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게 엄격한 한국의 개인정보 규제가 자율주행 산업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미래 모빌리티 시장의 주도권마저 해외에 내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자율주행 기술 경쟁의 핵심이 인공지능(AI)의 성능보다 실제 도로에서 확보한 방대한 주행 데이터로 옮겨가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개인정보보호법에 가로막혀 기업들이 충분한 데이터를 축적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현대자동차(이하 현대차)가 자율주행 핵심 연구개발 거점을 사실상 미국으로 옮긴 것도 이러한 규제 환경을 고려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자율주행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개인정보 보호와 산업 경쟁력의 균형을 고려한 과감한 규제 개선 없이는 한국이 글로벌 자율주행 시장에서 기술 주도권을 확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을 내놨다.
"데이터 수집 없이는 AI 기술 발전도 없다"…전문가들 입모아 현행 개인정보 규제 비판
8일 학계 전문가들은 한국의 개인정보 규제 환경이 자율주행 산업 성장을 저해하는 구조적 원인이 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먼저, 최병호 고려대 AI연구소 교수는 르데스크와의 통화에서 국내 데이터 규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정치·사회적 기조에서 찾았다. 최 교수는 "현 정부와 여당의 기조는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가치에 방점이 찍혀 있다"며 "AI 시대의 핵심 자산인 데이터를 개인의 영역으로 엄격히 제한하는 인식이 사회적 합의로 자리 잡으면서 산업 육성보다 개인정보 보호가 우선시되는 규제 체계가 형성됐다"고 분석했다.
최 교수는 법적 규제를 우회하기 위한 기술적 대안으로 제시되는 '비식별화 기술'의 현실적인 한계도 지적했다. 그는 "관련 법령 준수를 위해 비식별화 기술을 고도화하고 있으나 실제 산업 현장에서 데이터를 원활하게 확보하기에는 기술적·절차적 제약이 여전히 크다"며 "미래 기술 경쟁력이 국가 산업의 향방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인 만큼, 개인정보 보호라는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도 자율주행과 같은 전략 분야에 대해서는 선별적인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공학부 교수(한국전기자동차협회 회장)는 국내 자율주행 기술 규제 현실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김 교수는 "기술 개발 분야에는 개인정보보호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면서도 정작 선거철 등 특정 시기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홍보성 메시지가 무분별하게 발송되는 등 규제의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며 "자율주행 기술의 완성도는 방대한 빅데이터 확보를 통한 로드테스트를 통해 결정되는데 국내 법 체계상 인허가 절차가 복잡해 연구 속도를 내기 어렵다"고 현장의 제약 요인을 설명했다.
또한 그는 제도적 안전망의 미비점을 지적하며 '기술 보험' 체계 부재도 핵심 문제로 꼽았다. 김 교수는 "실증 주행 중 발생할 수 있는 사고에 대비한 보험 상품 설계나 명확한 책임 소재 규정도 미흡하다 보니 기업 입장에서 도로 주행 테스트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기에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문학훈 오산대 미래전기자동차학과 교수 또한 개인정보보호법을 자율주행 기술 발전을 저해하는 핵심 요인으로 지목했다. 문 교수는 "현행 개인정보보호법은 자율주행 실증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는 수준이다"며 "허가된 특정 구역에서만 제한적으로 데이터를 수집하는 방식으로는 인공지능 학습에 필요한 방대한 규모의 유의미한 데이터를 확보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이어 "이미 현대차 등 주요 기업에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기술 수준은 확보했으나 데이터 확보 규제로 인해 레벨 3 이상의 상용화 단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며 "기술적 역량과는 별개로 엄격한 법적 제약 탓에 데이터 수집 범위가 제한되면서 국내 자율주행 산업이 레벨 2 수준의 실증에 머물러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 7일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가 주최한 '자율주행 혁신 간담회'에서 발표자로 나선 채상미 이화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데이터 활용 제약이 국내 AI 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저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채 교수는 "자율주행 시장의 패러다임이 모델 고도화에서 양질의 실도로 데이터 확보로 전환되고 있다"며 "자율주행 기술은 알고리즘을 넘어 운전 습관, 탑승객 정보 등 방대한 맥락 데이터를 통합해야 완성되는데, 국내의 경우개인정보보호법 등 각종 규제들로 데이터 축적량이 선도국 대비 10% 미만에 그치는 수준이다"고 분석했다.
