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유구한 역사·풍부한 문화 지닌 나라…세계 독자들 알게 됐으면"
"최근 韓문화 급부상, 어쩌면 당연…단점 없진 않지만 대단한 나라"
(레이던<네덜란드>=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15년 넘게 '삼국유사'와 씨름하느라 머리가 좀 아팠죠. 특히 향가를 번역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고려 시대 승려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는 한국사와 한국 문학에서 대체 불가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지만, 상세한 주석을 달아 영문으로 통째로 옮긴 번역서는 불과 얼마 전까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 하와이대학교 출판부가 최근 'Vestiges of the Three Kingdoms of Ancient Korea'(고대 한국 삼국의 흔적)'라는 제목으로 주석 2천개를 함께 수록한 책을 선보임으로써 비로소 '삼국유사'의 첫 영어 완역본이 세상에 나오게 됐다.
한국학에 있어 큰 의미를 지닌 '삼국유사' 영문 완역본 탄생에 기여한 렘코 브뢰커(54) 네덜란드 레이던대학교 교수를 지난 6일 이 대학 캠퍼스에서 만나 출간에 얽힌 이야기 등을 들어봤다.
서유럽에서 최초로 한국학과가 설치된 레이던대학교에 1990년 입학해 한국학과 처음 인연을 맺은 브뢰커 교수는 고려사 등 한국 중세 시대 연구에 천착해온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한국학자로 꼽힌다.
그는 한국학과 설립의 주역이자 유럽 한국학의 선구자인 프리츠 포스(1918~2000)가 필생을 쏟아부은 '삼국유사' 영문 초벌 번역을 포스의 제자이자 자신의 스승인 바우데베인 발라번(79) 명예 교수와 15년여에 걸친 공동 작업 끝에 주석을 붙인 완역본을 내놓을 수 있었다.
한국인의 역사적·문화적 정체성에 오랜 세월 지대한 영향을 미쳐온 '삼국유사'가 벽안의 한국학 학자들 덕분에 이제야 비로소 외국 독자들과 연구자들에게 제대로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브뢰커 교수는 "대선배이자 은사가 시작한 과업을 이어받았고, 그 일을 제 학문의 길잡이 역할을 해 준 스승 발라번 교수와 협업으로 완결짓게 돼 개인적으로도 뜻깊다"면서 이 책을 통해 최근 들어 문화적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한국이 유구한 역사와 탄탄한 문화적 뿌리를 가진 나라임이 널리 알려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브뢰커 교수는 원본 삼국유사를 완역할 만큼 한자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이어온 한국학 연구와 다년간의 한국 유학 경험 덕분에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지라 인터뷰는 한국어로 이뤄졌다.
다음은 브뢰커 교수와의 일문일답.
-- 대선배이자 스승이 시작한 '삼국유사' 완역 과업을 후배이자 제자들이 이어받아 완결 지었다.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 네덜란드에서 한국학을 개척한 포스 교수님은 내가 대학에 입학한 1990년에는 이미 정년퇴직을 한 뒤였지만, 그때까지도 학자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계셨기에 잘 알고 있었다. 발라번 교수는 어떻게 학문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분이다. 15년 동안 '삼국유사'와 씨름하느라 머리가 아프기도 했지만, 60년 전 포스 교수가 시작한 '삼국유사' 완역을 향한 꿈을 후학들이 대를 이어 완성했다고 생각하니 뿌듯하다.
-- 포스 교수가 아직 살아 계셨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까.
▲ 진정한 학자였기 때문에 일단 비판을 많이 했을 것이다. 비판은 좋은 학자의 첫 번째 반응이기도 하다. 조언 내지 토론도 치열하게 하셨을 것 같다. 온갖 국내외 자료를 참고해 조심스럽게 번역하고, 주석을 달긴 했지만 다른 연구자나 독자들의 비판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판은 언제라도 환영한다.
-- 오랜 세월 매달리면서 어려움은 없었나.
▲ 포스 교수님이 90% 정도 초벌 번역을 해놨기에 처음에는 마무리까지 3년 정도 예상했는데, 방대한 국내외 자료를 기반으로 주석을 달고, 최신 연구를 반영해 기존 번역을 수정하는 작업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특히 향찰(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국어 문장 전체를 적은 표기)로 돼 있는 향가를 번역하는 작업이 험난했다. 향가 번역은 발라번 교수가 많이 맡아 주셨다.
-- 역사적·문학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책인데 영문 완역본이 지금까지 없었다는 게 의외다. 이 책이 어떤 역할을 하기 바라는가.
▲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커졌지만, 많은 서구인이 한국이 중국, 일본과 마찬가지로 풍부하고, 다양한 과거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한국이 수천 년에 이르는 긴 역사를 갖고 있고,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좋겠다. 또한 이 책에는 예전 한국 사람의 생활 모습을 볼 수 있는 풍부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는 만큼, 옛 한국인들이 어떻게 살았을지를 엿볼 수도 있다. 다른 문화와 사회를 이해하려면 과거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야 하는데 삼국유사는 그런 면에서 한국의 현재에 대한 길잡이라 할 만하다.
-- K팝과 드라마, 영화, 음식 등 전반에 걸쳐 근래 한국 문화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뜨겁다.
▲ 1996년 연세대에 교환학생으로 갈 때 고모가 서점에서 사다 준 책이 '베트남 여행 가이드'였다. 서울이 한국에 있는지 베트남에 있는지 구분을 못 할 만큼 이곳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평범한 사람도 한국 음식과 한국 드라마, K팝을 이야기한다. 나처럼 일찍부터 한국을 좋아하고, 알았던 사람들은 한국 음식이 맛있고, 한국 문화가 즐겁다는 것을 진작 알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 당연한 것을 이제야 안 것이다. 한국 문화가 각광받는 게 보기 좋다. 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땅에서 지금과 같은 경제와 문화를 일군 한국은 인간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양극화도 심하고 잘못된 부분도 적지 않지만, 한국은 대단한 나라임이 틀림없다다.
ykhyun1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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