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호프' 관람 전 나홍진 유니버스 탐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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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호프' 관람 전 나홍진 유니버스 탐험기

엘르 2026-07-05 21:06:41 신고

악은 늘 밖에서 온다

김은형〈한겨레〉 문화부 선임기자. 20여 년간 영화와 드라마를 비롯한 대중문화를 취재하고 비평해 왔으며, 콘텐츠와 시대 관계를 탐구하는 글을 쓰고 있다.


짧은 마감 기한을 앞두고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이렇게 생각했다. 하루 동안 나홍진 감독의 전작 세 편을 다시 보고 다음날 원고 구상을 하면 사흘이면 쓸 수 있겠군. 데뷔 후 18년 동안 연출한 작품이 세 편뿐인 과작 감독이라 얼마나 다행이야. 하지만 잊은 게 있었다. 나홍진 감독의 영화는 하루 한 편 보는 게 보통 사람의 체력과 정신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라는 걸. 2008년 개봉한 직후에도 두세 번은 더 본 〈추격자〉였건만 보면서 경찰서에서 풀려난 지영민(하정우)이 담배 가게에 들어갈 때 중지 버튼을 누르고 싶은 마음을 제어하기 힘들었다. 맥없이 주택가 골목을 헤매는 엄중호(김윤석)의 뒤로 화면을 일그러뜨리는 한여름 낮의 아지랑이처럼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홍진의 작품만큼 보는 이를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영화들이 또 있을까. 이른바 ‘기 빨리는’ 영화들이다. 납치하고 감금하고, 돼지뼈로 때려죽이고, 주인공과 상대방이 사이좋게 얼굴에 피범벅을 하고…. 단순히 센 장면들이 관객을 지치게 하는 건 아니다. 영화 좀 봤다는 사람들은 비명 소리와 피 칠갑만으로 기진맥진해지지 않는다. 때로 피 칠갑을 보면서 낄낄대고 비명 소리를 들으며 졸기도 한다. 정 견디기 힘들면 손쉬운 방법이 있다. 상영관을 나오면 된다. 하지만 나홍진 영화를 보면서는 이게 안 된다. 러닝 타임의 시계열에 맞춰 심신이 차곡차곡 구겨지는 느낌이지만 멈출 수 없다. 뛰쳐나올 수 없다.


두 시간이 훌쩍 넘는 ‘관람 노동’이 끝난다고 속이 뻥 뚫리는 사이다를 손에 쥐는 것도 아니다. 극장을 나오면서 굿즈 대신 챙겨 오는 건 속 답답한 궁금증 한 사발이거나 쓰디쓴 공허감뿐인데 기어이 이렇게 말하고 만다. “다음 영화 언제 나와?” “나홍진은 왜 이렇게 영화 한 편을 오래 만드는 거야?” 이런 관객을 약 올리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긴 시간을 잠적하던 중 마침내 〈호프〉를 제79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공개했다. 〈곡성〉 이후 약 10년 만이다. 오는 7월 15일에는 국내 극장에서도 개봉할 예정이다. 2년 전인 2024년부터 지금까지 연초에 꼽는 그해 최고 관심작은 늘 〈호프〉였다.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 지형도에서 나홍진의 위치는 조금 독특하다. 굳이 분류하자면 나홍진의 이름은 작가주의 대중영화라는 문패를 건 박찬욱과 봉준호의 다음 차례에 놓일 만하다. 사실 ‘작가주의’와 ‘대중영화’는 의미가 충돌하는 형용 모순에 가깝지만, 한국영화를 세계적 위상으로 끌어올린 이 시절 한국영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2004년 제57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그랬고, 2019년 제 7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도 그랬다. 대체로 가난한 작가주의 영화와는 달리 대자본이 들어가고, 스릴러·호러 등 장르영화에서 출발하면서도 작가주의적 취향과 고집으로 장르 문법과 관객의 예상치를 훌쩍 벗어난 지점으로 내달리는 대담함과 창의력. 나홍진의 데뷔작 〈추격자〉가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괴물〉과 많이 비교된 것도 소재의 공통점뿐 아니라 장르를 비트는 이야기 방식, 범인을 잡았어도 패배감 짙은 냉정한 결말 등에서 작가의 인장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나홍진의 세계는 박찬욱이나 봉준호의 세계보다 더 장르적이면서 동시에 더 어둡다. 스릴러와 호러, 액션의 장르적 쾌감은 더 강렬한 고자극이지만 세계관은 훨씬 더 염세적이다. 물론 작가주의 영화에서 악당이 속 시원하게 응징당하거나 갑자기 갱생하는 일이나 착한 주인공이 충분한 보상을 받고 사랑을 쟁취하는 할리우드 엔딩 따위는 벌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홍진의 세계만큼 주인공이 무지하거나 무능하고, 그럼에도 주어진 위기와 싸우는 그들의 처절한 노력이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도 흔치 않다. 이게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라면 모른 척하고 싶을 지경의 이야기들이다. 〈추격자〉와 〈황해〉〈곡성〉, 이 세 작품은 흔히 나홍진의 ‘악의 3부작’이라고 말한다. 그는 독하고 기괴한 악 또는 악당을 세 작품 모두에서 등장시켰다. 악은 한적한 주택가나 세상 평온해 보이는 시골마을, 때로는 보안의 철옹성 같은 고급 호텔 커피숍으로 태연하게 침입해 온다.


