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박효령 기자】광주에서 일면식도 없는 여고생을 살해한 장윤기(23) 사건과 관련해 현직 경찰관인 아버지가 주요 증거물인 성인용품(리얼돌)에 이어 범행 직후 장씨 차량에서 발견됐다가 사라진 케이블타이까지 인멸한 정황이 드러났다.
앞서 사건 수사팀을 이끌었던 박모 경감도 증거인멸 혐의로 지난 8일 구속되면서 경찰이 경찰 가족을 대상으로 ‘봐주기 수사’를 벌인 것 아니냐는 의혹이 확산하고 있다. 잇따른 증거인멸, 방치 의혹으로 경찰 수사의 공정성과 신뢰가 도마 위에 오른 상황에서 경찰이 신뢰 회복을 위한 TF 구성 등을 방안으로 내놓으며 내부를 재정비하는 모습이다.
경찰청은 9일 장윤기 수사 과정에서 불거진 각종 의혹을 계기로 외부 인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경찰 수사 신뢰 제고를 위한 쇄신 TF’와 국가수사본부장 직속인 ‘내부비리수사대’를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수사 공정성과 내부 통제 체계를 강화해 추락한 경찰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취지다.
경찰 조직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진 상황을 고려해 유재성 경찰청장 직무대행은 미국 출장 일정을 조정해 오는 10일 오전 조기 귀국할 예정이다. 유 직무대행은 귀국 직후 경찰 지휘부와 회의를 열어 이 같은 쇄신 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할 방침이다.
경찰 등에 따르면 광주 광산경찰서 살인사건 관련 진상규명 특별수사팀은 전날 장윤기의 아버지이자 현직 경찰관인 장모 경감을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해 조사했다.
특별수사팀은 장 경감을 상대로 장윤기의 원룸에 있던 리얼돌 등 주요 증거물을 폐기한 의혹과 사건 초기 광산경찰서 수사팀과 여러 차례 통화한 경위 등을 집중적으로 확인했다.
아울러 장윤기의 SUV 차량 조수석 수납공간에서 발견됐다가 사라진 케이블타이를 가져가게 된 경위와 당시 상황에 대해서도 조사한 것으로 파악됐다. 장 경감은 현재까지 참고인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
앞서 장윤기 사건을 수사했던 광산경찰서 수사팀장 A경감은 같은 날 증거인멸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광주지법은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증거인멸과 도주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A경감은 지난 5월 5일 장윤기를 긴급체포한 직후 범행 차량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결박 도구로 추정되는 케이블타이를 확보하지 않았고 당시 차량 수색 장면이 담긴 채증 영상을 뒤늦게 삭제하는 등 증거를 인멸한 혐의를 받고 있다.
조사 과정에서 A경감은 케이블타이가 뒤늦게 중요한 증거라고 판단해 실물만 확보한 뒤 채증 자료와 함께 제출하면 된다고 판단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경찰은 사건 초반 장윤기에게 형법상 살인 혐의 등을 적용해 사건을 검찰에 넘겼다. 그러나 검찰은 보완수사를 통해 성폭력 범행 정황과 추가 증거를 확보한 뒤 지난달 2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상 강간 등 살인 혐의를 적용해 장윤기를 구속기소했다.
이번 사건은 부실수사 논란을 넘어 경찰 조직의 공정성과 신뢰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사안으로 번지고 있다. 피의자의 부친이 현직 경찰관인 데다 사건을 담당했던 수사팀 관계자까지 증거인멸 의혹으로 수사를 받으면서 경찰의 수사 신뢰성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의혹과 관련해 유가족들은 철저한 진상 규명과 관련자 엄벌을 촉구했다. 이채원양의 어머니는 전날 광주경찰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을 보호해야 할 경찰이 뒤에서는 사건을 축소하고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있었다”며 “누구보다 엄정하게 수사해 채원이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이라 믿었던 경찰이 우리 편이 아니라 살인마의 편이었다”고 규탄했다.
그러면서 “증거를 확보해야 하는 기본적인 절차조차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 과연 경찰이라는 직분을 수행할 자격이 있느냐”며 “경찰의 책무를 망각한 직무유기이자 국민에 대한 기만”이라고 지적했다.
경찰청은 광주 광산경찰서 살인사건의 수사 과정 전반을 규명하기 위해 27명 규모의 ‘광주 광산서 살인사건 관련 진상규명 특별수사팀’을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 특별수사팀은 광주경찰청 지휘부를 배제한 채 수사 결과를 국가수사본부장에게 직접 보고하는 체계로 꾸려졌다. 또 경찰청 수사팀장과 중대범죄수사과 소속 수사관들도 지난 8일부터 특별수사팀에 합류해 증거인멸 의혹과 부실수사 경위 등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에 나섰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이 경찰 수사의 한계를 보여준 사례라며 검찰의 보완수사권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검찰이 보완수사를 통해 성폭력 범행 정황을 추가로 확인하고 증거인멸 의혹 등 경찰의 초기 수사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사실관계를 밝혀냈다는 점에서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검찰의 보완수사권 폐지를 위한 형사소송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보완수사권 폐지 논의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면서 향후 관련 법 개정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백석대 경찰행정학과 이건수 교수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이번 사건은 개별 수사관의 문제가 아니라 수사 시스템과 절차의 부재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며 “특히 현직 경찰관이나 공무원이 연루된 사건은 이해충돌과 공정성 논란이 불가피한 만큼 일선 경찰서가 아닌 다른 광역수사대나 시·도경찰청 등 상급 기관이 전담하도록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경찰 내부 감찰만으로는 국민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며 “외부 감찰위원회나 법률 전문가 중심의 심의위원회를 도입해 수사의 공정성과 책임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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