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기둥과 바닥은 고치되 가족의 추억이 밴 유리창과 복도는 그대로 남긴다. 아이들을 위해 만든 놀이터 같은 집은 자녀들이 성장한 뒤 부부의 새로운 공간으로 변했다. EBS1 ‘건축탐구 집’이 세월이 흘러도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 두 가족의 집을 찾아간다.
14일 방송되는 EBS1 ‘건축탐구 집’에서는 ‘집에도 유통기한이 있나요?’ 편이 전파를 탄다. 방송은 경기 포천에서 31년째 한자리를 지킨 목조주택과 경기 광주에서 16년 동안 가족의 성장을 품어온 건축가의 집을 소개한다.
오래된 집은 시간이 지나면 낡고 불편해진다. 단열 성능은 떨어지고 나무 기둥과 바닥은 썩기도 한다. 그러나 집에 쌓인 가족의 기억까지 함께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두 가족은 집을 허무는 대신 오래된 흔적을 남기고 현재의 생활에 맞게 다시 고치는 방법을 선택했다.
단열보다 추억을 택한 31년 된 집

첫 번째 집은 경기 포천시 광릉숲 국립수목원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개발 규제가 완화되면서 주변의 옛 풍경이 빠르게 사라지는 가운데 31년 전 모습을 간직한 채 마을의 터줏대감처럼 남아 있는 집이다.
집을 지을 당시 남편 정태 씨는 37세, 아내 현옥 씨는 33세였다. 부부는 다른 문제에서는 의견이 엇갈릴 때도 있었지만 자녀 교육에 대해서는 생각이 같았다. 아이들을 자연 속에서 키우겠다는 뜻을 모아 서울의 아파트를 처분하고 포천으로 이주했다.
당시 집 주변은 온통 논이었고 밤이면 가로등 하나 찾기 어려웠다. 부부는 제대로 된 주택도 드물었던 동네에 첫 번째 집을 세웠다. 도시의 편리함을 내려놓은 대신 아이들이 흙과 나무, 계절을 가까이에서 느끼며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선택했다.
집은 김포공항 팔각정을 지은 장인들을 수소문해 중목구조 한옥으로 지었다. 굵은 나무 기둥과 보를 사용한 전통 구조에 붉은 진흙을 구워 만든 오지기와를 얹었다. 한옥의 골격을 갖추면서도 외관에서는 유럽의 오래된 주택과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건물은 채와 채가 이어지는 ‘ㄷ’자 구조다. 중심에는 대청마루처럼 넓은 거실이 자리한다. 최대 30명까지 들어갈 수 있는 이 거실에는 명절마다 온 가족이 모였고 때로는 동네 친구들과 작은 음악회도 열렸다.
넓은 거실은 가족의 생활 공간이자 마을 사람들과 시간을 나누는 장소였다. 아이들은 집 안팎을 뛰어다니며 성장했고, 부부는 사람들을 불러 함께 음식을 먹고 음악을 들었다. 집은 단순히 잠을 자는 공간을 넘어 가족과 이웃의 시간을 연결하는 무대가 됐다.
하지만 30년이 넘는 세월 앞에서 목조주택도 낡기 시작했다. 나무 기둥과 바닥 곳곳이 썩고 주방과 화장실은 현재의 생활 방식에 맞지 않게 됐다. 이 집에서 노후를 보내려는 부모를 위해 건축을 전공한 둘째 딸 여빈 씨가 리모델링에 나섰다.
여빈 씨는 건축사 친구들과 함께 집의 불편한 부분을 고치면서도 가족의 기억이 담긴 흔적은 최대한 남기기로 했다. 주방은 벽체를 걷어내고 기둥만 남겨 답답함을 줄였다. 오래된 화장실도 현대식으로 바꿔 부모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낡은 대청마루는 새 마룻장으로 교체했다. 그러나 방과 공간을 연결하는 복도는 원래 모습을 그대로 보존했다. 가족이 수없이 오갔던 바닥과 벽에 남은 세월의 흔적 자체가 집의 정체성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외풍에 취약한 홑문 유리창도 교체하지 않았다. 단열만 생각하면 이중창으로 바꾸는 것이 효율적이지만, 오래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풍경을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부부와 자녀들은 편리함보다 집의 원래 모습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
안방에는 60년이 넘은 자개농이 놓여 있다. 천장에는 말린 꽃잎과 나뭇잎을 붙여 만든 닥지가 남아 있다. 오래된 가구와 장식은 최신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을 수 있지만 가족에게는 다른 물건으로 대신할 수 없는 기억이다.
이 집은 가족에게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다. 아이들이 자란 시간과 부모의 젊은 날, 명절과 음악회, 수많은 방문객의 기억이 층층이 쌓인 가족 박물관이다. 리모델링의 목적도 집을 새것처럼 만드는 데 있지 않았다. 앞으로 살아갈 시간을 위해 필요한 부분을 고치되 과거의 흔적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했다.
현재 오스트리아에 사는 첫째 윤지 씨는 휴가 때마다 포천 친정집을 찾는다. 한국에 돌아오면 어린 시절과 같은 모습의 집이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함을 느낀다. 다섯 살 딸과 자신이 자란 공간을 함께 걸으며 세대를 넘어 추억을 나눈다.
이 집에서 성장한 삼 남매는 부모에게 집을 절대로 팔지 말라고 당부했다. 오래됐다는 이유로 철거하거나 새로운 집으로 바꾸기보다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는 공간으로 남겨 달라는 뜻이다.
31년이 흘렀지만 집의 가치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가족의 시간이 쌓이면서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의미가 더해졌다. 방송은 앞으로 30년, 60년 뒤에도 이 집이 가족의 보금자리로 남을 수 있을지 살펴본다.
아이들의 놀이터에서 부부의 비밀 기지로

