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수당도 못 받고 일하는데, 누군 성과급이 수억이라니요. 부러움을 넘어선 박탈감이 느껴집니다.”
최근 AI 반도체 호황에 따른 일부 대기업의 수억원대 성과급 지급 전망 속에 이를 바라보는 직장인들의 목소리에는 깊은 체념과 무력감이 배어나오고 있다.
이로 인해 사회 전반적인 심리적 박탈감을 자극하고 직업 선택 및 기업 내부 갈등 등의 사회적 문제를 초래하는 만큼,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보상과 분배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공직생활을 시작한 7급 공무원 A씨(39)는 "수억원 성과급은 상상조차 어렵다”며 “시험봐서 힘들게 들어왔고,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일한 건 마찬가지인데, 성과급 차이가 200~400배 이상나니…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AI 반도체 호황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일부 임직원에게 평균 6억원 이상의 성과급이 지급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직장인들의 상대적 박탈감도 커지고 있다.
5일 경기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같은 직장인이라도 산업과 기업에 따라 수백 배의 보상 차이가 벌어지면서, 과거 전문직과 일반 직장인의 임금 격차를 넘어 '성과급 계급사회'가 현실화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삼성 계열사에 재직 중인 직장인 C씨(45)는 “같은 계열사이지만 삼성전자의 성과급 사례를 보고 매우 부러워하고 있다"면서도 “기존에 불투명하고 미흡했던 보상체계가 이번 기회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IT 대기업 종사자인 D씨(41)는 “AI 호황으로 인한 막대한 이윤을 특정 기업과 그곳의 정규직 노동자들만 독점하는 구조가 심각한 사회적 박탈감을 유발한다”고 전했다.
여기에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성과급 격차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깊어질 수 밖에 없다.
중소기업에 재직 중인 B씨(32)는 “성과급은커녕 기본적인 수당도 제대로 챙겨 받지 못하는 입장인데, 기사를 볼 때마다 자괴감이 커지고, 일할 맛도 나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B씨의 하소연은 단순한 감정적 토로가 아니라, 통계로도 뒷받침되는 현실이다. 중소벤처기업연구원의 '대·중소기업 간 임금격차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대기업의 월평균 임금총액은 632만3천원으로 중소기업(336만2천원)의 약 1.9배에 달했다.
격차는 성과급과 상여금 등 특별급여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대기업의 월평균 특별급여는 119만5천원인 반면 중소기업은 20만8천원으로 대기업의 17.4% 수준에 그쳤다. 이런 격차는 세대 간 위계마저 뒤흔든다. 대기업 29세 이하 근로자의 월평균 특별급여(55만2천원)는 중소기업 40대(31만6천원)와 50대(28만2천원)보다 많았다.
노민선 중기연 연구위원은 "대·중소기업 간 임금격차는 주로 성과급, 상여금 등 특별급여의 과도한 차이에 기인한다"고 설명했다.
우선 이러한 상대적 박탈감의 배경으로 큰 임금 차이와 심리·사회적 요인이 손꼽힌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사람들은 일론 머스크처럼 재벌 총수나 세계적인 부호와 자신을 직접 비교하지 않는다"며 "하지만 같은 세대의 직장인들이 수억원의 성과급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되면 상대적 박탈감이 강해진다"고 말했다.
곽 교수는 한국 사회 특유의 집단주의 문화도 이러한 현상을 심화시키는 원인으로 지목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체면'과 '눈치' 문화가 발달한 한국인은 타인과의 비교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곽 교수는 또 "과거에는 다른 사람의 연봉을 알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SNS와 직장인 커뮤니티를 통해 타인의 경제적 성취를 실시간으로 접하게 된다"며 "반복적인 비교는 무력감과 자존감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의견은 경제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AI 시대의 성과급 격차를 단순히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의 차이로만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양준구 가톨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국내 기업이나 노동자의 특별한 노력만으로 일궈낸 성과라고 보기는 어렵다"며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반도체 업계는 수요 부족으로 적자를 걱정하던 상황이었지만, 미국의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가 폭발적인 반도체 수요를 만들었고 우리나라가 이미 구축해 놓은 반도체 인프라와 맞물리면서 지금의 대호황이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격차가 고연봉 직장 인재 쏠림으로 인한 청년 실업 심화, 기업 내부 갈등, 과도한 성과급으로 인한 투자 위축 등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구균철 경기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도 ‘기존 경제학으로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운 새로운 분배 문제의 시작’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임금이 노동생산성에 따라 결정된다는 전통적인 경제학 이론으로도 지금과 같은 임금 격차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며 "AI 호황으로 발생한 반도체 업계의 막대한 횡재이윤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는 사회 전체가 처음 마주하는 과제"라고 말했다.
이어 "단순한 부러움을 넘어 상대적 박탈감이 사회 전반의 신뢰와 노동시장, 기업 문화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만큼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보상과 분배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며 "지금 필요한 것은 기존의 분배 논리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담아낼 새로운 상상력"이라고 강조했다.
Copyright ⓒ 경기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