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흰 저고리 소매가 낮게 깔린다. 붉은 치마는 바닥 가까이 퍼지고, 손에 거머쥔 푸른 천은 바람 머금은 물결처럼 내려앉는다. 무용수 박수현은 정면 응시를 피한다. 고개를 살짝 돌려 내면 깊숙한 기억을 더듬는 표정을 유지한다. 회색 배경 위 피지컬은 치장 대신 절제를 택했다. '동백꽃 당신'은 화려한 꽃춤 묘사를 배제하고 묵묵히 버텨온 사람들의 마음을 한국춤 호흡에 담아낸 1인극 형태다. 박수현의 ‘동백꽃 당신’의 동백꽃은 혹한 속 피어나는 식물이다. 추위를 뚫고 만개하는 생명력, 상실 후 뒤늦게 깨닫는 연정, 식구를 위해 본인 생을 희생한 세대의 묵직한 함구가 전체 정서를 지배한다.
작품은 평범한 소시민 생애에서 출발한다. 당장 척박해도 언젠가 활짝 피어날 날을 꿈꾸며 하루를 묵묵히 살아내는 인물 군상이다. 예고 없이 찾아온 이별 뒤에야 누군가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을 묵묵히 바라봤는지 깨닫는 구조다. 어머니가 들려준 옛이야기는 사랑, 기쁨, 고통, 슬픔 네 가지 감각을 품었다. 댄서는 식물 명칭을 빌려 본인 생애, 타인의 시간을 나란히 소환한다.
동백꽃은 제주 지역 정서와 깊게 얽혀 있다. 삭풍 속에서도 색채를 잃지 않는 속성은 섬 특유의 혹독한 날씨, 기다림, 강인한 복원력을 연상케 한다. 박수현은 상징성을 구구절절한 서사 설명 대신 몸의 궤적으로 직역한다. 손끝이 천천히 떨어질 때는 이별의 육중한 무게가 파생하고, 팔이 하늘을 향할 때는 부활 의지가 엿보인다. 치마 붉은 면적은 피, 식물, 식구의 세월, 여성의 굴곡진 삶을 차례로 암시한다. 푸른 천은 바다, 짙은 그리움, 닿기 힘든 거리를 품은 오브제로 작동한다.
안무가 이력이 극 해석을 돕는 열쇠다. 서울대학교 체육교육 전공 후 뉴욕대학교 무용교육을 수학했다. 대구가톨릭대학교 박사학위 취득 후 현재 제주에 터를 잡았다. 극장 안에서는 한국무용 고유의 선, 호흡을 기둥 삼아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다듬어낸다. 학문, 현장, 교육, 실연을 쉼 없이 오간 경로는 신작 언어를 직조하는 강력한 무기다. 기교 과시를 덜어내고 육체에 켜켜이 쌓인 연륜을 조용히 드러낸다.
박수현은 “평생 가족을 위해 묵묵히 살아오신 우리네 부모님들. 매일의 삶을 견디어-버티며 살아가는 모든 당신께, 진심을 다해 응원과 축복을 보낸다"며 "소중한 당신의 인생이, 동백꽃처럼 겨울 속에서도 찬란하게 피어나길 바란다”라고 했다. 인생이 한겨울 카멜리아처럼 찬란하게 피어나길 바란다는 문구는 본인 고백이자 관객을 향한 따뜻한 위로다. 춤사위를 익히던 소녀, 불안했던 20대, 임신, 출산, 육아를 관통한 30대, 체력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 40대 자각이 단일 신체 안에서 겹겹이 축적된다.
속 인물은 연인, 식구, 한 여인의 생애를 자연물 이치에 비추어 나열한다. 참석자는 특정 주인공 사연을 방관하는 위치에서 본인 기억을 끄집어내는 주체로 변모한다. 누군가의 어머니, 오래 함구해온 아버지, 묵묵히 노동한 사람들, 본명보다 직함으로 불린 이들까지 극장 안으로 호출된다. 식물은 예쁜 사물로 소비되지 않고 피고 지는 생명 이치 그 자체가 된다.
연출진은 소품을 인문학적 언어로 격상시켰다. 지역 고유 식물 이미지는 단아하게, 때론 몹시 쓸쓸하게 극장 온도를 바꾼다. 전통춤 호흡은 이미지 위에 사람의 세월을 덧입힌다. 소매가 늦게 따라오고, 치마가 한 박자 뒤흔들릴 때, 사람들은 활자보다 감정 지연을 먼저 체감한다. 1인극 형태는 출연자 책임을 무겁게 키운다. 등장인물이 적어 눈썹 미세한 떨림, 무릎 굽힘, 손끝 궤적까지 서사 일부로 흡수된다.
관건은 감상적 위로 문구를 얼마나 절제된 피지컬로 억누르느냐다. 꽃, 인생을 엮는 시도는 자칫 뻔한 감성팔이에 머물 위험성을 내포한다. 설득력을 획득하려면 인생 설명에 매몰되기보다, 모진 굴곡이 뼈와 살 안에서 어떻게 버티고 무너지고 재건되는지 시각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부드러운 팔선은 도리어 가장 날카로운 무기로 돌변한다. 겉치레 묘사는 상처를 덮어버리는 위장막 역할을 거부하고, 흉터 모양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정밀한 시각 장치로 작동한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Copyright ⓒ 뉴스컬처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