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백연식 기자] 인공지능(AI) 시대의 반도체 산업이 ‘기술 경쟁’을 넘어 ‘자금 경쟁’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첨단 메모리,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첨단 패키징, 연구개발(R&D), 그리고 생산시설 확충까지 이어지는 투자 규모는 수천조원에 달한다. 이제 시장을 지배할 핵심 동력은 단순히 기술 격차가 아니라, 얼마나 안정적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느냐로 옮겨가고 있다. 이 거대한 전환기 속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뚜렷하게 다른 해법을 택하고 있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전통적으로 보유 현금을 중심으로 한 안정적 투자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막대한 현금성 자산을 기반으로 반도체 공장 증설, 첨단 공정 투자, 차세대 메모리 개발 등을 자체 자금으로 소화하는 방식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2분기 연결 기준 매출 171조원, 영업이익 89조 4000억원을 거뒀다고 잠적 실적을 발표했다. 영업이익은 한 분기 만에 지난해 1년 동안 벌어들인 영업이익(43조 6011억원)의 2배 수준이다.
필요할 경우 회사채 발행 등 외부 조달도 가능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재무 안정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전략이다. 이 같은 구조는 금리 상승기에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투자 집행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한계도 분명하다. 대규모 투자가 장기간 이어질 경우 현금 소진 속도가 빨라질 수 있고, 투자 타이밍에서 보다 공격적인 경쟁사에 밀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SK하이닉스는 보다 적극적인 자금 조달 전략을 택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나스닥 시장에서의 미국예탁증권(ADR) 상장이다. 이를 통해 약 280억달러(한화 약 40조원) 규모의 자금을 확보하며 투자 여력을 늘렸다. SK하이닉스는 국내에서 신주를 발행해 이를 기초자산으로 ADR을 발행하는 방식으로 최대 1779만 주를 신규 발행한다. 확보한 자금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1기 팹(31조원)과 청주 P&T7 어드밴스드 패키징 공장(19조원),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확보(약 12조원) 등 AI 메모리 생산능력 확대에 투입될 예정이다.
여기에 계열사 재편, 비핵심 자산 매각, 그룹 차원의 리밸런싱 등을 병행하며 유동성을 확보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전략은 단기간에 대규모 투자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강점이 있다. 특히 AI 반도체 경쟁처럼 ‘속도’가 중요한 시장에서는 유리한 선택지로 평가된다. 다만 외부 자금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이자 부담 증가, 재무 구조 악화 가능성, 시장 변동성 영향 확대 등의 리스크도 함께 커진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AI 시대 들어 투자 규모가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졌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첨단 메모리와 패키징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수십조 원 단위의 설비투자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국내 자본시장만으로는 장기 투자 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SK하이닉스 역시 증권신고서에서 미국을 AI 산업과 주요 고객사, 글로벌 투자자가 집중된 시장으로 규정했다. 자금 조달을 넘어 AI 생태계 중심에서 투자자와 고객 접점을 넓히고 향후 글로벌 자본시장을 지속적으로 활용할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문제는 투자 규모가 커질수록 자금 조달 방식 자체가 또 다른 리스크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차입 확대는 금리 부담으로 이어지고, 유상증자는 기존 주주의 지분 희석 우려를 낳는다. 보유 자산 매각 역시 단기적으로는 현금을 확보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성장 기반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결국 단순히 자금을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아니라, 투자 효율성과 재무 안정성을 어떻게 균형 있게 가져가느냐가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삼성전자의 ‘안정형’과 SK하이닉스의 ‘공격형’ 전략은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시장이 빠르게 성장할 경우 공격적 투자가 유리하지만 경기 변동성이 커질 경우 안정적 재무 구조가 유리할 수 있기때문이다.
정부도 세제 지원과 정책금융, 전력·용수 등 반도체 클러스터 기반시설 구축을 통해 기업들의 투자 부담을 낮춘다는 방침이다. 이 같은 지원은 기업들의 직접적인 자금 부담을 덜고 투자 속도를 높이는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관건은 AI 반도체 시장 성장 속도와 투자 회수 시점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산업은 이제 기술뿐 아니라 자금력까지 포함한 종합 경쟁으로 바뀌었다”며 “앞으로는 ‘누가 더 잘 만드느냐’보다 ‘누가 더 오래 버티고 투자하느냐’가 승패를 가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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