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북중미 월드컵이 한국 축구에 남긴 것은 참담한 성적표와 텅 빈 감독석이다. 사상 처음으로 48개국 체제로 열리며 역대 가장 넓은 본선 문이 열렸음에도,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멕시코와 남아공을 상대로 득점 없이 2패를 떠안으며 전체 34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32강 토너먼트 무대조차 밟지 못한 채 짐을 쌌다. 결과에 책임을 지고 홍명보 감독이 사퇴하면서 대표팀 지휘봉은 현재 공석 상태다. 국내 축구계에서는 이번 참패를 단순한 한 경기, 한 대회의 실패가 아니라 전술적 색채의 부재와 대표팀 운영 시스템의 실종이 겹쳐 만든 총체적 붕괴로 진단하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파울루 벤투 감독. / 뉴스1
'누가 감독될 상인가?!' 기사 내용 토대로 AI툴 활용해 제작한 자료사진.
이런 가운데 축구팬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차기 대표팀 감독 후보 A안~D안'을 정리한 이른바 '후보 요약 프로필'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팬이 문건은 현재 한국 축구의 문제점과 각 감독의 전술 성향을 엮어 만든 일종의 가상 시나리오이자 여론의 집약본이다. 그러나 무너진 대표팀의 정체성을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인가에 대한 대중의 고민이 정교하게 반영돼 있다는 점에서, 이 리스트가 담고 있는 논리 구조를 하나씩 뜯어볼 가치는 충분하다.
1순위 만치니, '우승 DNA' 이식 카드…걸림돌은 돈이다
팬들이 최우선 검토 대상, 즉 A안으로 올려놓은 인물은 로베르토 만치니다. 유로 2020에서 이탈리아를 정상에 올려놓은 그는 현대적인 4-3-3 포메이션과 유연한 하프스페이스 활용, 페널티박스 부근에서의 정교한 세부 전술 설계에 강점을 가진 감독으로 평가된다.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이 드러낸 가장 큰 약점이 바로 단조로운 공격 패턴과 박스 근처에서의 마무리 설계 부재였다는 점을 떠올리면, 팬들이 왜 만치니를 순위에 올렸는지 이해가 간다. 상대 수비가 내려앉았을 때 어디로, 어떻게 공간을 만들어 들어갈지에 대한 '설계도'를 그릴 수 있는 감독이다.
또 하나의 포인트는 코칭스태프다. 만치니는 자신이 직접 꾸린 독립적인 코치진을 데리고 움직이는 유형이다. 감독 개인이 아니라 '사단' 전체가 들어와 훈련 프로세스와 규율, 이기는 습관을 통째로 이식하는 구조다. 협회 안팎의 외풍으로부터 선수단을 차단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로베르토 만치니 감독. / 연합뉴스
문제는 현실적 장벽이다. 사우디아라비아 대표팀 시절 세계 최고 수준의 연봉을 받았던 만치니를, 월드컵 실패로 예산 압박이 커진 협회가 감당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따라붙는다. 아시아 무대 경험이 사우디 시절뿐이라 한국 축구의 특수성과 유스 시스템까지 깊이 이해하고 장기 프로젝트를 끌고 갈지도 미지수다. 팬들 사이에서도 계약 중도 이탈, 이른바 '먹튀' 가능성이 리스크로 지적된다.
2순위가 벤투라는 사실이 말해주는 것
이번 리스트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파울루 벤투가 '복귀 카드'로 2순위에 올라 있다는 점이다. 벤투 감독은 '가장 확실한 안정제'로 재소환되고 있다.
배경은 명확하다. 한국은 벤투가 4년에 걸쳐 구축했던 후방 빌드업 기반의 주도하는 축구, 이른바 포지셔널 플레이 체제를 그의 이임 이후 사실상 잃어버렸고, 이번 본선에서 그 공백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진단이다. 상대 압박을 후방에서 풀어내는 약속된 패턴, 공을 소유한 상태에서 경기를 지배하는 구조가 사라지자 대표팀은 공격도 수비도 아닌 어중간한 팀이 됐다는 것이 팬들의 냉정한 평가다.
벤투 복귀론의 실질적 근거는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그는 한국 선수들의 장단점을 이미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 둘째, 손흥민·김민재·황인범 등 대표팀 핵심 자원과의 신뢰 관계가 여전히 두텁다. 셋째, 벤투 사단 특유의 체계적인 데이터 분석과 훈련 프로세스는 붕괴한 시스템을 가장 빠르게 복구할 수 있는 수단이다. 새 감독이 팀을 파악하는 데 통상 1년 안팎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음 아시안컵과 월드컵 예선 일정이 촘촘한 상황에서 '적응 기간 제로'라는 장점은 결코 작지 않다.
다만 리스크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일부 여론 피로감이 재점화될 수 있고, 한 번 떠났던 감독의 전술은 상대에게 이미 읽혀 있다는 전술적 타성 우려도 존재한다.
