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이 펄펄…'물·그늘·휴식' 생활화해야
(서울=연합뉴스) 김종우 선임기자 = 트란 안 훙 감독의 1993년 장편 데뷔작 <그린 파파야 향기>는 베트남 특유의 습기가 스크린 전체를 압도한다. 빗물이 마당을 적시고, 파파야즙이 손끝에 흐르고, 인물들의 살갗은 젖어 있다. 시작부터 관객들의 목덜미를 축축하게 한다. 하지만 이제 동남아의 습기가 낯설지 않다. 한반도에도 여름이면 아열대성 기후가 나타나고 있어서다. 밖에 나가는 순간 햇볕만 강렬한 게 아니라 공기 자체가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예전엔 '무더위'라고 했지만, 요즘은 '한증막'이라 부른다. 표현이 변했다는 건 감각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올여름 폭염은 기상청 예상을 앞질렀다. 기상청은 지난달 폭염특보 체계를 18년 만에 손보며 '폭염중대경보'라는 최상위 단계를 신설했다. 당시 기상청은 폭염중대경보가 10년에 한 번 정도 발령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런데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2일 경북 경산과 포항에 첫 경보가 발령됐다. 최고기온이 40도에 육박했다. "10년에 한 번 올 줄 알았던 경보가 한 달 만에 울렸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티베트고기압과 북태평양고기압이 두 겹으로 하늘을 덮고, 그 아래로 뜨겁고 습한 남풍까지 파고들었다. 이른바 '이중 열돔' 현상이다. 하늘은 맑았지만 땅 위는 거대한 찜통으로 변했다.
이 같은 현상은 한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유럽은 이른바 '오메가(Ω) 열돔'에 갇혀 에펠탑을 비롯한 명소들이 운영 시간을 줄였고, 온열질환 사망자도 잇따르고 있다. 미국은 이달 들어 1950년대 이후 가장 심각한 이상고온을 겪으며 국토의 3분의 2가량에 폭염경보가 내려졌다. 기후변화는 미래의 경고가 아닌 발등의 불이다. 폭염은 더 이상 계절이 아니라 생활의 조건이 됐다. 사람들은 휴가지보다 냉방시설을 먼저 따져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폭염은 국적을 묻지 않는다. 여권도 국경도 따지지 않는다.
폭염은 태풍이나 홍수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지난 11일 하루에만 온열질환으로 응급실을 찾은 환자는 99명, 전날보다 다섯 배 가까이 늘었다. 올해 누적 환자는 636명, 추정 사망자는 2명이다. 65세 이상이 28%, 발생 장소의 86% 이상이 논밭과 건설 현장 같은 야외였다고 한다. 통상 오후가 위험하다고 여기지만, 오전 6시부터 10시 사이에도 환자가 집중됐다. 폭염은 한낮만 피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폭염중대경보는 '중단하고, 이동하고, 확인하라'는 지침이다. '지금 하는 일을 멈추라'는 경고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상대를 알고 자신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라고 했다. 폭염과의 전쟁도 마찬가지다. 기후는 바꿀 수 없지만 피해는 줄일 수 있다. 작업장은 '물·그늘·휴식'을 권고가 아니라 규칙으로 정해 엄수하도록 해야 한다. 냉방 없는 쪽방과 홀로 사는 어르신도 누군가는 한 번 더 살펴야 한다. 물과 그늘, 휴식은 여름 내내 일상 습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지구는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이제 우리도 폭염과 싸우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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