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문화체육관광부 집계 기준 2025년 K-콘텐츠 수출액은 149억 달러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이제 K-콘텐츠와 K-컬처는 언어와 국경을 넘어 지구촌 곳곳에서 실시간으로 향유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초여름 들녘을 걷다 보면 하얀 유액을 품은 작은 풀들이 눈에 들어온다. 줄기를 꺾으면 흰 진액이 흐르고, 입에 넣으면 얼굴이 절로 찡그려질 만큼 쓴맛이 강하다. 바로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먹어 온 씀바귀다. 사람들은 흔히 단맛을 좋아하고 쓴맛은 피하려 한다. 그러나 양생(養生)은 오히려 때로는 쓴맛을 먹어야 몸이 바로 선다고 강조한다.
◇ 쓴맛도 엿처럼 달게
'시경'(詩經)에는 '씀바귀의 쓴맛도 엿처럼 달게 느껴진다'는 구절이 있다. 고통을 이겨낸 사람에게는 쓴맛조차 달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씀바귀는 흔한 나물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삶을 견디며 얻은 철학을 담고 있는 식물이다.
음력 5, 6월은 천지의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시기다. 만물은 빠르게 자라고 사람 역시 활동량이 많아진다. 한의학의 고전 '황제내경'(黃帝內經)은 여름을 만물이 무성하게 피어나는 번수(蕃秀)의 계절로 보고, 이때는 기운을 안으로 가두지 말고 밖으로 발산해야 한다고 일렀다. 땀을 많이 흘리고 체력이 소모되면서 몸 안의 진액이 부족해지기 쉽다. 두통, 갈증, 가슴 답답함, 입마름, 불면 등이 나타나는 이유다.
이때 선조들은 쓴맛이 나는 나물을 즐겨 먹었다. 씀바귀, 고들빼기, 민들레, 상추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식물은 공통으로 열을 내리고 독을 풀어주며 몸의 균형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여겼다. 한의학에서 쓴맛(苦味)은 오행상 화(火)에 속하고 심장으로 들어가, 위로 뜬 열을 아래로 내리는 성질을 가진 것으로 본다.
◇ 고채(苦菜)의 지혜와 현대 영양학
양생학에서 씀바귀는 고채(苦菜)라 부른다. 성질은 차고 맛은 쓰며 심장·비장·위장·대장에 작용한다. 주요 효능은 청열해독(淸熱解毒)과 양혈지혈(凉血止血)이다. 쉽게 말하면 몸속 과도한 열을 식혀주고 염증을 가라앉히며 혈액을 맑게 하는 역할을 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본초서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은 고채를 오장을 편안하게 하고 기운을 북돋우며 오래 먹으면 늙음을 견디게 하는 상품(上品) 약재로 올려놓았다. 이는 약효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인체의 균형을 회복시키는 약선(藥膳)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현대 영양학 역시 씀바귀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씀바귀에는 베타카로틴, 비타민C, 칼륨, 칼슘, 철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특히 베타카로틴은 체내에서 비타민A로 전환되어 면역력을 높이고 피부와 점막을 보호한다. 비타민C는 활성산소를 제거하여 세포 손상을 줄여 준다.
씀바귀 특유의 쓴맛에는 이눌린(inulin)을 비롯한 다양한 성분이 관여한다. 이눌린은 소화되지 않고 대장까지 내려가 유익균의 먹이가 되는 대표적 프리바이오틱스로, 장 건강에 도움을 주는 성분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씀바귀가 속한 국화과 식물에 흔한 세스퀴테르펜 락톤(Sesquiterpene lactone, 국화과 식물에 있는 천연 화합로 강력한 항염, 항균, 항암 작용을 함) 등 쓴맛 성분과 폴리페놀류는 항산화·항염 작용을 통해 세포 노화를 늦추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최근 건강 분야에서 주목하는 '저속노화' 역시 씀바귀와 무관하지 않다. 노화는 단순히 나이가 드는 것이 아니라 만성 염증과 산화 스트레스가 축적되는 과정이라는 것이 오늘날 노화 연구의 시각이다. 씀바귀에 풍부한 항산화 성분들은 이러한 과정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예부터 오래 먹으면 몸이 가벼워지고 늙지 않는다고 표현한 것도 오늘날의 저속노화 개념과 통하는 대목이다.