가레스 사우스게이트 감독. /Orange Pictures-shutterstock.com
3순위 사우스게이트, 무너진 멘탈을 세울 '관리형 감독'
C안으로 분류된 가레스 사우스게이트는 앞선 두 후보와 결이 다르다. 잉글랜드 대표팀을 장기간 이끌며 월드컵 4강과 유로 준우승 2회를 만들어낸 그는 화려한 전술가라기보다 국가대표 전문 관리자에 가깝다. 미디어의 압박으로부터 선수단을 보호하는 능력, 스타 선수들을 하나의 팀으로 묶어내는 매니지먼트 역량이 그의 최대 무기다. 월드컵 참패로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진 지금의 대표팀에 필요한 것이 전술 이전에 심리적 복구라고 보는 팬들이 그를 지지하는 이유다.
전술적으로는 단단한 중저 블록을 세운 뒤 빠른 역습으로 전환하는 축구를 선호한다. 이번 대회에서 노출된 수비 불안을 제어하는 데는 분명한 강점이다. 반면 잉글랜드 시절 호화 멤버를 두고도 지나치게 보수적인 운영으로 비판받았던 이력은 부담이다. 주도하는 축구를 원하는 한국 팬들의 눈높이와 충돌할 수 있고, 아시아 축구와 한국 문화에 대한 경험이 전무하다는 점도 적응 기간을 길게 만들 변수다.
로베르토 마르티네스 감독. / Maciej Rogowski Photo-shutterstock.com
4순위 마르티네스와 비엘사, 판을 뒤엎는 승부수
마지막 D안은 조건부 시나리오다. 먼저 로베르토 마르티네스는 벨기에 황금세대를 이끌며 역동적인 변형 3백과 공격적인 포지셔닝 축구를 구사했던 감독이다. 풀백과 윙어의 유기적인 위치 교환으로 공격 파괴력을 극대화하는 스타일은 이강인, 배준호 등 창의적인 2선 자원을 보유한 한국과 궁합이 맞는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현재 포르투갈 대표팀을 맡고 있어 거취 문제가 먼저 정리돼야 접근 자체가 가능한, 말 그대로 '조건부' 카드다.
마르셀로 비엘사는 이 리스트에서 가장 극단적인 선택지다. 강도 높은 전방 압박 축구의 원류로 불리는 그가 온다면 한국 축구의 체질은 뿌리부터 바뀐다. 끊임없는 압박과 맨마킹을 요구하는 그의 축구는, 이번 월드컵에서 활동량과 기동력 저하로 무기력하게 밀렸던 대표팀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주입할 수 있다. 그러나 선수들의 체력 소모가 극심해 번아웃 위험이 크고, 협회 수뇌부와 타협하지 않는 독단적 성격 탓에 충돌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하이 리스크-하이 리턴 카드로 분류된다.
마르셀로 비엘사 감독. / martin SC photo-shutterstock.com
만치니→벤투→사우스게이트→D안, 실제로 한국 축구에 미칠 영향은?!
팬들이 정리한 접촉 순서는 나름의 정교한 타협안이다. 1단계에서 세계 최정상급 전술가 만치니를 타진해 대표팀의 격을 끌어올리고, 예산 등의 문제로 무산되면 2단계에서 시스템 복구가 가장 빠른 검증된 카드 벤투로 선회한다. 이마저 어긋나면 3단계에서 기강과 멘탈을 다잡을 관리형 지도자 사우스게이트를 대안으로 삼고, 모든 협상이 실패할 경우 4단계에서 마르티네스의 공격 축구 혹은 비엘사의 극한 압박이라는 전술적 모험으로 판 자체를 뒤엎겠다는 구조다.
축구팬들이 가장 궁금해할 대목은 결국 '실제 선임은 언제, 어떻게 이뤄지느냐'다. 통상 월드컵 직후 감독 선임은 협회 산하 기술 관련 위원회가 후보군을 추리고 협상을 진행하는 절차를 거치며, 차기 A매치 기간과 아시안컵·월드컵 예선 일정이 협상의 시한 역할을 한다. 과거 사례를 보면 후보군 압축부터 최종 계약까지 수개월이 걸리는 경우가 많았고, 그 사이 임시 감독 체제가 가동되기도 했다. 이번에도 새 사령탑이 첫 소집에서 팀을 파악할 시간을 확보하려면 선임 작업의 속도가 관건이 될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는 방향성이다. 이번 34위 참패는 선수 개인의 이름값이나 투지만으로는 더 이상 아시아 무대조차 압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팬들이 만든 이 가상의 리스트가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도 같다. 확실한 전술 철학과 전문 코칭스태프를 갖춘 사단형 감독만이 무너진 한국 축구를 다시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협회가 실제로 어떤 이름을 협상 테이블에 올리든, 이 기준에서 벗어난 선임은 또 한 번의 실패를 예약하는 일이라는 경고가 리스트 곳곳에 깔려 있다.
일그러진 대한축구협회 엠블럼. /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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