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월3일 19시반 전남광주특별시 남구 광덕사에서 진행된 하성용 신부의 강연 현장에 정회민 크루가 다녀왔습니다. 강연 주제는 <절에서 듣는 신부님 이야기>인데 구체적으로 ‘천주교에서 말하는 정의와 평화’를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정회민 크루가 현장 취재를 해온 것을 토대로 박효영 기자가 5편에 걸쳐 기획 시리즈 기사를 작성합니다. 이번 기사는 1편입니다.
[평범한미디어 →현장 취재: 정회민 크루 / 기사 작성: 박효영 기자] 아주 유명한 그림이 있는데 이걸 봐보자. 키 작은 사람과 키 큰 사람 모두에게 똑같은 길이의 받침대를 주는 것이 정의로울까? 누가 봐도 정의롭지 않다고 여길 것이다. 공정하지도 않다. 하성용 신부(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요즘에 가장 중요한 게 공정인데 사람들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돼야 된다고 생각한다”면서 “근데 사회복지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면 될까?”라고 화두를 던졌다.
안 된다. 어떤 분들은 사회복지도 모든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돼야 된다라고 주장하는데 그분들의 주장이 맞다 틀리다. 이런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라 그분들의 주장이 점점 더 힘을 얻고 그분들의 주장이 더 옳다라는 게 다수가 되면 우리가 살기 좋을까?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비장애인이 있고 장애인이 있다.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데 비장애인과 휠체어 장애인이 같은 곳에서 출발하면 누가 이길까? 근데 그 휠체어를 탄 장애인에게 이게 사회의 논리고 이게 공정한 겁니다! 이야기를 한다면 그건 뭐가 되는 건가? 차별이 되는 거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조금 더 심화되면 폭력이 된다. 폭력이 꼭 누구를 줄줄 패고 이런 게 폭력이 아니라 말로 하고 마음으로 하고 생각으로 하는 폭력이 훨씬 더 큰 폭력이다. 알겠는가?
하성용 신부가 강연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정회민 크루>
사회복지에서는 ‘공정’의 가치보다 다른 게 더 중요하다. 하 신부는 “사회복지라고 하는 것에서 공정은 물론 좋은 거지만 공정이 모든 분야에게 적용되면 안 되고 누군가에게는 때로는 공정해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배려해 주는 것 그게 정의로움”이라는 점을 설파했다.
100미터 달리기에서 때로는 휠체어 탄 장애인이 50미터 앞에서 출발할 수도 있는 거고 때로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게임을 하지 않아도 부전승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수 있다. 그걸 인정해주고 불공정하다고 항의하지 않는 것이 바로 사회복지적인 차원이고 그게 올바른 거다.
다시 한 번 하 신부는 “사회복지적인 차원에서 평화는 무엇일까”라고 화두를 던졌다. 이어서 “어떤 분들은 평화가 아무 일도 없는 상태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물론 아무 일도 없는 상태가 평화긴 한데 사람이 살면서 아무 일도 없는 날들이 있을 수 있을까”라고 덧붙였다.
거의 없다. 평화가 아무 일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죄송한데 관속에 있어야 한다. 그냥 관속에 있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근데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일이 거의 없다. 무탈하길 바라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나길 바라지만 다른 사람과 사회와 세상에는 여러저런 일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평화롭고 싶은데 나의 평화로움을 깬다는 표현은 다른 사람이 평화를 깨고 있다는 뜻이다. 성숙이 덜 된 사람인 거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내 평화를 깨더라도 나는 평화로움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면 그건 성숙한 사람이다. 진짜 평화는 아무 일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여러 외부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나도 내가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게 진짜 평화다. 그게 평화로움이다. 평화로움은 누가 나를 건드리고 일이 있어도 내가 늘 한결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고 외부적인 환경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야 말로 “불교의 부처님이자 기독교의 예수님 모습”이다.