나홍진의 영화 세계에서 사악한 존재들은 항상 밖에서 온다. 〈곡성〉처럼 구체적으로 마을 밖에서 온 외지인(쿠니무라 준)의 형태를 띠기도 하지만, 〈추격자〉처럼 익숙한 공간에서 낯선 존재로 출몰하기도 한다. 악의 원인이 내부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추격자〉의 지영민이 희대의 연쇄 살인마가 된 이유를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수사관과 성매매 여성이 지영민의 성불구를 언급하지만, 이는 스쳐 지나가는 단서 중 하나일 뿐이다. 이것만으로 그가 아기였던 조카에게 저지른 잔인한 폭력까지 설명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학대’ 같은 부연 서사가 있었다면 명쾌한 인과관계와 결론, 전망과 대책까지 만들어낸 다음 집으로 돌아가 발 뻗고 잘 수 있겠지만 〈추격자〉는 이 부분을 텅 비워놓음으로써 꿈에 나타날까봐 두려운, 경계도 바닥도 보이지 않는 악을 던져놓는다. 모두가 악한 등장인물로 체계화된 악 또는 악의 공동체를 보여주는 〈황해〉는 어떤가. 살인을 청부하는 이유는 미약하기 짝이 없는 데다 회사 사장부터 평범한 은행원까지 죄책감이나 두려움 없이 살인 청부업자를 찾는다. 돈만 받으면 살인을 마다하지 않는 청부업자와 조폭들은 널렸고, 하다못해 돈 몇백 뜯어내자고 흥신소 직원조차 사람의 목숨을 두고 거짓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살인자가 되기 위해 한국 땅을 밟았던 조선족 김구남(하정우)은 시도도 해보기 전에 피비린내 낭자한 살인 현장의 구경꾼이 됐다가 수많은 살인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리하여 나홍진의 세계에서 악을 예측할 수도, 예방할 수도 없는 불안은 삶의 기본값이 된다. 이 불안을 증폭시키는 요소도 있다. 악과 맞서야 하는 주인공조차 선함이나 유능함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추격자〉에서 엄중호는 한때 경찰이었지만 지금은 성매매로 먹고사는 인물이다. 그는 아파서 하루만 쉬겠다는, 자신이 관리하는 여성을 독촉해 기어이 일을 나서게 하는 악인이다. 그는 지영민이 그 여성들을 다른 업장으로 빼돌렸다고 굳게 믿는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처한 금전적 손해에만 온통 신경이 가 있다. 전직 경찰로서 가진 동물적 감각과 집요한 성격을 통해 사건의 핵심으로 다가가지만 어리석은 믿음에 갇혀 마지막 실마리를 연결하지 못한다.


