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말, 제주 초토화 작전 당시 군은 민간인 서북청년단원들을 모아 군대에 편입시켜 특별중대를 만들었다. 이들은 헌병대로부터도 간섭을 받지 않을 정도로 초법적 권한을 지녔다. 사람을 잡아 고문했고 즉결 처형했다. <순이삼촌>의 배경이 되는 1949년 1월 17일의 북촌리 집단학살도 이들의 짓이었다. 무장대의 습격으로 군인 두 명이 사망한 걸 빌미 삼아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 3백 명을 몇 시간 만에 살해한다. 다음 날에도 백 명을 죽인다. 그들은, 아마 '참교육'했다고 여겼을 거다.
아무런 제한 없이 학생을 지도할 수 있는 교권보호국의 활약을 담은 드라마 <참교육>은 참담하다. 내게 저 참교육이란 말은 어찌 다가왔는가. 중고등학교에 페미니즘을 주제로 강연을 하고 나면 이상한 계정의 메일이 오곤 하는데 그 제목과 내용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단어가 바로 저 단어다. 한 번만 더 여성이 차별받고 어쩌고라고 말하면 참교육 당할 줄 알아라, 이렇게 말이다. 교권 보호를 누가 부정하겠는가. 그 방법이란 게, 모든 폭력의 현장에 반드시 존재하는 논리니까 답답할 뿐이다.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문도 다시 보면 이 문장 하나다. "종북좌파 세력들을 일거에 참교육하겠다!"
잘못을 했으면 맞아야지, 그 이유로 너무 많이 맞았다. 그 이유로 사람을 때리는 사람을 너무 많이 보았다. 이유는 조금도 납득되지 않는 것들이다. 두발 제한 3센티미터(cm)를 0.5cm 어겼다고 무진장 맞았다. 학급 평균이 다른 반보다 낮다는 이유로, 전체가 맞았다. 7시 등교 시간에 1분 늦었다고 죽도록 맞았다. 다행히 2분 늦은 친구보다는 덜 맞았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모습이 아니다. 호돌이가 등장하고도 몇 년이 지난 1990년대 이야기다.
시대가 무식했던지라, 그때는 저런 이유에 수긍하며 툴툴 털고 일어나고는 했다. 하지만 이유도 모르고 맞는 건 정말 슬펐다. 경험한 체벌의 절반은, 그냥 맞았다. 본인 기분 나쁘다고 말이다. 홧김에, 교사가 사람을 때려도 되는 그런 시대였다. 웃긴 거, 그러면서 왜 맞는지 아냐고 묻는다는 거다. 모른다고 하면 알 때까지 때린다. 무서워서 별수 없이 안다고 하면 알면 맞아야 한단다. 교사와 학생의 이 아니다. 학생들 사이의 폭력도 문법은 동일했다. "잘못했지? 그럼 맞아!
가정폭력도 같다. 네가 잘못했으니, 나는 때린다. 남편이 아내를, 부모가 아이를 때린다. 요즘 말로 참교육이었던 거다. 토벌대도 그랬다. 통행금지를 어겼다고, 도피자 가족이라고, 누군가를 숨겨줬다는 의심만으로도 마을 하나를 통째로 불태웠다. 가해자들의 논리는 한결같았다. 이 정도는 해야 정신을 차린다, 본보기를 보여야 다시는 그런 짓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맞아야 정신 차린다는 흔하고 흔한 가벼운 논리를 앞세우며.
너무나 화가 나는 건, 이 가해자들이 지금 말하고 있다는 거다. 체벌이 사라져서 학교가 개판이 되었다, 요즘 아이들은 맞질 않아서 저 모양이라면서 말이다. 황당한 건, 피해자 중에도 동조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는 거다. 심지어, 그 시절을 동경하고 가해자를 그리워한다. 그러니 가해자는 본인을 정말로 스승이었다고 착각한다. 본인 기분대로 폭력을 정의하고 행사한들 조금도 반성하지 않아도 되는 운 좋은 시대를 살았던 인간이, 교권이 무너졌다며 가슴을 친다.
