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고성(高昌故城, Gaochang Ancient City)은 실크로드의 교역 중심지이자 불교 전파의 요지였으며, 현장법사의 설법으로 더욱 유명해진 도시이다. 대부분 폐허로 남아 있지만, 성곽과 여러 유적을 통해 당시의 번영과 불교와 이슬람문화의 교류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날씨가 더워지기 전에 일찍 고창고성을 보러 갔다. 고창성은 499년 한인(漢人) 국문태(麴文泰)가 수립한 나라로 동서 1.4㎞, 남북 1.5㎞, 둘레 5㎞, 성벽의 두께 12m, 높이 11.5m의 고성이자 불교 도시로 한때 3000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한다.
당나라의 현장법사(玄奘法師. 602~664)가 인도로 향하던 길에 설법을 펼친 장소로도 유명하다. 현장(玄奘)은 경장(經藏)·율장(律藏)·논장(論藏)에 능하여 삼장법사(三藏法師)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는 성벽과 궁성터, 대불사터 등이 남아 있다.
당나라의 현장법사(玄藏法師)의 포교당은 온 건물이 흙으로만 되어 있고 나무 한 조각 없다. 현장법사가 장안(長安, 지금의 西安)의 대안탑(大安塔)을 출발하여 인도의 천축국(天竺國)으로 갈 때 당시 36개의 소왕국으로 나누어져 있던 이곳에 들렀는데 그 풍경에 감탄하여 돌아오는 길에 3년을 머물며 불교를 전파하고 경전을 정리했던 곳이다.
☞삼장법사(三장法師)=불교의 경장(經藏·부처의 설법), 율장(律藏·수행자의 규칙), 논장(論藏·경전의 주석)에 모두 정통한 승려를 일컫는 존칭이다. 소설 <서유기> 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당나라의 현장(玄奘) 스님이 대표적이다. 서유기>
고창성은 내성·외성·궁성의 세 부분으로 구분되며 원형의 토성이다. 왕궁과 사원이 자리한 궁성(宮城)은 바닥이 4각이며 벽면은 원형이다. 내성은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이며 외성에는 민가가 자리한다.
교하고성은 자연적 지형을 이용한 언덕 위에 건설되었지만, 고창고성은 평지에 건설된 계획도시이다. 고창국의 수도였으며 불교와 이슬람 문화가 공존한다.
평화를 사랑했지만 불의(不義)한 일에는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무슬림 위구르는 때로 돌궐(突厥)과 때로 몽골, 그리고 청나라와 장렬하게 저항했다. 화려한 문화와 용맹을 자랑했던 이곳에는 이제 토성들만 무심히 남아 있다. 그들의 기상이 사그라지는 토성과 함께 점점 멀어져 가는 모습에 숙연함을 느끼게 된다.
위구르족의 화려했던 과거는 이제 잔해만 남아 있고 그 사이로 말이 끄는 수레(현지말로 馬利車)와 토속상점들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초라한 후손들이 살아간다. 이들이 다시 일어날 날이 올 수 있을까? 국가는 없어져도 민족은 영원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고창고성을 한 바퀴 둘러보고 감회에 젖어 나오는데 한 무리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하며 놀고 있다. 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입구에는 간단한 퍼포먼스(춤추기)로 관광객들에게 관람료를 요구한다. 때 묻은 얼굴, 남루한 의복을 입고 방울을 파는 아이들에게 차마 돈을 주면서 그들의 웃음을 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 음식과 춤사위는 어쩌면 그렇게도 한국의 농무(農舞)와 비슷할까. 어디선가 아빠! 하는 소리가 들려 언뜻 여기가 신강이라는 것을 잊고 우리 애들이 부르는 소리인가 하고 돌아보니, 어떤 아이가 자기 아빠를 부르는 소리다.
신장에서 발견한 우리 문화의 편린
이곳에는 우리 민족과 비슷한 것이 많다. 온돌로 난방을 하는 것이 그것이다. 온돌은 우리 한민족만의 특색이다. 그리고 돼지족발은 마치 장충동 족발을 연상할 만큼 맛과 모양이 흡사하다. 덕수 장(張)씨와 설(雪)씨는 이곳 위구르의 후예들이다. 고려 시대에 색목인(色目人)들이 많이 한반도로 이주하였다.