예수님이 언제 가장 평화로우셨냐라고 할 때 사실 예수님의 33년 삶 중에서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다. 근데 인간적으로는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가 가장 비참할 때다. 근데 왜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가장 평화로웠다고 얘기를 할까?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희생하는 그 모습이 사람들에게 평화로움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얼굴은 피투성이인데 사람들에게 웃어주는 희망을 주는 그 모습이 예수님이 가장 평화로웠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평화로움은 다른 사람이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지켜나가는 거고 내가 지켜나가는 것을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는 거다.
정리해보면 ‘기독교적 정의’와 ‘사회의 정의’는 다르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정의와 평화의 한 형태는 바로 사회복지의 형태다. 옳음은 주관적일 수도 있고 객관적일 수도 있지만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인 그 옳음이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차별 없이 적용돼야 되는데, 그 적용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공정이라는 잣대로 특별히 사회적 약자에게 나와 똑같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정의도 아니고 옳음도 아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정의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평화에 대한 거는 아무 일도 없는 상태나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건드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음에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 나를 열받게 하는 사람에게 더 잘해주고 나를 웃게 해주는 사람에게 그 웃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된다. 그게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정의와 평화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진행형이다. 끊임 없이 좋은 사람이 되길 멈추지 말고 노력하는 것이다. 하 신부는 “사랑을 베푸는 건데 그걸 포괄적으로 얘기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강조했다.
사람은 매일 매일 새로워져야 된다. 가톨릭 교회는 매일 매일 새로워져야 된다고 얘기를 하는데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게 노력인데 그 노력을 어떻게 해야 될까? 스스로 좋은 마음을 가지려고 해야 한다. 올바른 정의라고 하는 걸 내가 가지려고 노력을 안 했는데도 그게 저절로 생길까? 아니다. 그리고 설령 생겼다고 하더라도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그게 유지가 될까? 안 된다. 교도소에 있는 분들 태어날 때부터 교도소에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을까? 아니다. 산부인과 신생아실 가보면 아이들 중에서 전과자나 살인자나 절도범이 될 관상이 있는 애가 있는가? 없다. 아이들은 다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근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누군가는 그 천사의 모습대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누군가는 악마의 얼굴로 살아간다. 근데 그거는 예정되어 있거나 운명이거나 관성이 아니라 그리고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났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런 영향도 있을 수도 있지만 가장 큰 영향은 뭔가?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기를 멈췄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교도소는 ‘교정’과 ‘교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하 신부의 표현대로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기를 멈춘 사람들에게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라는 교육을 해주는 것”이다.
교정과 교화가 끝까지 안 되는 사람은 할 수 없지만 교정과 교화가 된 사람 즉 놀랍게도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있으니까 우리가 교도소를 운영하는 거지 사회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들을 영원히 격리하기 위해서 교도소를 만드는 게 아니다. 그저 격리만 하려고 한다면 우리나라에는 교도소가 차고 넘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스스로 좋아지려는 노력을 해야 된다.
하 신부에 따르면 종교의 역할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사람들이 스스로 좋아지도록 계속 잔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통상 종교는 무언가 하지 말라는 금기들이 많다. 반대로 성당은 무언가 실천을 하라고 권하는 게 많다.
불교는 잘 모르겠는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런 얘기 가끔 한다. 신부님 왜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게 많아요? 그럼 내가 뭐라 그럴까? 성당은 담배 펴도 되고, 고기 먹어도 되고, 금요일에는 물고기 먹어도 되고. 성당에서는 하지 말라고 하는 것보다 하라고 하는 게 더 많다. 근데 그분들은 왜 그런 질문을 할까? 하라는 얘기는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 말라는 얘기에 꽂혀 있는 거고. 성당에서 하라는 일이 더 많은데 사랑을 실천하세요. 가난한 사람 도와주세요. 착하게 사세요. 남을 도와주세요. 근데 사람들이 듣지 않는다. 왜? 귀찮으니까.
항상 고민하고 실천하는 자세를 갖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쉽지 않다.
