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난임 환자 커뮤니티와 맘카페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른바 '배려 에티켓'이 병원과 산후조리원 등 실제 의료·돌봄 공간까지 확산하면서 이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서로를 배려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규범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온라인에서 형성된 기준이 현실에서 암묵적인 의무처럼 작동하면서 또 다른 부담과 갈등을 낳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온라인 난임 커뮤니티와 블로그에는 난임센터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을 정리한 게시글이 꾸준히 공유되고 있다. 반복적인 시술과 호르몬 치료로 심리적·신체적 부담이 큰 환자들을 배려하자는 취지에서 ▲아이를 동반하지 않기 ▲임신 성공 소식을 크게 이야기하지 않기 ▲임산부 배려 배지를 눈에 띄지 않게 착용하기 ▲대기실에서 초음파 사진을 꺼내 보지 않기 등이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난임병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산후조리원에서도 온라인 맘카페를 중심으로 ▲모유 수유량을 비교하지 않기 ▲다른 산모의 육아 방식을 평가하지 않기 ▲산후 회복 속도나 체형 변화를 화제로 삼지 않기 등의 암묵적인 규범이 공유되고 있다. 운영 규정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이용자들 사이에서는 서로를 배려하기 위한 행동 원칙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르데스크 취재 결과 난임병원을 다녔거나 현재 치료를 받고 있는 예비 부모들은 기본적인 배려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만들어진 규범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분위기에 대해서는 우려를 나타냈다.
강남의 한 난임병원에 다니고 있는 정태희 씨(45·여)는 "둘 다 결혼이 늦어 자연스럽게 아이를 기다리기보다 병원의 도움을 받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해 다니기 시작했다"며 "병원을 알아볼 때도 주변에서 먼저 치료를 받은 사람들에게 병원 정보나 시술 경험 등을 많이 들으며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병원에서 임신에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은 들지만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이야기하는 암묵적인 에티켓까지 의식한 적은 없다"며 "난임센터 대기실이 일반 진료 대기실보다 다소 조용하고 무거운 분위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아이가 병원에 왔다고 해서 불편하게 느껴본 적은 없다. 오히려 아이를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과 용기를 얻은 적도 많았다"고 밝혔다.
3년간 난임병원을 다니다 지난해 임신에 성공한 박유정 씨(34·여)는 "난임 치료를 받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쉽게 아이를 갖는 것 같은데 나만 그렇지 못하다고 느껴질 때였다"며 "임신한 사람이나 초음파 사진을 들고 나오는 사람을 볼 때마다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나고, 초조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고 말했다. 박 씨는 "그럴 때마다 남편이 '좋은 부모에게 좋은 아이가 올 것'이라며 늘 옆에서 다독여줬고, 그런 위로 덕분에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었다"며 "생각을 조금 바꾸고 마음의 여유를 찾은 뒤 아이가 찾아왔다"고 했다.
박 씨는 난임 환자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이른바 '에티켓'에 대해서는 "나 역시 그런 문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오랜 시간 병원을 다니고 있는 사람들은 작은 자극에도 마음이 크게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하자는 취지에는 충분히 공감한다"고 말했다. 다만 "다만 기본적인 배려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과해져서 서로에게 과한 배려를 요구하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온라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암묵적인 에티켓이 의료·돌봄 공간으로 확산하는 현상에 대해 외국인들은 다소 낯설다는 반응을 보였다. 스위스에서 온 다비드(41·남)는 "난임 병원이나 산후조리원이라는 곳을 직접 다녀 본 경험이 없어 조심스럽지만 이런 에티켓이 있다는 것 자체가 다소 어색하게 느껴진다"며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만큼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커뮤니티에서 만들어진 규칙이 사람들의 행동까지 제한하는 것은 쉽게 공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웬디(49·여)는 "임신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개인의 임신 소식을 크게 알리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플 수는 있겠지만 언젠가는 모두 부모가 될 수도 있는 만큼 이렇게까지 행동을 제한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며 "같은 경험을 하는 사람들끼리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위로하거나 정보를 공유하는 과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공통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서로를 배려하기 위한 행동 기준을 만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이러한 규범이 현실에서 사실상의 의무처럼 받아들여질 경우 공동체 내부의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공통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발적인 행동 기준을 만드는 경우가 많고 온라인 커뮤니티는 이러한 규범을 빠르게 확산시키는 역할을 한다"며 "특히 난임 치료처럼 심리적 부담이 큰 공동체에서는 배려를 위한 규범이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이러한 규범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배려를 전제로 해야 한다"며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거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기준을 요구하는 분위기로 이어질 경우 공동체의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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