존중 받을 과거조차 부정당할 것인가
사과를 해야 하는 시대가, 사과 없이 물러간다. 더 이상 체벌을 하지 않는 학교의 모습은, 지금까지의 체벌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데 그게 없었다. 그러니, 체벌을 못해서 이 지경이라는 멍청한 분석이 난무한다. 인권교육이 학교를 망쳤다는 말까지 한다. 인권의 인자도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사람이.
사회 곳곳이 이렇다. 더 이상 성차별을 하지 않겠다는 조직이라면, 지금까지의 성별 고정관념이 얼마나 지독했는지를 군말 없이 받아들이고 부끄러워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걸 안 한다. 그러니, 요즈음은 세상이 무서워서 아무 말이나 하면 안 된다는 괴상한 다짐이 분출된다. 아무 말을 그 자체로 하지 않으면 되는데 그 간단한 결심조차 억울하다고 생각하니, 그걸 못 하게 하는 세상을 끌어들인다. 그러다 성평등을 '조장하는' 인간들 때문에 남자만 애꿎게 혼난다며 난리다. 성평등을 그럼 조장해야지, 성차별을 다시 조장하자는 말인가.
정치판은 징그럽다. 1970~80년대 대학가에서나 통하던 문법, 단어가 더 이상 실효성이 없다고 곳곳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그들은 무시한다. 아직도 그때의 서열에 빠져있고, 그때의 대자보를 기억하고, 그때의 화염병을 제작한다. 진영의 언어로 적을 특정하지 말자고 해도 그들은 무시한다. 자기들끼리 누가 진짜고 가짜인지를 가린다며 멸칭을 남발한다. 그러만 정치에 대한 냉소가 사회 전반적으로 짙어질 거라며 우려해도, 그들은 무시한다. 과거에 악랄한 거대 권력을 풍자하며 느꼈던 조롱의 쾌감을, 빈정거림의 희열에서 벗어나질 못해서다. 그래서 그 짓을 권력이 지닌 상태에서도 반복한다.
그 순간, 누구도 이들을 존중하지 않는다.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라는 이 간단한 시대의 목소리조차 부정하니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는 과거조차 논쟁거리가 된다. 한때의 투쟁을 우려먹기만 한다는 해석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심지어 87년 6월 이후에 대학에 입학한 이들은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한 바가 없다는 비판도 꿈틀거린다. 역사를 딱 끊어서 이해하는 건 잘못된 분석이지만, 이미 배신감을 느낀 이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고집도 이런 고집이 없다
축구판도 이 지경이다. 모두가 감독 선임이 공정하지 않다고 여기는데, 그들끼리 공정했다고 믿는 모습에서 조직의 속성은 다 드러났다. 그 난리 속에 지휘봉을 잡은 국가대표 감독은, 그 난리가 무엇인지 관심이 없었나 보다. 누가 무엇이라 하든 말든, 원래 하던 대로 한다. 고집도 이런 고집이 없다. 과거에 머물러야지만 가능하다. 머무르는 수준이 아니다. 과거가 옳고 현재가 틀렸다는 확신 없이는 불가능하다.
과거의 색깔을 지우고, 과거의 문법에서 벗어나자는 건 그 세대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과거의 한계를 인정하라는 건, 세대를 없애려는 게 아니다. 절호의 기회를 잡으라는 사회의 신호다. 마무리를 잘할 수 있는 기회 말이다. 멋지게 퇴장할 타이밍을 놓치지 말라는 거다. 이를 "그런다고 내가 쫄 줄 아냐"면서 무시를 했던 사람이 바로 가정폭력 가해자인 아버지였고, 체벌 옹호자인 교사였다. 진영에 매몰된 정치인과 평론가 그리고 이들 지지자의 지금 모습이기도 다.
머리 한번 긁적거리면서 다시는 그러지 않도록 노력하면 될 일인데, 이 간단한 걸 그들은 하지 않는다. 나는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려고 우주의 기운을 끌어당겨 자신을 정당화하기 바쁘다. 과거를 성찰하는 걸 굴욕, 모욕, 존재의 부정으로 과대 해석하며 조금도 굽히지 않는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며 사과도 하지 않고, 물러나지도 않는다. 별 수 없다. 이제 꺼낼 수밖에 없다. 레드카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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