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스토리 뿌리를 찾아서] 구미호를 악마로 바꾼 북한 애니메이션의 정치적 상상력, '악마를 이긴 억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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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스토리 뿌리를 찾아서] 구미호를 악마로 바꾼 북한 애니메이션의 정치적 상상력, '악마를 이긴 억쇠'

뉴스컬처 2026-07-06 14:51:3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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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북한에서 제작된 인형극 애니메이션 '악마를 이긴 억쇠'는 전통 구미호 설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구미호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재창조된 작품이다. 작품에서 구미호는 사랑과 욕망, 인간과 요괴의 경계를 상징하는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를 파괴하는 절대적 악으로 등장한다. 전통 설화를 사회주의적 영웅담으로 변형한 대표 사례로 평가할 만하다.

작품은 평화로운 '양지마을'이 악마의 출현으로 '그늘마을'이 되는 과정부터 시작된다. 이름의 변화는 공간의 명칭을 넘어 공동체 전체가 공포에 잠식되는 모습을 상징한다. 밝음을 의미하는 양지는 희망을, 그늘은 억압과 두려움을 드러내며 이후 전개될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예고한다.

사진=AI로 생성된 이미지
사진=AI로 생성된 이미지

악마는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정신을 무너뜨리는 존재다. 주민들은 처음에는 저항하지만 계속되는 피해 앞에서 싸움을 포기한다. 결국 젊은이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일상이 된다. 공포가 반복되면서 비극이 관습처럼 굳어지는 모습이 작품 전반에 짙게 깔려 있다.

북한 애니메이션이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영웅 서사는 개인의 뛰어난 능력보다 집단의 의지를 강조한다. 그러나 '악마를 이긴 억쇠'는 출발점에서 한 사람의 용기를 먼저 제시한다. 억쇠는 악마에게 아버지를 잃었지만 복수심보다 공동체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힘을 기른다. 매일 산에서 무술을 연마하는 장면은 북한 문화예술에서 자주 등장하는 '끊임없는 단련'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흥미로운 점은 가족의 배치 방식이다. 부인은 남편을 걱정하며 훈련을 만류하지만 결코 비겁한 인물로 그려지지 않는다. 자신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스스로 악마에게 향하는 장면은 북한 서사에서 이상적인 여성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개인의 생명보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희생정신이 강조된다.

꽃순이 엄마가 악마를 찾아가는 장면은 비극적이면서도 북한 문학과 영화에서 자주 활용되는 집단윤리의 표현이다. 개인이 희생되어 모두를 살리는 이야기는 혁명서사와 항일영웅담에서도 반복된다. 이 작품 역시 가족애를 공동체 정신 속으로 흡수하는 방식을 택한다.

억쇠는 아내를 구한 뒤 마을 사람들에게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고 외친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바로 이 순간 발생한다. 공포에 익숙해졌던 주민들이 스스로 무기를 들기 시작한다. 악마를 무찌르는 과정보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이 더욱 길게 묘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구미호의 약점이 아홉 개의 꼬리라는 설정은 한국 설화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전투 구조를 극적으로 만든다. 억쇠는 꼬리를 하나씩 없애는 대신 한 번에 모두 제거할 방법을 연구한다. 화살 아홉 개를 동시에 발사하도록 활을 개조하는 장면은 무력보다 지혜가 승리를 만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사진=AI로 생성된 이미지
사진=AI로 생성된 이미지

작품에서 악마는 끊임없이 변신한다. 노파가 되어 사람을 속이고, 젊은 여인이 되어 신뢰를 얻으며, 구미호와 불여우의 모습으로 공격한다. 이러한 변신은 외형보다 내면을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을 전달한다. 북한 문화예술에서는 적이 항상 교묘하게 위장한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작품 역시 같은 문법을 따른다.

젊은 여인이 홀로 사는 외딴집 장면은 한국 전통 괴담의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산속 외딴집, 남편을 잃은 여인, 따뜻한 음식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은 관객의 긴장을 잠시 낮춘다. 이어 치마 아래 드러나는 꼬리는 친숙함이 순식간에 공포로 바뀌는 연출을 완성한다. 인형극 특유의 움직임은 이 장면에서 오히려 기괴한 분위기를 강화한다.

구미호가 아홉 마리의 불여우로 변하는 장면은 전통 설화의 신비성과 판타지적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불은 파괴와 공포를 상징하지만 동시에 정화의 의미도 지닌다. 억쇠가 이를 이겨내는 과정은 악을 몰아내는 의례처럼 구성되어 있다. 민속 신앙의 이미지와 영웅담이 자연스럽게 결합된 대목이다.

마지막 대결은 무력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억쇠는 "이 화살은 짐승만 죽인다"는 거짓말로 구미호를 속인다. 악마 역시 속임수를 사용하는 존재였지만 최후에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속아 넘어간다. 지혜와 침착함이 괴력을 넘어서는 장면으로 완성된다.

구미호가 죽자 할미산이 무너지는 결말도 상징성이 크다. 악마의 생명과 공간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설정은 동아시아 설화에서 자주 발견되는 표현이다. 악이 사라지면 그 악이 머물던 세계도 함께 무너진다는 구조를 통해 새로운 질서의 탄생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마을 어르신이 "우리는 악마에게 눌려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고 말하는 장면은 작품의 메시지를 압축한다. 적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오랫동안 이어진 두려움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북한 문화예술이 반복적으로 전달하는 집단적 각성의 의미도 이 대사에 담겨 있다.

북한 3차원 애니 '악마를 이긴 억쇠'. 사진=연합뉴스
북한 3차원 애니 '악마를 이긴 억쇠'. 사진=연합뉴스

작품은 마지막까지 개인 영웅의 승리에 머물지 않는다. 억쇠는 자신만 강해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모든 주민이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공동체 전체가 변화해야 진정한 평화가 유지된다는 사회주의적 가치관이 자연스럽게 서사 속으로 녹아든다.

문화적으로 보면 '악마를 이긴 억쇠'는 한국의 구미호 설화와 북한식 영웅서사가 만난 흥미로운 결과물이다. 남한에서 구미호는 인간을 사랑하거나 인간이 되기를 꿈꾸는 존재로 변화해 왔다. 반면 이 작품의 구미호는 끝까지 악의 화신으로 남는다. 사랑과 비극을 품은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된다. 같은 전통 설화를 공유하면서도 시대와 체제가 달라지면 상상력의 방향 역시 얼마나 크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오늘날 이 작품은 북한 애니메이션의 제작 기법뿐 아니라 설화를 정치적 상징으로 재해석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공포 이야기의 외형을 갖추고 있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괴물을 물리치는 모험보다 공동체의 변화와 집단 정신을 강조하는 데 더 많은 비중을 둔다. 결국 '악마를 이긴 억쇠'는 구미호 전설을 통해 북한 사회가 이상적으로 그리는 인간상과 공동체상을 선명하게 드러낸 정치선동 작품이다.

비록 그 구미호가 상징하는 대상이 어디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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