성당에 가끔 이런 분들도 있다. 신부님 제가 기도를 엄청 많이 하는데 사실 이거 자체가 잘못된 거다. 여기에는 기도를 자랑하는 마음이 있는데 기도는 자랑하는 게 아니다. 근데 어쨌든 신부님 제가 기도를 엄청 많이 하는데 기도를 더 해야 됩니까라고 물어본다. 그럼 답은 뭘까? 당연히 더 해야 된다. 세상에는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진짜 많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무슨 말씀을 하셨냐면 나를 위해 기도해주지 말라고 그랬다. 좀 재수 없는 얘기일 수도 있는데 교황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많은데, 교황 말씀의 핵심은 뭐냐 하면 아무도 기도해주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주라는 것이다.
기도를 받지 못하는 대상자는 보통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가족적으로 기타 여러 가지로 소외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한국에도 많고 전세계적으로도 아주 많다. 기도와 기부를 많이 한다고 자기를 위한 자랑처럼 말하지 말고 그냥 묵묵히 끊임없이 실천해야 한다. 세상의 어두운 곳을 살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기부할 수 있다면 해야 한다. 생색내지 말고. 한국식 기복 신앙은 나의 승진을 위해서, 시험 잘보기 위해서, 우리 아들 좋은 대학 가달라고 빌기 위해서 교회에 가는 것으로 굳어져 있다. 하지만 하 신부는 세상의 낮은 곳을 비추고, 나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종교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어떤 분들은 신부님 제가 어디서 후원하고 어디도 후원하고 어디 어디도 후원하는데 제가 후원을 더 해야 될까요? 그러면 더 하라고 얘기한다. 내가 노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후원할 수 있다. 돈이라고 하는 거는 화폐 가치가 있고 전세계적으로 다르다. 명동에서는 냉면이 1만8000원인데 1만원 가지고 냉면도 못 먹는다. 근데 2만원이면 아프리카에서 한 달을 살 수 있는 나라도 있고, 우리 돈 1만원으로 한 일주일을 살 수 있는 나라도 있고. 어떤 나라는 소 한 마리를 사서 잘 크면 대학 갈 때 쓰는 것처럼 그 아이의 교육비에 쓸 수 있는 나라가 있다. 우리는 1만원으로 냉면도 못 사먹는데 거기서는 1만원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천주교에서 얘기하는 나날이 새로워져야 된다는 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노력을 해야 되는데 종교가 약간 좋은 의미는 아니지만 채찍질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지 마세요. 더 열심히 사셔야 합니다.
나아가 나 혼자만 생각하지 말고 다같이 노력하고 서로 믿어줘야 한다.
부처도 그렇고 예수도 그렇고 그분들이 더 수행할 필요가 있는 분들이었을까? 그분들은 왜 끊임없이 수행을 했을까? 성경에서 보면 예수는 심심하면 기도한다. 왜 기도를 할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를 하라고 하는 것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얘기가 있다. 나 한 사람은 세상을 바꿀 수 없지만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뀌면 세상을 바꿀 수가 있다. 나 혼자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둘 중에 하나다. 독재자거나 폭군이거나. 그래서 부처도 그렇고 예수도 그렇고 제자들을 남겨두고 떠날 수 있었던 거는 그들을 믿어서 그런 것이다. 선한 사람들이 세상을 더욱 선하게 만들 거다.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만든 이 세상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다고 써져 있다. 그러면 지금 2026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아름다울까? 아름답지 않은 면도 많지만 아름다운 면이 훨씬 더 많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전쟁통에서 고통받거나, 자연재해로 죽거나, 범죄로 죽을 수도 있다. 굶고 있거나. 근데 세상에는 선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인간은 누구나 결핍이 있고 결점이 있다. 불완전하다. 그래서 거듭 반복한 명제로 돌아가야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 노력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적인 교리로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 때는 두 가지다. 하나는 천국이다. 또 하나는 뭐냐면 예수가 다시 오실 때다. 재림했을 때. 근데 예수가 재림하면 좋을까? 굉장히 나쁠 겁니다. 왜냐? 세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세상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사라진다. 여기에서 심판이 이뤄진다. 그리스도교적인 마인드로 내가 구원받기에 합당하다고 성당에서 손들어보라고 그러면 아무도 손 못 든다. 이유는 뭘까? 