날씨가 점점 더워진다. 허름한 시골 대로변 식당에서 좀 늦은 점심을 먹고 서둘러서 아스타나(阿斯塔那. Astana) 고분군을 찾아갔다. 위치 북위 42도 51분 31.7초, 동경 89도 31분 49.9초, 해발 고도는 -58m.
아스타나는 위구르어로 ‘영원한 휴식’이라는 뜻이다. 고창성의 귀족들 공동묘지다. 사막의 건조한 날씨 때문에 화장(火葬)을 하지 않고 토장(土葬)을 하면 잘 썩지 않고 그대로 말라버리는 경우가 많다. 육신이 썩지 않으면 영혼이 가는 곳을 몰라 생전의 삶을 간직할 수 있을까?
이곳에서 발굴된 수많은 유물과 미라는 대부분 우루무치(烏魯木齊, 오로목제)의 민속박물관으로 옮겨놓고 이곳은 빈껍데기만 남아있다. 그나만 벽화는 떼어 갈 수 없어서 한 곳만 제대로 볼만했다.
☞아스타나 고분군(Astana Tombs)=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투루판에 있는 고대 가오창국의 귀족 공동묘지다. '영원한 휴식'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건조한 기후 덕분에 미라와 벽화 등이 잘 보존되어 '사막의 박물관'이라 불린다.
아스타나 고분군에 서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
고분은 상인의 묘로 고향 처자를 그리워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두고 온 고향을 못 잊어 자신의 무덤에 고향의 산천과 처자를 그리는 원앙을 새기고 거기에 묻힌 사나이는 누구일까?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이국땅에서 외로운 고혼이 되지 않고 가족과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무덤의 미라를 보며 삶의 무상함과 이승의 삶에 대한 의미를 되새긴다. 인간이 살면 무엇으로 얼마나 이 유구한 자연과 역사 속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인간의 정(情)이 영원할 수 있는가?
사랑이 어더터냐 둥그더냐 모나더냐(사랑이 어떻더냐 둥글더냐 모나더냐)
기더냐 쟈르더냐 밟고 남아 자힐러냐(길더냐 짧더냐 밟고도 남아 잴 수 있더냐)
하그리 긴 줄은 모르되 끝 간 데를 몰라라(하 그리 긴 줄은 모르나 끝 간 데를 모른다)
<이명한(李明漢. 1595 -1645), 악학습령(樂學拾零)에서>이명한(李明漢.>
한가득 상념을 안고 호텔로 돌아오니 기운이 쭉 빠진다. 여행 중에는 피곤하면 쉬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할 때 쉬어야 한다. 오늘은 잔뜩 먹어 영양을 보충하고 내일을 위해 푹 쉬기로 하고 일본 유학생 2명, 월남 유학생 1명과 시내로 나가 괜찮은 음식점으로 보이는 곳에서 저녁을 푸짐하게 먹었다. 양고기는 냄새도 나지 않으면서 매우 부드럽고 맛있다. 우리는 오랜만에(?) 값싸고 푸짐하게 먹었다.
다음 날 느지막이 시내에 나가 화덕에 둥글고 크게 펴서 구운 거무스름하고 딱딱한 ‘낭’이라고 하는 밀가루 빵과 양젖으로 아침을 먹었다. 이곳 사람들은 보통 이것을 양젖이나 양고기 혹은 차와 함께 먹는다.
식사를 하고 회교사원(回敎寺院) 소공탑(蘇公塔)을 찾았다. 현지에서는 에민타(额敏塔) 혹은 보은탑(報恩塔)이라고 부르며, 영어로는 Emin Mosque의 Emin Minaret라고 표기한다.
광활한 사막의 오아시스(綠州)에 올연(兀然)히 건설된 토성(土城)은 옛 위구르(維吾爾)족의 성지이다. 투르크족의 위구르는 11세기 이후 이슬람의 세력이 동진함에 따라 15세기 이후 수니(Sunni)파 이슬람교를 신봉한다.
위구르의 이슬람은 불교의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슬람교가 회교(回敎)나 회회교(回回敎)로 불리게 된 것은 회흘(回紇)·회골(回鶻)이라는 위구르족의 명칭에서 유래한다. 시내 회교 사원에는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고, 입구의 정면에는 “만물에는 주인이 없고, 오직 알라만이 주인이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使徒)이다.[萬物非主, 唯有安拉, 穆罕黙德是眞主而使者]”라고 쓰여 있다.