〈곡성〉의 전종구(곽도원)는 현직 경찰이다. 비교하자면 그는 현직임에도 엄중호보다 무능하다. 불 꺼진 파출소 앞에 여자의 형상이 보이자 혼비백산해 후배 경찰관에게 확인을 떠넘기는 겁쟁이다. 경찰이라기보다 순박한 시골 남자가 딸을 살리기 위해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애틋하지만 답답하다. 소문에 휩쓸려 의심을 쌓고 스스로의 의심에 걸려 넘어지는 주인공은 관객에게 공감대를 끌어내는 게 아니라 무력감을 전염시킨다.

〈황해〉의 김구남은 살인 청부업자다. 그 자신이 연변이라는 외부에서 한국으로 침입한 존재다. 하지만 이유도 모른 채 영화의 대부분을 쫓겨 다닌다.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경찰과 조폭에게 쫓길 뿐 아니라, 그에게 살인 청부를 했던 개 장수 면정학(김윤석)한테도 쫓긴다. 살인을 결심한 조선족, 한국사회가 손쉽게 타자화하고 낙인찍는 침입자가 연약한 존재로 역전될 때 선과 악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의 경계도 지워진다. 안온해 보이는 주택가 골목길과 포근한 시골의 자연은 음험하고 불길한 공간으로 바뀐다. 믿음은 흔들리고 진실은 멀리 사라지며, 무력한 존재만 안쓰럽게 버둥거릴 뿐이다. 나홍진은 인과관계의 고리를 끊고 선과 악의 경계를 지우며 거대한 혼란의 에너지로 혼란을 그려낸다. 한순간도 쉴 틈을 주지 않는 고밀도 플롯에 빠져들어 두 시간 반의 러닝 타임이 ‘순삭’으로 지나가지만, 영화를 보고 나올 때는 새로운 혼란이 관객에게 던져진다. 그렇기에 나홍진의 작품세계는 매혹적인 만큼 논쟁적이다. 특히 〈곡성〉은 현실과 비현실, 기독교와 무속 신앙, 믿음과 의심,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소문들이 소용돌이치듯 뒤섞이면서 혼란의 극대치를 보여준다. 개봉 당시 〈곡성〉이 보여준 모호함과 혼란스러운 스토리텔링은 뜨거운 찬반 논쟁을 일으켰다.


도무지 편하게 넘어가는 구석이 없지만 700만 명 가까운 관객들이 혼란에 기꺼이 빠져들었던 〈곡성〉의 찬반 논쟁은 10년 뒤 칸국제영화제에서 베일을 벗은 〈호프〉로 이어졌다. 고만고만한 자족적 예술영화가 많았던 이번 경쟁 부문에서 〈호프〉는 말 그대로 ‘갑툭튀’였다. 스필버그의 〈듀얼〉을 연상시키는 초반 50분의 꽉 찬 스릴러적 긴장감에 서부극을 연상시키는 총격전과 외계인의 등장까지. 과로와 시차 그리고 졸음과 싸우며 매일 밤 공식 상영을 지키던 전 세계 기자들과 영화인들은 〈호프〉를 보며 ‘잠이 확 깨는’ 체험을 했다. 평가 역시 고만고만한 점수를 받았던 다른 경쟁작과는 달리 홍해 바다처럼 찬반이 갈렸다. 〈가디언〉의 피터 브래드쇼 같은 평론가는 “광란의 외계인과의 싸움은 최고 수준의 오락”이라며 극찬했고, 캐나다의 영화평론가 피터 하월은 “올해 칸의 최대 미스터리는 이런 조잡한 CGI와 허술한 플롯 덩어리가 어떻게 경쟁 부문에 올라왔는가 하는 점”이라고 혹평했다.