구원받기에 합당하다고 손 드는 놈이 가장 먼저 지옥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구원받기에 합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혹시 교회나 성당 다니는 분들의 말투 중에 나는 죄인이다. 이런 얘기를 입버릇처럼 얘기한다. 아직 구원받기에 부족하다는 표현인데 그 얘기는 뭐냐면 부족하니까 어제보다 오늘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이다. 지금 만약에 예수가 다시 오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아직 내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으로 달려가는 존재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교적인 표현으로 사람은 태어났을 때보다 죽었을 때 완성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얘기를 한다.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다. 죽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여정이기도 하지만 그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거는 나날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천주교에서 말하는 정의는 “모두가 함께 잘사는 것”이다. 나만 잘살려고 하면 안 된다. 타인을 염두에 두고 함께 잘살 수 있어야 나의 진정한 행복도 가능하다.
내가 걸어서 움직일 수 있으면 그걸로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고. 내가 만약에 거동이 불편한 상태가 되면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는 염주가 있고 천주교에는 묵주가 있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정의와 평화는 모두가 함께 잘사는 사회다. 그리고 모두가 함께 잘사는 사회는 모든 정치와 모든 사상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그리스도교 천주교에서 말하는 것은 그 누구도 소외되면 안 되는 모든 사람인 것이다.
그 누구도 소외되면 안 되는데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소외받는 계층이 2030세대 청년들이라는 것이 하 신부의 진단이다.
왜냐하면 지금 청년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지금의 청년 세대가 아무리 뼈빠지게 노력해도 절대로 부모 세대보다 부자가 될 수 없다. 예전에 부모들은 노력하면 서울에서 집 살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지금 청년들은 특별히 좌절 속에 살아간다. 경제성장도 예전처럼 많이 되지 않고 좋은 직장도 예전처럼 많지 않고 기회는 점점 더 없어지게 된다.
이주 노동자와 장애인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처지와 입장을 배려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바라보고 편견을 갖게 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이다.
내국인과 외국인이 있으면 누가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일까? 외국인이다. 외국인 중에서도 미국인하고 파키스탄인하고 누가 소외된 계층일까? 중소기업 공장에 가면 농촌도 마찬가지고 어촌도 마찬가지고 다 외국인들이 주로 있다. 지금은 외국인들이 있지 않으면 공장을 돌릴 수도 없고 농장을 운영할 수도 없고 어업을 영위할 수도 없다. 그리고 지체 장애인들은 눈으로 보이게 장애가 있지만 발달 장애인이나 자폐가 있는 분들은 가끔 장애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근데 예를 들어서 왜 쟤는 내 말을 못 알아듣지? 왜 쟤는 똑같은 얘기를 여러 번 하게 하지? 지적 장애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건데 내가 못 견디는 것이지 않은가? 사실 이게 바로 폭력이다. 우리가 볼 때 다 한국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 사회에는 한국인이 아닌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다 알아듣는 것 같이 보이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게 뭐냐면 바로 배려다. 정의와 평화가 흘러넘치는 세상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건 뭐냐면 배려심이다.
그러나 하 신부가 보기에 한국 사회에는 “배려심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하나 더 가져가고 하나를 더 하면 억울해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래서 똑같이 줘야 된다는 공정을 주장하는데 그 공정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폭력일 수 있다. 발달장애가 있고 지체장애가 있고 파키스탄에서 오는 친구들이나 기타 취약계층에게 공정을 주장하는 건 그 공정이라는 단어 자체가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예수도 부처도 공정을 주장한 적이 없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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