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얏나무 아래 갓 고쳐 쓰다 도둑으로 몰려", 청빈했지만 정의롭지 못했던 대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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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얏나무 아래 갓 고쳐 쓰다 도둑으로 몰려", 청빈했지만 정의롭지 못했던 대법원장

프레시안 2026-07-10 09:51:1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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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파동의 맏형에서 '사법부 암흑기'의 수장으로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2권을 펼쳤다. 유태흥(劉泰興, 1919~2005) 항목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 평가가 나왔다. 1962년 무고한 소년 김성구의 무죄를 끌어낸 용기 있는 판사, 1971년 사법파동에서 "100의 부패가 1의 부패를 규탄할 자격이 있느냐"고 직격탄을 날린 판사들의 맏형, 그러나 동시에 김재규(1926~1980)와 김대중(1924~2009)의 사형판결에 참여하고, 1985년 헌정사상 최초로 대법원장 탄핵소추안의 대상이 된 '사법부 암흑기'의 수장. 한 사람 안에 이렇게 상반된 행적이 공존한다는 것이, 한국 현대 사법사의 가장 복잡한 비극을 만든다.

1919년 충남 홍성 출생, 일본인 판사 아래 앉은 서기 아버지를 보며 자란 소년

유태흥은 1919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치하 법원서기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만나러 재판소에 갔을 때, "일본인 판사는 판사석에 높이 앉아 있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 밑의 서기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요담에 커서 판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1944년 일본 간사이대 법학과를 졸업했지만, 1945년 8월 15일 응시한 조선변호사시험은 해방 당일 중단됐다. 정식합격이 아닌 '이법회'의 일괄구제로 합격증을 받은 그는 평생 이 '열등감'을 안고 살았고, 스스로 '열패고'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세계사 속의 동류, '바람막이'에서 '체제의 수호자'로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궤적이 떠오른다. 독일의 일부 판사들은 나치 초기에는 동료판사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지만, 체제가 강고해질수록 점차 그 체제의 충실한 집행자로 변해갔다.

유태흥이 1971년 사법파동에서 동료들의 '바람막이'였다가, 1980년 김재규와 김대중의 사형판결에 참여하는 변화가 정확히 같은 궤적이다. 차이가 있다면 유태흥은 끝까지 청빈하게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점이다.

1962~1971년, 용기 있는 판결과 비밀영장 사이

유태흥의 초기 경력은 놀라울 정도로 떳떳했다.

1962년, 시민증이 없다는 이유로 간첩누명을 쓰고 11년간 옥살이를 한 소년 김성구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1970년에는 정치인 서민호의 반공법위반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 그는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로서 비밀영장(검사가 정식 접수 없이 직접 수석부장판사에게 제출해 발부받는 영장) 발부를 도맡았고, 구로농지 사건에서는 53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무더기로 발부한 책임자였다.

1971년 사법파동, "100의 부패가 1의 부패를 규탄할 자격이 있느냐"

유태흥은 1971년 1차 사법파동의 맏형이었다.

검찰이 동료 판사 이범렬에게 무리한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유태흥은 직접 영장을 기각하고 동료판사 153명이 사표를 던지는 저항의 중심에 섰다.

그는 기자들에게 "100의 부패가 1의 부패를 규탄할 자격이 있느냐"며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나 이 저항은 허무하게 끝났다. 사표 철회 이후 사법부는 정권에 대한 저항의지를 완전히 상실했고, 유태흥만은 살아남아 승승장구했다.

1980년, 김재규 사형판결의 주심

유태흥의 반헌법 행위의 정점은 10·26 사건 재판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주심으로서 그는 김재규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다수의견(8 대 6)을 이끌었다. 14명의 대법원판사 중 6명이 내란죄 성립에 반대하는 소수의견을 냈지만, 유태흥은 끝까지 "기각감"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사형선고 나흘 만에 김재규 등 5명은 서둘러 교수형에 처해졌다. 재심청구 중인 사건의 사형집행을 미루는 관례조차 지켜지지 않았다. 소수의견을 낸 6명의 판사는 두 달 뒤 강제로 옷을 벗었다.

1981년, 김대중 사형확정 판결

같은 해 유태흥은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대법원 판결에도 참여해 사형을 확정했다.

신군부는 내란음모죄로는 최고 25년형까지밖에 줄 수 없자,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반국가단체로 조작해 국가보안법을 적용했다. 판결 직후 한 시간 만에 국무회의가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악역은 대법원이 맡고 선심은 전두환이 쓴 꼴"이었다.

1981년, 대법원장이 되다, "정권에 충성을 맹세"

이 두 사건의 공로로 유태흥은 1981년 제5공화국의 첫 대법원장이 됐다. 청와대 비서관들의 사전면접을 거친 뒤였다. 그는 면접에서 "사법부의 수장은 정치적, 공안적 사건에서는 정부에 협력해야 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1983~1986년, 비서관 뇌물사건, 인사보복, 헌정 최초 탄핵소추

유태흥 대법원장 재임기간은 사법부 역사상 최악의 시기로 기록됐다.

1983년 그의 측근 비서관 강건용의 뇌물수수 사건이 터졌고, 안기부 수사과정에서 가혹행위까지 발생했다.

1985년에는 무죄판결을 내린 판사들을 잇달아 좌천시키는 보복인사를 단행해, 변협이 사퇴를 권고하고 야당이 헌정사상 최초로 대법원장 탄핵소추안을 발의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말년, 청빈했지만 한강에 투신자살

유태흥은 곤궁한 말년을 보냈다. 퇴직금은 아들이 탕진했고, 대법원장 예우로 보내는 명절 선물조차 현금으로 바꿔달라고 했을 만큼 가난했다.

결국 2005년, 한강에 투신해 생을 마감했다.

청빈했지만 정의롭지 못했던 한 사람의 비극적 종말이었다.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사법부 독립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일관성이다. 한 번의 용기가 평생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권력에 협력한 행위는 청빈한 사생활로 상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유태흥을 떠올렸다.

"100의 부패가 1의 부패를 규탄할 자격이 있느냐"고 외치던 사람이, 9년 뒤에는 자신이 그 100의 부패의 핵심이 됐다는 사실.

그 변화의 경로를 우리는 정직하게 기록해야 한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유태흥 ⓒ반헌법행위자열전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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