7월 15일 국내 개봉 예정인 〈호프〉에서는 나홍진 감독이 누구보다 매혹적으로 펼쳐내는 혼란스러움의 난장이 여전하다. 시간이 명시되지 않은 과거의 어느 시점, 비무장지대의 작은 마을 호포항을 배경으로 한다. 〈곡성〉이 그렇듯 〈호프〉 역시 불길한 기운으로 시작되며, 스크린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더 많은 해석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곡성〉에서 감독이 외지인을 일본인으로 정한 건 기술적인 이유였지만, 많은 관객이 일제강점기의 한국 근대사를 연결시켰듯이 〈호프〉의 마을 곳곳에 빛바랜 채 무심하게 서 있는 반공 구호들은 지금 한국 사회의 그로테스크한 은유로 읽히기도 한다. 칸국제영화제 기자회견에서 한 외국 기자는 영화 초반에 마을을 초토화시킨 괴물과 싸우기 위해 트럭을 타고 이동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5·18에 대한 은유인가?”라고 질문했다. 예상치 못한 장면에서 예상치 못한 해석이 나오게 하는 텍스트의 풍요로움도 여전하다.


하지만 〈호프〉는 나홍진 월드의 새로운 시작이다. 무엇보다 전작 세 편을 잇는 ‘악의 4부작’으로 묶이지 않는다. 새로운 침입자는 그가 전작에서 그렸던 악의 양상과 매우 다르다. 염세주의 한가운데서 잠깐씩 관객을 멈춰 세우던 연민은 감독에게 전보다 큰 관심사가 된 것 같다. 아니, 잘 모르겠다.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요소로 가득한 게 나홍진 월드 아니던가. 칸에서 이 영화를 봤지만 누구보다 국내 개봉을 기다려왔다. 찰리 채플린을 떠올리게 하는 황정민의 신들린 슬랩스틱과 서부극의 주인공이 된 조인성의 격렬한 액션, 차에서 내리는 첫 등장만으로 뤼미에르 대극장의 갈채가 쏟아진 정호연의 카리스마, 그 사이사이 내가 놓친 이야기들을 찾아내고 싶다. 그리고 영화를 본 이들이 쏟아낼 찬성과 반대, 열광과 탄식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나홍진의 〈호프〉는 어쩔 수 없는 올해의 사건이다.



겁은 안으로부터 자란다

김병규 영화평론가. 2018년 영화잡지 〈필로〉 신인영화평론가와 〈씨네21〉 영화평론상에 선정되며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첫 평론집 〈빈손의 영화〉를 펴냈다.


나홍진의 영화는 조금도 논리적이지 않다. 장면들은 비약과 모순으로 채워져 있다. 한 가지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우연이 겹치기도 하고, 공존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서로 다른 세계관의 산물이 아무렇지 않게 뒤섞이기도 한다. 〈추격자〉의 한 장면을 떠올려본다. 무혐의로 풀려난 연쇄 살인마 지영민은 동네 인근의 개미슈퍼에 들러 담배를 산다. 그곳에는 지영민의 집에서 탈출한 김미진(서영희)이 지친 몸으로 먼저 도착해 있다. 신고받은 경찰이 낮잠을 자고 추적 중인 형사가 머뭇거리는 동안 슈퍼에선 미뤄왔던 살인이 벌어진다.