이어 "광주 자율주행 실증도시 등 관련 프로젝트가 현재 진행되고는 있으나 글로벌 시장에서 데이터 주권을 확보하기에는 인프라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며 "최근 개인정보보호위원회에서 규제 완화 논의가 진행 중인 것은 고무적이나 현장의 기술 개발 여건은 여전히 매우 척박하기 때문에 국가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는 더욱 과감하고 실효성 있는 데이터 규제 완화 정책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자율주행 데이터 확보 전쟁…규제에 묶인 한국, 고속도로 달리는 미국·중국
현행 개인정보보호법은 자율주행차가 촬영하는 보행자의 얼굴과 차량 번호판, 위치정보 등을 개인영상정보로 규정하고 있다. 기업이 이를 AI 학습에 활용하려면 개인정보 처리의 법적 근거와 안전조치를 갖춰야 하며 위반 시 과징금 부과와 형사처벌, 시정명령 등의 제재를 받을 수 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규제 체계가 실제 도로 기반의 대규모 주행 데이터 확보를 어렵게 만들어 자율주행 기술 경쟁력을 제약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현대자동차그룹은 국내의 제도적 제약으로 인한 연구 환경의 한계를 고려해 자율주행 핵심 연구 거점을 미국으로 삼았다. 이러한 전략의 일환으로 지난 2020년 현대차그룹은 미국 자율주행 기술 기업 앱티브(Aptiv)와 각각 20억달러를 출자해 합작법인 '모셔널(Motional)'을 설립했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 본사를 둔 모셔널은 라이다(LiDAR), 레이더, 카메라 등 다중 센서 융합 기술을 기반으로 한 레벨 4 자율주행 솔루션 및 로보택시 상용화를 위한 연구·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업계는 현대차그룹이 미국을 자율주행 기술 개발의 전진기지로 낙점한 배경으로 실제 도로에서 방대한 주행 데이터를 확보하기 용이한 연구 환경을 꼽는다. 미국은 연방 차원의 포괄적 개인정보보호법이 없는 대신 자율주행 시험운행 제도를 주(州) 정부가 설계·운영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모셔널이 위치한 매사추세츠주는 기업이 공공도로에서 자율주행차를 시험할 수 있도록 허용하되 시험운행 승인과 안전계획, 보험 가입, 시험운행 계획 등의 안전 요건을 충족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 아래 모셔널은 현재 매사추세츠 교통부(MassDOT)와 보스턴시의 승인을 받아 보스턴 시내 공공도로에서 자율주행 시험운행을 진행하고 있다.
현대차 본사 법무팀의 한 관계자는 "현재 내부적으로 테슬라와 비교했을 때 자율주행 기술력이 약 7년 정도 뒤처져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다"며 "격차를 좁히기 위해서는 보행자 얼굴과 차량 번호판, 이동 경로 등 방대한 실제 주행 데이터를 AI에 학습시켜야 하지만 국내에서는 개인정보 규제로 데이터 확보에 상당한 제약이 있어 결국 미국 현지 법인을 중심으로 데이터를 축적하고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연구개발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율주행 기술 강국으로 꼽히는 중국 역시 개인정보보호법(PIPL)을 시행하고 있지만 자율주행 산업에 대해서는 데이터 활용과 기술 개발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규제를 크게 완화시킨 상태다. 중국 정부는 자율주행 산업을 국가 산업으로 설정하고 산업 육성을 위한 규제 혁신에 속도를 내고 있다. 2024년 중국 공업정보화부(MIIT)는 BYD 등 주요 완성차 업체 9곳을 레벨 3 자율주행 공공도로 시험운행 시범사업자로 선정했다.
지방정부 차원의 지원 또한 적극적이다. BYD 본사가 소재한 선전시는 2022년 중국 최초로 자율주행차 공공도로 운행을 허용하는 조례를 제정했다. 이를 기점으로 무인택시와 무인버스 운행이 활성됐고 스마트 도로 인프라가 확충되면서 기업들이 실제 교통 환경에서 다양한 주행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 베이징 역시 약 600㎢ 규모의 자율주행 실증 구역을 지정하고 시험 차량 900여 대를 투입했다. 현재 베이징의 누적 시험주행 거리는 3200만㎞를 넘긴 상태며 세계 최대 수준의 실증 인프라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정책적 지원은 중국 완성차 업체의 자율주행 기술 경쟁력 제고로 직결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BYD는 자사 판매 차량을 대규모 데이터 수집 플랫폼으로 활용하며 자율주행 기술 역량을 급격히 강화했다. 올해 초 기준 첨단 운전자보조시스템(ADAS)이 탑재된 BYD 차량은 약 315만대에 달한다. 또한 BYD는 자체 개발한 차량용 AI 칩과 첨단 운전자보조 시스템 '갓스아이(God's Eye)'를 보급형 모델까지 확대 적용하며 자율주행 기술 대중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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