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소니언 역사학자 사하 박사…"자유·민주주의는 완성 아닌 끝없는 추구"
"한쪽 이야기만 전하고 싶지 않아"…트럼프 '역사 논란' 속 전시원칙 강조
(워싱턴=연합뉴스) 이유미 특파원 = 사상 최대 규모 불꽃놀이로 절정을 이룬 미국의 건국 250주년 기념행사의 열기가 잦아드는 가운데, 워싱턴DC 중심부 스미소니언 재단에서는 지난 250년을 되짚는 특별전이 여전히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워싱턴DC를 중심으로 박물관 21개와 교육·연구 센터 14개, 국립동물원을 운영하는 스미소니언 재단은 건국 250주년을 맞아 주요 박물관에서 특별전시를 진행 중이다.
그중에서도 재단을 대표하는 건물인 스미소니언 캐슬은 진행 중이던 개보수 공사를 잠시 중단하고 대중에 다시 문을 열어 미국 역사의 상징적인 순간들을 담은 소장품 30점을 선별해 공개했다.
'미국의 열망'(American Asipirations)을 주제로 '자유를 추구하며', '새로운 지평을 추구하며', '공정성을 추구하며', '민주주의를 추구하며', '희망을 추구하며', '자유 수호를 추구하며', '진보를 추구하며'라는 7가지 키워드 아래 미국이 추구해온 가치와 이상을 보여주는 대표 소장품들을 오는 26일까지 선보인다.
스미소니언 재단 산하 국립미국사박물관(NMAH) 소속 역사학자이자 큐레이터로서 이번 전시를 공동 기획한 아비르 사하 박사를 지난 10일(현지시간) 스미소니언 캐슬에서 만났다.
사하 박사는 가장 주목할 전시품으로 독립선언문과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독립선언문 초안을 작성한 책상을 꼽았다.
독립선언문 바로 아래 놓인 제퍼슨 전 대통령의 책상은 뚜껑을 열면 필기판이 되고, 내부에는 종이와 펜, 잉크병을 보관할 수 있는 서랍이 갖춰져 있다.
탁월한 문필가로도 알려진 제퍼슨 전 대통령은 노트북보다 약간 큰 정도의 이 작은 책상 위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됐으며, 창조주로부터 생명과 자유, 행복의 추구라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내용을 담은 독립선언문 초안을 작성했다.
이 문구는 이후 미국이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확장해 나가는 역사의 출발점이 됐다.
사하 박사는 "독립선언문은 미국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문서 중 하나"라며 "30점의 전시물들은 각계각층의 미국인이 어떻게 독립선언문에 표현된 이상들을 현실로 만들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왔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전시회를 찾는 방문객들이 1776년 독립선언문 작성 당시 사용된 이 작고 소박한 책상을 볼 때 미국의 건국 순간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책상은 제퍼슨 전 대통령이 직접 디자인한 것으로, 대통령 재임 중에도 늘 곁에 두고 사용했다고 사하 박사는 설명했다.
이번 전시의 키워드를 단순히 '자유'와 '민주주의' 등으로 제시하지 않고, 각 키워드에 '추구하며'(In Pursuit of)라는 표현을 붙인 이유를 물었다.
사하 박사는 "'추구한다'는 표현은 우리가 국가로서, 시민으로서 이런 이상과 목표를 어떤 식으로든 달성하거나 완성하지 못했다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러한 이상은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추구해야 할 대상"이라며 "우리가 아직 (미국이 꿈꿔온) '약속의 땅'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그곳을 향한 희망을 여전히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 지혜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모든 세대가 자유와 민주주의 같은 건국의 이상들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정의하지만, 우리는 그 이상들을 향해 나아가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사하 박사는 이러한 미국의 이상은 "단순히 미국이나 미국인만의 것이 아니다"라며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며, 보편적인 특성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독립선언문의 자유와 평등의 가치는 이후 민주주의의 핵심 이념으로 자리 잡았고, 세계 각국의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 혁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전시품 중에는 권력을 평화롭게 이양하며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고별 연설'을 작성할 때 곁에 두었던 촛대도 있다.
미국의 혁신과 산업 발전을 상징하는 토머스 에디슨의 백열전구, 이민자들에게 희망의 상징이었던 자유의 여신상을 본뜬 모형, 여성 최초로 대서양 단독 횡단 비행에 성공하며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 정신을 상징하는 어밀리아 에어하트의 비행복도 전시돼 있다.
또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를 촉발한 금 조각과 원주민 부족의 권리를 보장한 캐넌다이가 조약(Canandaigua Treaty)이 나란히 전시돼 있다. 새로운 기회와 번영을 향한 미국의 열망이 원주민의 삶과 충돌했던 역사까지 함께 조명하며, 미국 역사의 성취와 한계를 함께 보여주려는 전시 구성이다.
사하 박사는 "한쪽 이야기만 전하고 다른 쪽은 생략하고 싶지 않았다"며 "역사의 모든 측면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고, 민주주의를 더 굳건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스미소니언 재단은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역사 서술 바로잡기' 논란의 한복판에 서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미국의 성취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반미적 이념이 스미소니언 재단에 스며들었다며 역사 전시 방식을 바로잡으라고 지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그 결과물로 백악관 국내정책위원회는 최근 '미국 역사 구하기' 보고서를 펴내 재단 산하 미국사박물관이 이념적으로 편향돼 있으며 왜곡된 역사관을 조장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사하 박사는 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자제하면서도 재단의 전시 원칙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항상 사실에 기반을 두며, 과학적·학문적 전통 아래 방대하고 정교하며 철저히 연구된 성과 위에 전시를 선보이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재단은 전 세계 학계와 학술기관이 요구하는 가장 높은 기준을 충족하고 있다"고 밝혔다.
역사학자인 그가 생각하는 역사, 그리고 역사 전시에 대한 사명은 무엇일까.
사하 박사는 "역사는 그렇게 될 수도 있었고 다르게 될 수도 있었던 '우연의 순간들'에 관한 것"이라며 "한 개인, 한 집단이 특정한 길과 방향을 선택했기 때문에 결국 역사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전개됐고, 그 선택이 미국과 미국 국민의 궤적을 바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역사가 보여주는 이런 가능성은 희망과 영감을 준다"며 "우리 모두에게 이런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역사 전시를 통해 전달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yum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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