지영민은 마침내 김미진을 살해한다. 몇 장면 뒤에 밝혀지는 일이지만, 심지어 시체를 집에 가져와 잘린 얼굴을 어항에 두고 바라본다. 끔찍한 살인과 악마적인 전시성을 빌려〈추격자〉를 지탱해 오던 날카로운 디테일과 리얼리티는 지워지고 우연의 연속으로 채워진 작위적인 비극이 이곳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이 순간은 영화의 신뢰성을 무너뜨리는 어설픈 장면이 아니라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관객의 마음을 뒤흔드는 감정적 클라이맥스로 다가온다. 말하자면 나홍진은 영화에 담긴 논리적 오류와 작위적인 상황의 연쇄를 수정하거나 극복하려 드는 대신 점점 더 강력한 영화의 무기로 삼고 있으며, 관객 역시 그 무기에 사로잡히기를 원한다. 우연과 비약이 강력한 극적 효과를 자아내는 〈추격자〉의 개미슈퍼와 같은 순간은 나홍진의 영화에 차고 넘친다.


나홍진의 영화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원인과 결과의 불일치, 장르적 규칙과 서사의 비약, 장면과 장면 간에 앞뒤가 맞지 않는 비일관성은 그가 창조한 영화적 세계에서 약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되레 관객이 적극적으로 나홍진의 영화에 뛰어들어 사로잡히는 순간은 영화 속 이야기의 앞뒤가 안 맞는 대목에서 벌어진다. 나홍진은 흥미로운 이야기꾼이지만 그의 영화는 이야기가 정합적으로 들어맞지 않을 때 가장 큰 동력을 얻는다. 어째서일까? 추측건대 나홍진이 다루는 인간에게 주어진 두 가지 특징에서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거칠게 분류한다면 나홍진의 영화에 나오는 인간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죽어도 죽을 수 없는 좀비 상태의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겁에 질려 어린아이처럼 벌벌 떠는 유아적 인간이다. 〈곡성〉에는 죽은 마을 사람이 좀비로 나타나 느닷없이 주인공 일행을 공격하는 장면이 있다. 외지인의 집을 수색하러 온 전종구와 그의 친구들은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면서도 좀비를 물리친다. 좀 황당한 장면이다. 나홍진은 “웃기려고 한 장면”이라고 했지만, 이 장면은 꽤 큰 논란을 일으켰으며, 적잖은 관객과 평자들의 반감을 산 대목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악령을 향한 믿음과 두려움을 다루는 영화에서 갑작스럽게 시체가 되살아나 움직인다는 건 허구를 꾸며내는 규칙의 중복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으로 인해 〈곡성〉의 무대는 신원 없는 악령이 배회하는 종교적 믿음과 두려움의 세계와 죽은 자가 되살아나는 생리학적 공포의 세계가 겹치게 된다.


〈곡성〉은 왜 관객의 몰입이 무너질 수도 있는 치명적 위험을 무릅쓰고 죽은 인간이 살아 움직이는 장면을 넣었을까? “웃기려고 한 장면”이라는 소박한 의도를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 공식적으로 말한 의도와는 달리 이 장면은 나홍진이 어느 때보다 솔직하게 영화적 욕망과 자의식을 드러낸 순간이기 때문이다. 나홍진의 영화는 시체의 영화이며, 차마 감추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낸 시체를 구경하는 영화이자 끝내는 그 시체가 되살아나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려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좀 과장하면 나홍진의 모든 영화는 일정 부분 좀비영화의 속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의 영화에서 시체를 무덤에 묻고 죽은 자를 편히 잠들게 하는 일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황해〉 도입부에서 김구남은 어린 시절 겪었던 동네 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내 나이 열한 살 때 동네에 개병이 돌았다”는 말로 시작되는 그의 내레이션은 한 마리 개의 운명을 따라간다. 김구남의 집에서 키우던 개는 개병에 걸려 처음엔 어미를 물어 죽이고 다음에는 아가리로 죽일 수 있는 건 모두 물어 죽인 뒤, 동네 사람들이 몽둥이로 때려죽이려 하자 달아나버렸다. 며칠 뒤에 삐쩍 마른 꼴로 다시 나타난 개는 김구남의 눈앞에서 천천히 죽었다. 그는 개를 땅에 묻어주었지만 묻힌 개는 밤에 다시 꺼내어져 동네 사람들에게 잡아 먹혔다고 한다.