두 번째 집은 경기 광주시 퇴촌면의 한 마을에 자리한다. 대안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언덕진 마을 초입에는 비상하는 용을 닮은 웅장한 집 한 채가 16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집을 설계한 사람은 건축가 원기 씨다. 경북 안동에서 성장한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서울 강남으로 유학을 왔다. 결혼 뒤에는 강남과 분당 인근에서 생활했지만 부부는 자녀들만큼은 경쟁적인 도시 환경이 아닌 자유로운 공간에서 키우고 싶었다.
가족은 결국 경기 광주로 이주했다. 건축가이자 아버지로서 처음 짓는 집이었던 만큼 원기 씨는 자신의 건축 철학과 아이들을 위한 상상을 집 곳곳에 담았다.
마을 입구에서도 눈에 띄는 외관에는 고밀도 목재 패널과 푸른 외장재 등 독특한 재료가 사용됐다. 용의 비늘처럼 보이는 외벽 디자인은 뜻밖에도 지렁이에서 출발했다.
원기 씨는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지렁이를 대지를 살리는 숨은 조력자로 바라봤다.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아도 주변 환경과 사람을 이롭게 하는 건축을 만들겠다는 철학을 집에 반영한 것이다.
집 앞 돌담은 아이들의 등하굣길 동선과 눈높이에 맞춰 낮고 둥글게 쌓았다. 단순히 경계를 나누는 담장이 아니라 아이들이 손으로 만지고 걸음을 늦추며 즐길 수 있는 구조물로 만들었다.
실내는 높은 층고와 순환식 동선으로 설계됐다.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한 뒤 다시 처음 자리로 돌아올 수 있어 아이들이 술래잡기와 잡기 놀이를 즐기기에 알맞았다.
한때 이 집은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잡기 놀이 맛집’으로 통했다. 재미있는 집을 만들겠다는 건축가 아빠의 목표가 실제 생활 속에서 이뤄진 셈이다.
주방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길에는 높낮이 차이를 뒀다. 평평하게 이어지는 일반적인 주택과 달리 계단과 단차를 활용해 걷는 과정에서도 공간의 변화를 느끼도록 했다.
거실에는 남한강 주변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창을 냈다. 시간과 계절,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바깥 풍경이 집 안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창은 단순히 빛과 바람을 들이는 장치가 아니라 자연의 변화를 생활 속으로 끌어오는 역할을 한다.
삼 남매가 생활하는 2층은 각자의 사생활과 개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함께 뛰어놀 수 있는 개방적인 공간과 각자 혼자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적절히 나눴다.
아내를 위한 특별한 공간도 숨어 있다. 안방에 마련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땅속에 3분의 1가량 파묻힌 지하방이 나타난다.
명상과 독서를 즐기는 아내를 위해 원기 씨가 만든 전용 아지트다. 낮은 위치에 낸 쪽창으로 햇살이 들어오고 마당의 꽃과 나무가 눈앞에 펼쳐진다. 외부와 적당히 분리돼 있지만 자연과는 연결된 공간이다.

이 집의 또 다른 특징은 거실과 오두막을 연결하는 구름다리다. 가족은 이를 오작교라고 부른다. 다리를 건너면 한때 삼 남매의 놀이터였던 작은 오두막이 나타난다.
합판으로 단순하게 지은 오두막이지만 내부는 작은 재즈 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어린 자녀들이 놀던 공간은 아이들이 성장한 뒤 부부가 함께 음악을 듣고 시간을 보내는 비밀 기지로 바뀌었다.
같은 집이라도 가족의 생애 주기에 따라 쓰임은 달라진다. 아이들을 위해 만든 놀이 공간이 자녀들이 독립한 뒤에는 부부를 위한 휴식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원기 씨는 마당 한쪽에 주택의 공공성을 실험하는 공간도 만들었다. 필로티 구조로 띄운 거실 아래의 외부 공간으로, 가족은 이곳을 ‘올챙이 쉼터’라고 부른다.
올챙이 쉼터는 담을 쌓아 가족만 사용하는 사적 공간이 아니라 동네 아이와 이웃 누구나 쉬어갈 수 있도록 열어뒀다. 비를 피하거나 잠시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자연스럽게 마을 사랑방 역할을 한다.
아침이면 학교로 향하는 아이들이 쉼터 주변을 지나며 웃음소리를 낸다. 자녀들이 모두 성장한 뒤에도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가 집 안까지 들려오면서 집은 계속 생명력을 유지한다.
이 집에서 성장한 첫째는 싱어송라이터가 됐고 둘째는 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부모가 만든 자유롭고 창의적인 공간이 자녀들의 감각과 진로에도 영향을 줬다.
16년이 흐르는 동안 집은 낡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족의 변화에 맞춰 새로운 역할을 얻었다. 아이들의 행복 공장이었던 집은 이제 부부의 생활과 이웃의 일상을 품는 공간으로 두 번째 시간을 시작했다.
‘건축탐구 집’은 두 가족의 사례를 통해 집의 수명이 무엇으로 결정되는지 묻는다. 건축 자재가 낡았다고 해서 집의 가치까지 끝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의 추억을 보존하고 현재의 생활에 맞게 공간을 바꾼다면 오래된 집도 계속 살아갈 수 있다.
포천의 집은 단열과 편리함 일부를 포기하면서까지 가족의 원형을 지켰다. 광주의 집은 아이들을 위해 만든 공간을 부부와 이웃을 위한 장소로 바꾸며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EBS1 ‘건축탐구 집’ ‘집에도 유통기한이 있나요?’ 편은 7월 14일 오후 9시 55분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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