1778년에 건축된 소공탑은 신강에서는 가장 유명한 이슬람 건축물이다. 아래는 넓고 위로 올라가면서 좁아지는 원추형이며 높이는 37m이다. 아래 직경이 10m이고 흙벽돌로 쌓았으며 15종의 기하학적 도형 문양이 정밀하게 새겨져 있다.
탑 중간에는 크기와 모양이 다른 창문이 14개 있다. 탑 입구 석비 윗면에는 한자와 위구르 문자로 이 탑의 유래가 적혀 있다. 이 탑은 투루판 왕 술라이만이 아버지인 이민(李民)이 준가르의 귀족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공을 기념하기 위해서 건축했다.
이 소공탑에는 매우 아픈 역사가 있다. 청나라 6대 황제 건륭(乾隆. 高宗. 1711~1799, 재위 1735~1795)은 신강 위구르와 티베트, 그리고 옛 몽골 지역까지 차지하기 위한 정복전쟁을 전개했다.
이때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나라는 준가르부(準噶爾部) 혹은 준가르 칸국(準噶爾汗國)이었다. 준가르는 몽골계 오이라트(Oirat) 부족 연맹을 대표하는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이자 중앙아시아 마지막 유목 제국으로 17~18세기에 천산북로와 이리(伊犁) 지역을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그런데 이 지역은 실크로드 교역로의 요충지로 청나라에게 경제적·군사적 가치가 컸다. 이에 청나라는 서북 변경을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 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사막과 초원에 흩어져 있던 80만 정도의 오이라트 준가르는 청나라의 막강한 대규모 군사력을 당할 수 없었다.
건륭제는 1755~1757년 두 차례 대규모 원정을 진행하며 ‘초(剿)’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말은 초멸(剿滅) 즉 “씨를 말리라”는 뜻이다. 이 전쟁으로 오이라트 인구의 약 70만~80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거의 전멸했다는 뜻이다.
역사학자들은 이것을 역사상 가장 잔인한 집단학살(集團殺害, 제노사이드Genocide)이라고 평가한다. 제노사이드는 특정 민족·인종·종교 집단 등을 일부가 아닌 대부분 혹은 전부를 죽이고자 하는 강력한 의도로 진행된 범죄를 의미한다.
☞제노사이드(Genocide)=특정 인종·민족·종교 집단을 말살할 목적으로 자행되는 집단학살을 의미한다. 1944년 법학자 라파엘 렘킨이 고안한 용어로,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범죄 중 하나로 꼽힌다.
청나라는 그 후 신장·티베트·몽골 남서쪽 지역을 청나라 제국으로 편입했고 그것이 지금의 중국 국경과 거의 일치한다. 이 과정에서 건륭은 위구르 아리화탁 왕의 딸이었던 향비(香妃, 본명 容妃 和卓氏. Iparhan. ‘귀한 꽃’)를 포로로 잡아 1759년 북경으로 압송하여 후궁으로 삼았다.
향비는 고향에서의 삶과 전혀 다른 궁중생활을 적응하지 못해했다. 건륭이 신강의 풍미(風味)를 느끼도록 특별 배려를 하며 슬픔과 향수를 위로하려고 했으나 기록에 의하면 1788년에 사망해 건륭의 능인 유릉(裕陵)에 묻혔다. 이와 관련한 많은 전설이 생겼고, 특히 김용(金庸. 1924~2018. 본명 査良鏞)의 <청향비(淸香妃)> 와 이를 소재로 한 <황제의 딸> 등 여러 드라마가 있다. 황제의> 청향비(淸香妃)>
☞향비(香妃)=청나라 건륭제의 후궁으로, 몸에서 천연의 향기가 났다고 전해지는 위구르 출신의 여인이다. 비극적인 삶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수많은 문학 작품과 드라마의 소재가 되었다.
