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마니아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보드게임이 이제는 취미를 넘어 실질적인 수익을 창출하는 새로운 재테크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정판과 희귀 보드게임을 중심으로 중고시장에서 강한 프리미엄이 형성되면서 '플레이도 하고 투자도 하는' 이른바 '보드게임 테크'가 됐다. 코로나19 당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며 급성장한 보드게임 시장은 팬덤과 컬렉터 문화가 정착하면서 희소성이 높은 작품을 중심으로 투자 시장의 성격까지 띠게 됐다.
"보드게임도 정보 싸움"…한정판·선주문 선점이 수익률 좌우
현재 중고 보드게임 시장에서 가격 상승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은 희소성과 검증된 게임성이다. 글로벌 보드게임 평가 사이트인 보드게임긱(BoardGameGeek)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한 작품들은 국내 출시 이후에도 꾸준한 수요가 이어지며 중고시장에서도 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협력형 보드게임의 명작으로 평가받는 '정령섬(Spirit Island)'이다. 높은 게임성과 두터운 팬층을 바탕으로 지난 2025년 국내 보드게임 페스타에서 판매 당시 현장에는 구매 대기줄이 길게 늘어섰고 준비된 물량은 순식간에 완판됐다. 이후 현재까지 재판 계획이 나오지 않으면서 정가 8만9000원이던 제품이 국내 최대 보드게임 커뮤니티인 보드라이프 중고장터에서 최고 48만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여기에 구하기 어려운 프로모션 구성품이나 확장팩을 함께 묶은 패키지는 더욱 높은 프리미엄이 형성되고 있다.
실제 거래 사례에서도 높은 수익률은 확인된다. 세계적인 전략게임으로 평가받는 '브라스 버밍엄(Brass: Birmingham)'은 출시 당시 7만9200원이었지만 1년전 현재는 상태에 따라 15만원에서 최대 30만원까지 거래된다. 고급 재질로 화제를 모았던 '푸에르토리코 SE(Puerto Rico 1897: Special Edition)'는 출시가 25만원에서 현재 48만원 수준까지 올라 두 배 가까운 프리미엄이 붙었다.
또한 '네메시스(Nemesis)'는 정가 15만4000원에서 현재 22만~26만원, '아르낙의 잊혀진 유적(Lost Ruins of Arnak)'은 출시가 13만4000원에서 약 28만원 수준으로 거래되고 있다. 희귀성이 확보된 인기 보드게임은 한번 프리미엄이 형성되면 정가 이하로 가격이 하락하는 경우가 드물어 컬렉터들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실물 자산으로 인식되는 모습이다.
보드게임 투자자들의 전략도 점차 체계화되고 있다. 핵심은 해외 시장에서 먼저 게임성이 검증된 작품을 국내 출시 이전부터 선점하는 것이다. 미국·독일·일본 등 보드게임 선진국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 국내 퍼블리싱 가능성이 높아지면 투자자들은 SNS 알고리즘과 해외 커뮤니티, 전문 유튜브 등을 통해 출시 정보를 빠르게 확보한다.
이후 보드엠, 보드피아 등 국내 퍼블리셔가 텀블벅이나 와디즈 등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통해 한글판 예약 판매를 시작하면 즉시 참여해 초도 물량을 확보한다. 정식 출시 이후 품귀 현상이 발생하면 보드라이프 중고장터나 온라인 거래 플랫폼에서 되팔아 차익을 실현하는 구조다.
동일한 게임을 두 개 이상 구매하는 전략이 대표적이다. 한 개는 직접 플레이하는 소장용으로 개봉하고, 나머지는 미개봉 상태로 보관했다가 시세가 최고점에 도달했을 때 판매하는 방식이다. 여기에 보드게임 페스타나 보드게임콘과 같은 대형 박람회에서 현장 한정 판매 물량을 확보하는 것도 대표적인 투자 전략으로 꼽힌다. 행사장에서는 시중가보다 20~30%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는 경우가 많아 정가 수준으로만 되팔아도 10~20% 수준의 수익을 확보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대학생 이진우(24·남) 씨는 "보드게임 페스타는 신제품을 가장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기회다"며 "인기작은 행사 직후 정가 수준으로만 판매해도 10~20% 정도의 수익을 안정적으로 남길 수 있어 매년 행사 일정에 맞춰 구매 계획을 세운다"고 말했다.
