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문화체육관광부 집계 기준 2025년 K-콘텐츠 수출액은 149억 달러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이제 K-콘텐츠와 K-컬처는 언어와 국경을 넘어 지구촌 곳곳에서 실시간으로 향유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오늘날 일본의 사케는 정밀한 양조 과학과 우아한 풍미를 앞세워 세계 최고급 다이닝 시장을 누비고 있다. 투명하고 정갈한 맛으로 글로벌 미식가들의 찬사를 받는 사케지만, 그 화려한 명성의 이면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한반도, 특히 '백제'라는 거대한 문화적 뿌리와 맞닿게 된다. 일본 주조 기술의 패러다임이 바뀐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백제 도래인들의 선진적인 발효 기술이 존재했다.
사케의 역사에서 백제의 흔적을 찾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에는 오진(應神) 천황 시절 백제에서 건너와 술 빚는 법을 안다고 기록된 인물이 등장한다. '인번'(仁番), 또 다른 이름으로 '수수허리'(須須許理)라 적힌 이 인물은 국내에는 흔히 '수수보리'로 알려져 있다. 이 이름을 특정 개인의 고유명사라기보다 '술을 거르는 사람'을 뜻하는 고대 한국어의 흔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기록에 따르면 수수보리는 천황에게 이전까지 일본에 없었던 방식의 훌륭한 술을 빚어 바쳤다. 천황은 그 맛과 취기에 몹시 기뻐하며 "수수허리가 빚은 신성한 술에 나는 취했네. 마음을 달래주고 웃음을 주는 술에 나는 취했네"라고 노래했고, 흥에 겨워 지팡이로 길가의 큰 돌을 치며 걸어갔다는 일화까지 고사기에 남아 있다. 바다 건너온 이방인의 발효 기술이 당시 일본 지배층에게 얼마나 큰 미각적 충격이었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수수보리는 오늘날까지도 일본 양조업계에서 '주신'(酒神)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 상징적인 존재다.
◇ 누룩이 일으킨 기술 혁명, 그리고 하타씨
수수보리의 등장이 일본 주류사에 그토록 큰 충격을 준 이유는 단순한 '맛'의 차이를 넘어선 '기술'의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백제의 선진 양조법이 전해지기 전까지 일본 고대의 술 빚기는 쌀을 씹어서 뱉어내는 '구치카미자케'(口噛み酒), 이른바 미인주(美人酒) 방식에 머물러 있었다. 사람의 침 속 효소를 이용하는 원시적이고 수동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도래인들은 곡물에 곰팡이를 번식시킨 '누룩'(麴)을 들고 일본 열도로 건너갔다. 대량의 곡물을 단기간에 당화시키고 안정적으로 알코올을 끌어내는 누룩 기술은 일본의 원시 양조를 단숨에 체계적인 발효 기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이 거대한 변화의 중심에 있던 이들이 바로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 계열의 '하타'(秦)씨 일족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 하타씨의 시조 궁월군(弓月君)이 백제에서 많은 무리를 이끌고 건너왔다고 전한다.
하타씨는 술 빚는 기술만 전한 것이 아니다. 뛰어난 토목 기술로 저수지를 파고 제방을 쌓아 열도에 대규모 관개 농업을 정착시켰다. 질 좋은 쌀이 안정적으로 생산되는 기반이 마련된 뒤에야 비로소 우수한 누룩과 명주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 교토에 있는 양조 신앙의 중심지 '마쓰노오타이샤'(松尾大社)의 창건에 깊이 관여하고 주조업을 관장했던 이들이 하타씨 일족이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일본 양조장이 매년 이 신사의 맑은 우물물을 길어다 술을 빚으며 기원을 올리니, 일본 최고의 주신을 모시는 공간조차 그 뿌리는 한반도와 단단히 연결된 셈이다.
◇ 대전 신탄진에서 부활한 이름, '하타'
이처럼 묵직한 역사의 진실을 담아 오늘날 우리 땅에서 빚어지는 상징적인 술이 있다. 대전 신탄진주조의 프리미엄 맑은술 '하타'다.
예부터 신탄진(新灘津)은 금강 변의 새로운 나루터로서 맑은 물과 풍요로운 물산, 사람이 끊임없이 모여들던 교통과 문화의 요지였다. 신탄진주조는 이러한 지리적 유산을 바탕으로 도래인 하타씨 일족의 발효 정신을 현대적 설비와 지역 식재료로 되살려냈다. 대전 대덕구 일대에서 나는 질 좋은 쌀과 맑은 물을 고집하며 지역 농업과의 상생까지 도모한다. 일본 사케의 뿌리가 결국 한반도 도래인의 발효 기술에 있다는 자부심을 역으로 선언하며 당당히 그 이름을 내건 술이다.
하타를 잔에 따르면 사케를 연상시키는 맑고 투명한 빛깔이 돋보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 고유의 뚝심이 배어 있다. 쌀과 전통 누룩을 정교하게 발효시켜 맑게 걸러낸 이 술은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과실 향과 함께 입안을 부드럽게 감도는 깔끔한 목 넘김을 선사한다. 최고급 사케의 정갈함과 비슷하면서도 우리 술 특유의 깊은 감칠맛과 은은한 산미를 놓치지 않았다.
신탄진주조는 하타뿐 아니라 다채로운 명주를 빚으며 전통주 르네상스를 묵묵히 이끌고 있다. 생각이 단정하고 바르며 배운 지혜를 정겨이 나눈다는 뜻을 품은 약주 '단상지교'(丹想之交)는 전통 누룩이 빚어내는 은은한 단맛과 산미가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대전 대덕 지역의 정체성을 담아낸 '대덕주' 역시 쌀 고유의 풍성한 감칠맛과 부드러운 바디감으로 지역 술의 뼈대를 든든하게 받치고 있다.
글로벌 명주로 자리 잡은 일본 사케의 잔 속에 1천500여 년 전 대한해협을 건너간 우리 선조들의 발효 기술이 녹아 있듯, 신탄진주조가 빚어내는 한 잔의 술에는 그 잊힌 영광을 되찾고 우리 술의 저변을 넓히겠다는 양조가들의 결기가 담겨 있다.
사케 형성 과정에 한반도의 양조 기술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K-리큐르 르네상스'가 나아갈 강력한 역사적 근거다. 찬란했던 백제의 누룩이 열도의 술을 일깨웠듯, 단단한 뼈대를 갖춘 우리 술이 다시 한번 전 세계의 미각을 매혹할 시간이다.
신종근 전통주 칼럼니스트
▲ 전시기획자 ▲ 저서 '우리술! 어디까지 마셔봤니?' ▲ '미술과 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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