◇ 쓴맛에 담긴 수행의 철학
흥미로운 점은 우리 민족이 쓴맛을 오미 중 하나만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교에서는 쓴맛을 인내와 절제의 상징으로 보았다. 불교에서는 번뇌를 씻어내는 수행의 맛이라 하였다. 도교에서는 욕심을 줄이고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게 만드는 맛으로 이해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다섯 가지 맛은 사람의 입맛을 상하게 한다(五味令人口爽)"고 했다. 지나친 단맛과 자극적인 맛에 길들면 본래의 감각을 잃는다는 뜻이다. 씀바귀의 쓴맛은 잃어버린 미각을 깨우고 과도한 욕망을 절제하게 만든다. 그래서 쓴맛은 몸과 마음을 함께 다스리는 수행의 음식 맛이다.
씀바귀는 활용법도 다양하다. 어린잎은 살짝 데쳐 초고추장에 무치면 씀바귀무침이 된다. 된장으로 무치면 구수한 향이 더해진다. 김치로 담그면 특유의 쌉쌀함이 깊은 풍미를 만든다. 된장국이나 냉채로도 좋다. 최근에는 차와 효소로 만들어 사계절 즐기기도 한다.
다만 성질이 차므로 평소 비위가 약하거나 몸이 냉한 사람은 과다 섭취를 피하는 것이 좋다. 일부 전통 의서에는 벌꿀과의 동시 섭취를 권하지 않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현대적으로 명확히 규명된 내용은 아니므로 참고 사항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 손자병법으로 읽는 씀바귀
이러한 씀바귀는 손자병법 허실(虛實)의 지혜와도 닮았다. '손자병법' 허실 편은 강한 곳을 피하고 빈 곳을 공략하는 것을 승부의 원리로 삼는다. 전쟁은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허(虛)와 실(實)을 읽는 데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초여름 들판에서 사람들은 화려한 꽃과 달콤한 과일에는 관심을 보이지만, 씀바귀는 대개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쓰고 거칠고 투박하기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허(虛)한 풀 한 포기지만 그 안에는 강인한 생명력이라는 실(實)이 들어 있다. 손자가 "물은 높은 곳을 피하고 낮은 곳으로 흐른다(水之形 避高而趨下)"고 했듯, 씀바귀 역시 척박한 논둑과 밭둑, 돌 틈에서도 자란다. 비옥한 땅만 찾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식물이 자라기 어려운 곳에서 더욱 강하게 살아남는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다. 병은 늘 허한 곳으로 침입한다. 기운이 부족한 곳에 염증이 생기고, 진액이 부족한 곳에 열이 일어난다. 손자가 말한 허실은 전쟁터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체의 생명현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씀바귀의 쓴맛이 그렇다. 입안에 익숙한 단맛의 안락함을 깨운다. 나른한 몸을 일으키고 무뎌진 입맛을 되살린다. 그래서 예로부터 봄과 초여름에 씀바귀를 먹었다. 쓴맛은 불편하지만 몸은 그 불편함 속에서 깨어난다.
씀바귀무침은 그래서 그저 반찬으로만 볼 게 아니다. 끓는 물에 데치고 찬물에 담가 쓴맛을 적당히 빼낸 뒤 초고추장에 버무린다. 이 과정은 마치 사람의 수양과도 같다. 날것 그대로는 너무 강하고 거칠지만, 시간을 거치고 물을 만나고 기다림을 지나면 비로소 조화로운 맛이 된다. 씀바귀김치도 소금물에 오래 삭히고 씻고 버무리는 과정을 거치며 처음의 강한 쓴맛이 줄고 깊은 풍미가 살아난다.
손자가 "지극히 형체가 없는 데 이르면 보이지 않는다(至於無形)"고 했듯, 씀바귀차와 효소 역시 뜨거운 물과 긴 숙성 속에서 쓴맛과 단맛이 조화를 이룬다. 허와 실이 서로를 완성하고, 음과 양이 서로를 살린다. 쓴맛만 있으면 오래 먹지 못하고 단맛만 있으면 몸을 해치니, 둘이 함께할 때 비로소 중용(中庸)의 맛이 된다.
이처럼 씀바귀는 무엇을 더하는 음식이 아니다. 몸속의 열을 비우고, 독을 비우고, 욕심을 비우고, 번뇌를 비우게 한다. 비워야 새로운 것이 들어온다. 그래서 우리는 초여름이 되면 씀바귀를 찾는다.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이롭고, 순간은 불편하지만 오래도록 건강을 남기는 맛이다. 쓴맛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연이 가르치는 건강의 깊은 의미를 만나게 된다.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hisunn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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