직장인 오윤하(43·남·가명) 씨 역시 보드게임 선주문을 통해 적지 않은 수익을 경험했다. 그는 독일 최대 보드게임 박람회 '에센 슈필(Essen Spiel)'에서 큰 호평을 받은 '아야르(Ayar: Children of the Sun)'의 한정판 예약 판매에 참여해 동일한 제품 세 개를 각각 22만2000원에 구매했다.
이후 본인이 사용할 한 개를 제외한 나머지 두 개를 중고시장에 각각 22만원에 판매했다. 오 씨는 "취미를 즐기면서도 투자금을 대부분 회수할 수 있다는 점이 보드게임 재테크의 가장 큰 매력이다"며 "글로벌 평가가 높거나 국내외 기대작으로 꼽히는 작품은 예약 판매가 끝나는 순간부터 프리미엄이 붙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종이 박스 하나도 자산…보관 상태가 수익률 결정
전문가들은 보드게임 가격이 크게 오르는 이유로 독특한 생산 구조를 꼽는다. 일반 공산품과 달리 보드게임은 책과 유사한 인쇄 공정을 거쳐 제작되며 생산 가능한 공장이 제한적이다. 제작 단가도 높아 대부분 유통사는 사전 주문 물량을 기준으로 최소한의 수량만 생산한다. 추가 생산에 따른 재고 부담이 큰 만큼 공급 부족이 반복되고, 이는 자연스럽게 희소성과 가격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오프라인 보드게임 전문매장 관계자는 "보드게임은 제작비 부담이 커 대부분 초판 물량 위주로 생산이 이뤄진다"며 "재판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아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해지는 구조가 반복된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팬데믹 레거시 시즌1(Pandemic Legacy: Season 1)'이다. 이 게임은 카드를 찢거나 스티커를 붙이는 등 한번 플레이하면 원상 복구가 불가능한 구조여서 다시 즐기려면 새 제품을 구매해야 한다. 이 때문에 국내 대표 유통사인 코리아보드게임즈가 꾸준히 재판을 진행하고 있음에도 재판 공백기에는 중고 가격이 정가의 1.5~3배까지 상승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같은 게임이라도 희소성에 따라 가격 차이는 더욱 벌어진다. 팬데믹 레거시는 블루와 레드 두 가지 패키지로 출시됐는데 최근 재판이 이뤄진 블루 버전은 가격이 안정된 반면 상대적으로 물량이 적었던 레드 버전은 여전히 높은 프리미엄을 유지하며 거래되고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보드게임이 실물 자산인 만큼 보관 리스크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드게임은 크기와 무게가 상당해 충분한 보관 공간이 필요하다. 대부분 외장 박스가 종이 재질이어서 습기나 외부 충격에 매우 취약하다. 박스가 심하게 찌그러지거나 찢어질 경우 상품 가치가 크게 떨어지고, 내부 카드나 말, 토큰 등 컴포넌트가 하나라도 분실되면 거래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
반면 개봉 제품이라도 관리 상태에 따라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사례도 적지 않다. 카드 보호 슬리브를 씌우고, 전용 오거나이저를 활용해 구성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제품은 구매자가 즉시 플레이할 수 있는 편의성을 제공해 컬렉터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오 씨는 "보드게임은 개봉 여부보다 관리 상태가 더 중요할 때도 있다"며 "카드 슬리브 작업과 전용 오거나이저를 갖춰 정리해 놓은 제품은 실사용자들이 오히려 더 선호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이어 "좋아하는 취미를 즐기면서 동시에 자산 가치까지 관리할 수 있다는 점이 보드게임 재테크의 가장 큰 매력이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보드게임 재테크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단순한 투기 목적인 접근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보드게임은 단순한 놀이도구를 넘어 소장 가치를 지닌 하나의 문화적 자산이자 아트워크로 진화하고 있다"며 "글로벌 팬덤이 확고하고 게임성이 검증된 작품일수록 대체 불가능한 희소성을 갖기 때문에 중고 시장에서의 자산 가치는 앞으로도 지속해서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분석했다.
다만 이교수는 "재판 일정이나 퍼블리싱 업체의 공급 정책에 따라 시세가 급등락할 수 있는 리스크가 존재한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며 "보드게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시장 동향 파악이 선행되지 않은 묻지마식 투자는 자칫 장기 재고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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