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건설된 경의선 주변, 6.3㎞의 선형공원 변신
(서울=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도시를 가로지른 철길. 녹슨 열차는 멈춰 섰지만, 길옆엔 싱싱한 풀과 나무가 자랐다.
기차 없는 길은 다시 이어졌고 오늘도 빌딩숲 사이에서 지친 발걸음이 머물고 떠난다. 지금 여긴 서울에서 가장 긴 공원이다.
◇ "숲길공원에 다녀왔어" "공원 어디?"
서울 경의선숲길공원. 공원이라고 하기엔 이상한 모양새다.
용산구 문배동에서 마포구 연남동까지 6.3㎞ 구간에 길게 이어진 선형(線形)이니, '공원에 다녀왔다'라고 하면 도대체 어느 지점에 다녀왔는지 알 길이 없다.
낯선 방문객 중에는 공원이 이렇게 길게 이어져 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
효창공원앞역에 내려 공원 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녹슨 철로 만든 공원 간판이 보이고 숲길의 이동 경로와 현재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판도 있는데 철길은 외롭게 한 줄 흔적만 남겨놓았다.
공원의 폭은 20∼30m나 될까. 공원의 보이지 않는 끝은 서쪽을 향해 달려간다.
선형공원이라 하면 통상 폭과 길이의 비율이 1대 10 이상이라고 하는데, 이 공원은 1대 200이 넘지 않을까.
◇ 용의 허리 '새창고개'
효창동 구간은 고층 아파트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 밑으로 은행나무, 벚나무, 목련, 버드나무, 단풍나무가 호위병처럼 숲길을 인도한다.
쇄석과 침목 같은 옛 철길의 흔적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다. 이곳이 열차가 지나던 곳임을 잊지 말라고.
공덕역에 다다를 무렵 등장하는 완만한 언덕길이 새창고개다. 조선시대 선혜청의 별창고인 만리창을 이곳에 새로 지으면서 생긴 이름이다. 새로 지은 창고 때문에 인근 마을은 새창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일본은 1904년 경의선 철도를 건설하면서 용산 줄기 중 '용의 허리'에 해당하는 새창고개를 절단했는데, 숲길공원을 조성하면서 대형 소나무를 심어 고갯길을 복원했다.
경의선은 일제가 한반도 지배를 위해 1904년도부터 2년에 걸쳐 건설한 철로다. 경성의 '경'과 신의주의 '의'를 따서 경의선이라 불렸다.
한반도의 남북을 관통하는 가장 많은 노선을 운행했지만 1950년 남북이 분단되면서 경의선은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반쪽짜리 철길로 남게 됐다.
이후 2005년 경의선은 지하화됐고, 지상 철길은 방치됐다가 2016년 지금의 선형공원으로 변신했다.
◇ 상상의 시간
공덕역에서 서강대역에 이르는 '신수·대흥·염리동' 구간은 그야말로 '숲길'이다.
대흥동에 들어서니 입구부터 500m가량 길 양쪽에 왕벚나무와 산벚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다. 불과 두 달 전쯤 벚꽃이 팝콘처럼 폈을 무렵을 상상한다.
염리동에 들어서니 그리 크지 않은 메타세쿼이아가 줄지어 서 있다. 늘씬한 이 나무들이 쑥쑥 자라난 10년 뒤를 상상한다.
서강대역에 가까워져 오니 저 멀리 철길 위에 금빛으로 빛나는 소년·소녀 조형물이 보인다.
소녀는 철로 위에서 양팔을 벌려 중심을 잡으며 아슬아슬하게 걷고, 소년은 철길 위에 엎드려 귀를 대고 기차가 오는 소리를 듣는다.
바로 옆 벤치에 앉아 미소 짓는 노부부가 "얘들아 위험하니 그만 내려와"라고 말했을 것만 같다.
숲길을 따라 줄지어 선 아담한 단층 식당과 상점들이 한껏 분위기를 내고 벤치에 삼삼오오 앉은 주민들이 얘기꽃을 피우는 사이,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작은 카페는 커피의 잔향으로 유혹한다.
순간 깨닫는다. 여기가 도심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 땡땡거리와 연트럴파크
서강대역을 지나니 유독 철길의 흔적이 많다. 일명 '땡땡거리'라 불리던 이곳은 지나는 열차만 없을 뿐 철도 건널목이 옛 모습 그대로다.
홍대 앞 와우교까지 이어지는 이 구간은 음악과 미술로 대표되는 '홍대문화'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국내 인디밴드 1세대들이 연습하던 허름한 창고와 배고픈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많이 남아 있다'는 설명이 붙은 커다란 안내판 위엔 기타를 치는 청년 조형물이 외롭게 앉아 있다.
이어지는 마지막 연남동 구간을 사람들은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비슷하다고 해서 '연트럴파크'라고 부른다.
썩 마음에 드는 별칭은 아니지만, 굳이 공통점을 찾자니 전혀 없진 않다.
평일과 주말 할 것 없이 늘 사람들로 북적이고, 산책이나 조깅하는 주민들, 잔디밭에서 수다를 떠는 젊은이들, 강아지와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다양한 피부색…
여기엔 그 핫하다는 연남동 거리가 붙어 있다.
독특한 감성과 개성을 뿜어내는 레스토랑, 카페, 가게들과 그곳을 분주히 넘나드는 젊음의 에너지가 있다.
또 한 가지 이곳엔 가을이면 온통 거리를 샛노랗게 물들일 은행나무길도 있다.
◇ 기차 타고 유럽으로
끝까지 왔다. 가좌역 인근 연남사거리다. 그런데, 경의선을 다니던 열차가 공원 끝에 전시돼 있다던데…
물어보니 여기가 아니라 반대편이었다. 다시 걸어갈 순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출발점으로 갔다.
효창공원앞역에서 삼각지역 쪽으로 5분쯤 걸어 파란색 화물차 한 칸을 찾아냈다. 이 열차는 '경의선 숲길사랑방'이라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쓰이고 있었다.
경의선은 서울에서 신의주까지만 가는 철도가 아니다. 만주와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까지 연결되는 국제철도의 일부다.
공원에서 해 본 마지막 상상은 이 열차를 타고 유럽까지 가는 거였다.
멈춰선 화물차까지 보고 나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대흥역과 공덕역 사이 구간에서 본 홍금자 시인의 시 '여기 경의선 숲길로 오라'를 떠올렸다.
여기
삶의 속도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길 하나
숨차게 달리던
시간의 행간
이제 탈진한 열차는
푸른 숲길을 만들고
우리들의 발걸음을 머물게 한다
※ 참고 자료
1. '즐겁게 걷길, 경의선 숲길' 경의선숲길 길라잡이(2017, 서울시)
2. 철도폐선부지를 활용한 경의선숲길공원의 만족요인 분석에 관한 연구(2018, 김나은)
3. 도시 재생 선형공원 활성화 요인과 특성(2024, 반항새·이석현)
4. '서울의 공원' 홈페이지(https://parks.seoul.go.kr/template/sub/yongsan.do)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7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fait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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