면극
이날 서평회에서는 전문가들이 마이크를 이어받아 칼을 갈았다. 정해구 전 성공회대 교수는 이행기 정의의 관점에서 이 책이 지닌 무게를 짚으며, 한국의 과거사청산 입법 30여 개 가운데 가해자 처벌을 명문화한 법은 5·18 특별법 하나뿐이었다고 꼬집었다. 책에 실린 이승만(1875~1965)의 가부장적 반공독재, 박정희(1917~1979)의 개발독재, 최규하(1919~2006)의 소심한 기회주의, 전두환(1931~2021)의 패거리 정치, 노태우(1932~2021)의 재보수화까지, 대통령 다섯 명의 민낯이 나란히 걸렸다. 박근혜 탄핵과 윤석열의 2024년 12·3 내란 및 파면으로 이어지는 오늘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 책은 뒤늦게 날아온 예방주사인 셈이다. 예방주사가 이렇게 늦게 오면 병은 이미 한 차례 앓고 난 뒤라는 게 함정이지만.
김형태 변호사는 법원 편을 맡아 국회프락치 사건, 조봉암(1899~1959) 진보당 사건, 인혁당 사건을 훑으며 "판사들이 저항했다"는 신화부터 깨부쉈다. 김인회 교수는 검찰 편에서 이 책을 "피와 눈물의 기록이자 고문가해자들의 거짓말을 밝혀내는 공소장"이라 불렀다. 판사도 검사도 다 자기가 정의의 편이었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책 속 사료들은 그런 자기변호를 순순히 들어주지 않는다.
인공지능까지 넘보는 도올의 야심
도올은 강연말미에 흥미로운 제안을 던졌다. 이 책의 방대한 사료와 사관을 챗GPT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기본자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한국현대사를 논할 때 이 책의 관점을 바탕으로 답하도록 전국적인 디지털화를 추진하자는 이야기다. 사람 손으로 13년 걸려 쓴 책을 이제 기계가 학습하게 만들자니,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도 어느새 시대를 따라가는 모양이다. 다만 그 기계가 제대로 배우려면 우선 사람부터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것, 이날 도올이 몸소 보여준 교훈이다.
오후엔 자리를 옮겨 마석 모란공원으로 향했다. 박종철(1965~1987), 문익환(1918~1994), 김근태(1947~2011), 최종길(1931~1973) 열사의 묘소 앞에서 책을 바치는 헌정식이 열렸다. 가해자의 이름을 하나하나 새긴 이 책을, 가해자들이 겨눴던 사람들의 무덤 앞에 놓는 장면이었다. 편찬위는 "용서를 구하지 않은 가해자들을 역사의 법정에 세우는 공소장"이라 불렀다.
책은 나왔지만 일은 끝나지 않았다. 예비명단에 오른 3천여 명이 아직 남아 있고, 내년 상반기에는 보안사와 정보기관, 경찰을 다루는 2차분 5-8권이 나온다. 역사의 법정은 폐정할 생각이 없다. 가해자들은 현실의 법정에서 도망쳤을지 몰라도, 역사의 법정에는 시효가 없다는 사실을 이번에도 확인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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