도입부의 내레이션은 앞으로 벌어질 그의 운명을 전해준다. 김구남은 병든 개다. 모든 것을 물어 죽이려다 끝내 누군가에게 잡아먹힐 이름 없는 개의 운명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말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운명을 가리키는지도 모르는 무지한 자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는 구남이 묻어준 개가 밤중에 꺼내어져 누군가에 의해 잡아먹혔다는 대목이다. 죽은 개는 죽어서도 죽을 수 없다. 무덤에 묻힌 개는 누군가의 손으로 꺼내어져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들어갈 것이다. 〈추격자〉 〈황해〉 〈곡성〉에서 전부 마을과 도심의 연쇄 실종과 살인사건을 소재로 삼은 나홍진은 끊어지지 않고 해결되지 않는 연쇄적 비극의 회로에 갇혀 있고, 그 회로 속에서 죽음은 사건의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죽은 자는 아직 죽은 것이 아니다. 죽었을지라도 살아 있을 때와 다르지 않다. 〈추격자〉의 김미진과 〈황해〉의 김구남은 생존을 위해 이리저리 수단을 찾고 도망쳐 보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그들은 살아 있을 때와 죽었을 때의 취급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두 번 죽는 자들이고, 죽어도 죽을 수 없는 이들이다.

〈추격자〉의 결말에 이르렀을 때, 경찰은 지영민이 거주하던 집 마당에 묻혀 있던 수많은 시체를 수습한다. 그러나 모습을 드러낸 피해자들의 시신은 어떤 안식도 제공하지 않는다. 김미진이 죽고 지영민이 체포된 뒤에 엄중호는 김미진의 딸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돌아온다. 엄중호는 연쇄 살인마 지영민을 물리쳤지만 김미진의 죽음을 막지 못했고, 익명으로 작동하는 도시와 사법 구조 속에서 무엇도 바꿀 수 없는 무기력함과 마주했다. 악은 지워지지 않고 되돌아온다. 도시의 어둠 속에서 다시 악이 모습을 드러낼 때면 살아 있는 김미진의 딸을 보호할 수 없을 것이다. 〈추격자〉의 지영민이 김미진의 잘린 몸을 어항에 두고 전시하던 것처럼 〈황해〉의 면정학은 청부 살인의 증거로 피해자의 엄지손가락을 잘라 오라고 지시한다. 나홍진 영화 속에서 죽음의 증거는 잘려나간 몸이다. 뒤집어 말해 잘려나가지 않은 시체의 몸은 언제든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두려움에 노출돼 있다.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는 세계,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결국 죽음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세계, 무엇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냉소적이고 무기력한 세계. 나홍진의 주인공들은 어떤 모습으로 이 세계를 향해 대처할 수 있을까?


한쪽에 죽어도 죽을 수 없는 좀비의 형체가 있다면, 다른 한쪽엔 죽음이 설명되지 않는 세계 속에서 어린아이처럼 겁에 질린 인간들의 단면이 있다. 앞서 말했듯이 〈추격자〉의 결말에서 주어지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혼자 남겨진 아이를 누가, 어떻게 수습할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이후로 이어진 〈황해〉와 〈곡성〉에서 나홍진의 주인공들이 떠맡은 과업은 가족을 되찾고 수호하는 일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신뢰할 만한 보호자가 돼야 하는 그의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겁에 질려 덜덜 떠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황해〉와 〈곡성〉에서 주인공은 세상의 규칙에 무지한 어린아이이고, 순간마다 달라지는 세상의 조건에 겁에 질린 유년기적 남자들이다. 그들에겐 두 가지 방어기제가 있다. 본능적인 습성이자 자동 반사되는 동물의 반응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황해〉에서 김구남은 살인 청부 대상인 김승현 교수(곽도원)가 사는 건물에 잠입하다가 그만 집에서 나오는 그와 마주치고 만다. 건물 어디에서 나왔는지, 조선족인지 묻는 김승현 교수의 질문에 김구남은 우물쭈물 똑바로 대답하지 못한다. 말이 제대로 안 나온다는 것, 말문이 막힌다는 것, 나의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 이것이 나홍진이 그리는 겁에 질린 인간의 습성이다. 〈황해〉에는 유독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상황이 빈번하게 그려지고, 그때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똑바로 말하지 못한다. 김구남은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말문이 막히는 존재다. 그는 말할 수 없다. 나의 정체성과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남들에게 전달할 수 없다. 〈추격자〉의 엄중호도, 〈곡성〉의 전종구도 자신이 경험한 ‘말이 안 되는’ 사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 하지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들의 말은 헛소리로 치부되고, 합리적이고 명확한 사람들의 판단으로 제지당하기 일쑤다.