그 후 청나라는 이 지역을 직접 다스리기보다 다민족 통합을 위해 청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는 지역 지도자를 선발하여 자치권을 부여했다. 그 대표인 사람이 에민 호자(額敏和卓, 1694~1777)다. 호자(和卓. Hoja)는 지도자라는 뜻이다. 건륭제는 애민 호자 등의 지도자를 활용해 청 제국의 지배를 강화했다. 그는 위구르 사회의 종교적·사회적 권위를 활용해 청나라 체제와 현지 사회를 이어주는 매개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에민 호자(額敏和卓)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인 소공(蘇公. Sulayman. 생졸미상)이 부친을 기념하기 위해 1777년에 소공탑(에민 미나레)을 건립하기 시작해 1788년에 완공했다. 코발트빛 하늘 아래 올연히 솟은 소공탑에 곁들여진 역사는 잔인하고 슬프다. 신장 위구르와 중국 한족 간의 갈등과 독립의 기운은 그 뿌리가 깊다.
이곳 사람들은 순박하고 착하게 알라를 믿으며 자연과 하나 되어 살았다. 현장법사와 신라의 고증 혜초도 이곳을 지나갔었다. 나도 왔다가 간다.
돌아오는 길에 위구르족 어린이와 사진도 찍었다. 참 순진한 애들이다. 현재도 그 규모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지만 퇴락(頹落)한 모습이다. 매주 금요일에 9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예배에 참여하는데 많은 작은 방들은 좌선을 하는 곳이다. 라마단과 승천(昇天)일에 2번씩 축제가 있다. 문화대혁명 당시에도 민족적 갈등을 염려하여 이곳은 파괴하지 않았다.
☞라마단(Ramadan)=이슬람력에서 아홉 번째 달을 이르는 말로 무슬림들이 해가 떠 있는 동안 금식하며 자기 절제와 기도를 실천하는 신성한 기간이다.
저녁에 투루판에서 최고급인 ‘투루판호텔’에 가서 본 위구르(維吾爾) 민속공연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무희들의 표정은 밝고 발랄하고 몸놀림은 경쾌하고 노래는 목가적(牧歌的)이다. 그들의 낙천적인 삶과 사랑은 이곳의 자연환경의 영향이리라.
호텔에서 자연스럽게 세계 각국에서 온 유학생 및 여행객과 함께 어울렸다. 새벽까지 이국의 청년들과 맥주를 마시며 놀았다. 이국의 학생들과 국제적인 우의를 나누는 것은 무척 재미있다. 그들에게 성의를 다하고 진심으로 대하고 마음을 열면 그들도 나에게 마음을 연다. 정직과 친절이 국제교류에 가장 큰 무기다. 페루의 갈리나는 나를 큰오빠(大哥)라 부르며 맥주 한 잔 따라 준다. 매우 좋다(挺好).
여행을 하면서 내가 익숙한 문화와 다르다고 상대의 문화를 비하하거나 무시하면 상대 문화의 장점을 볼 수 없다. 비록 위구르족 일부가 중국화되어 형식이나 의상이 중국의 사회주의 형식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들은 전통 의상과 사고와 문화를 더 중시하고 있다. 중국정부가 이들에게 자치를 인정하는 이유는 그만큼 문화적·인종적·전통적 이질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제 저녁에 구경했던 투루판 호텔의 민속공연은 그야말로 규격화된 것이었다면 이곳에서 프로를 꿈꾸는 아마추어 예술가들이 표현하는 노래와 공연은 순수한 위구르 문화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현장이었다. 고성능 망원 카메라를 준비하지 못한 게 매우 아쉬웠다.
사막의 여름밤은 향기롭고도 시원하고, 각국의 노래는 추억처럼 이어졌다. 늙으면 여기 와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공기가 맑고 과일 좋다.
여성경제신문 손흥철 전 안양대 교수·중국 태산학술원 객좌교수
chonwangko@naver.com
손흥철 전 안양대 교수·중국 태산학술원 객좌교수
연세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세대학교(원주) 겸임교수, 한국국제대학교 교수, 안양대학교 교양대학 교수(학장), 중국 남경대학 철학계 방문학자 및 율곡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산동성 태산학술원 객좌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녹문 임성주의 삶과 철학> , <중국 고대사상과 제자백가> 등 7권이 있으며 <이정의 신유학> , <정현의 주역> 등 10권의 역서를 냈다. 다산학술문화재단의 <정본 여유당전서> 사업 책임연구원 및 <목민심서> 교감(校勘)에 참여했다. 2015년 율곡학술대상을 수상했으며, 동양철학 및 동서양 철학과 역사를 주제로 한 120편 이상의 전문 학술논문을 발표했다. 목민심서> 정본> 정현의> 이정의> 중국> 녹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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