말하지 못하는 유년기적 남자들의 또 다른 습성은 꿈을 꾸는 것이다. 그들은 망상에 시달린다. 〈황해〉의 김구남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몸을 섞는 악몽에 사로잡혀 있다. 〈곡성〉의 전종구는 외지인에 대한 공포를 몇 번이나 꿈으로 꾼다. 그들 앞에 당면한 공포는 매번 다른 형국으로 펼쳐지는데, 그것이 세계 앞에 선 어린아이의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관된 죄의식에 사로잡힌 성인이 아니라 겁에 질린 어린아이들이다. 죄의식이 도덕적 준거를 기반으로 논리적 원인과 결과에 기대고 있다면, 겁은 임의적이고 순간적이며 그때마다 다르게 주어지는 생존의 패턴이다. 이것이 나홍진이 복잡한 장르의 양식을 아무렇게나 빌려오고 갑작스럽게 변화하는 서사의 패턴을 놀이기구처럼 다루는 이유다. 그의 영화는 겁을 다룬다. 말로 설명할 수 없고, 남과 공유할 수도 없는 겁에 질린 어린아이는 사방에서 다가오는 모든 신호에 상상력을 투과한다. 죽음이 죽음으로 설명되지 않는 세계에 겁에 질린 어린아이를 데려다 놓는 것, 그 유년기적 인간의 눈앞에 이해 불가능한 현상이 집행되는 광경을 천천히 지켜보게 만드는 것. 이것이 나홍진 영화의 역학이며, 무엇보다 주요한 게임의 규칙이다.


겁먹은 자들의 두려움에는 실체가 없다. 〈곡성〉에서 건강원을 운영하는 마을 친구 덕기(전배수)는 산에 갔다가 외지인이 고라니를 잡아먹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그는 증거가 있다고 말하며 안이 텅 비어 있는 냉장고를 보여준다. 외지인을 본 이후로 자신이 산에 나가지 않는 것이 증거란 말이다. 허무한 농담 같지만, 나홍진의 영화를 압축한 대화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렇듯 나홍진의 유년기적 인물들은 또 다른 욕망을 실행한다. 겁에 질린 그들은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정합적으로 이해되지도 않는 세계를 알고 싶어 하고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모조리 부수고 파괴하고 싶어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좀비와 어린아이의 공통점이 있다. 무지하다는 것이다. 학습받지 못한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에, 세상의 규칙에, 심지어 스스로의 욕망에 무지하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는 상태로 그것을 실행하고 만다. 칸영화제에서 공개된 나홍진의 신작 〈호프〉가 외계인의 침략을 다룬다는 정보가 공개됐을 때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나홍진의 어린아이와 좀비들로 가득한 영화가 될 것이다. 외계인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들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인간에게는 없다. 이 영화가 품고 있을 기묘한 수수께끼와 혼란스러운 반응은 어쩌면 겁에 질린 어린아이의 머릿속과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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