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락] “저는 이 두 분을 국가 영웅, 또는 국민 영웅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이며 한 말이다.
반도체·AI·데이터센터를 축으로 한 비수도권 대규모 투자 계획이 발표된 직후였다.
그러나 환호가 채 가시기도 전에, 기업들은 공시를 통해 조용히 선을 그었다. 수조 원대 투자 선언 뒤에는 ‘가이드라인’이라는 단서가 따라붙었다.
더욱이 기업들이 제시한 청사진 상당수는 중장기 구상에 가까운 만큼, 향후 실제 집행 과정에서 속도와 범위, 우선순위는 시장 환경과 제도 정비 수준에 따라 달라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
정치적 상징성과 산업적 실효성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좁히느냐도 관건으로 꼽힌다.
<뉴스락>뉴스락>은 삼성·SK의 비수도권 투자 구상과 그 과제를 짚어본다.
1500조 메가프로젝트 시동...삼성·SK, 비수도권 투자 닻 올렸다
수도권에 쏠렸던 대한민국 첨단산업의 생산 지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정부가 반도체·피지컬 AI·AI 데이터센터를 축으로 한 '3대 메가프로젝트'를 공식화하고, 삼성과 SK가 광주·충청·영남을 중심으로 한 비수도권 투자 로드맵을 내놓으면서다.
정부와 주요 기업들은 지난달 2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를 열고 역대 최대 규모의 민관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반도체, 피지컬 인공지능(AI), AI 데이터센터를 3대 성장축으로 삼아 광주를 비롯한 서남권과 충청, 영남 지역에 새로운 산업 거점을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삼성그룹과 SK그룹의 중장기 투자 계획까지 합산하면 전체 투자 규모는 4755조원에 달한다.
이번 전략의 무게중심은 반도체 인프라의 전국적 분산과 서남권 초대형 클러스터 구축에 맞춰져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서남권에 각각 2기씩 총 4기의 초대형 메모리 팹을 신설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새로운 반도체 단지를 준비해야 할 시점이 앞당겨졌다"며 "여러 지역 중 전력과 용수, 인력 확보와 인프라 지원이 기대되는 광주를 후보지로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역시 "계속될 메모리 공급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새로운 생산기반을 만들 필요성이 있다"며 "서남권에 약 400조원을 투자해 새로운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AI 데이터센터에 약 1000조원, 반도체 확장 프로젝트에 약 1100조원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은 30일 광주에서 열린 별도 보고회를 통해 호남 지역에만 총 425조원을 투자하는 구체적인 청사진을 공개했다.
신규 반도체 팹 건설은 물론, 전남 해남 솔라시도에 2028년 가동을 목표로 210MW급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한다.
SK그룹은 전국 단위의 AI 인프라 확충과 차세대 반도체 패키징 역량 강화에 집중한다. 총 1000조원 규모의 AI 데이터센터 구축을 목표로 1단계 5GW에서 2035년까지 15GW 규모로 시설을 순차 확대할 방침이다.
정부는 차세대 첨단산업의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 파격적인 행정 및 인프라 지원을 약속했다.
'3S(속도·거점·선도) 전략'과 총력지원인 '1F' 전략을 가동해 인허가와 용지 확보 절차를 대폭 단축한다.
특히 최대 난제로 꼽히는 전력 수급 문제 해결을 위해 지역에서 생산한 전기를 해당 지역에서 소비하는 '지산지소(地産地消)' 원칙을 적용하고, 지방 투자 기업에 대한 전력요금 메리트를 제공해 기업의 투자 환경을 뒷받침할 계획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광주·전남 지역에 추가 공장을 설치할 경우 전력요금에 확실한 메리트가 생기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반도체특별법에 명시된 지방 우선 지원 조항을 바탕으로 기업의 투자 환경을 전폭적으로 뒷받침하겠다”고 덧붙였다.
첨단산업 거점 '동상이몽'...삼성·SK "가이드라인일 뿐" 선 긋기
정부가 비수도권 첨단산업 거점 조성 계획을 발표했지만, 필수 인프라 부족과 노사 리스크 등 현장 우려가 잇따르고 있다.
반도체 팹 입지는 전력과 용수 공급은 물론 석·박사급 우수인력과 수백 개 협력사가 함께 맞물려야 하는 복합적 사안이다.
최근 논의되는 비수도권 입지가 산업적 타당성보다 정치적 상징성에 치우쳤다는 비판이 정치권에서 제기됐다.
한동훈 무소속 의원은 "대통령이 총수를 압박해 결정하면 '예' 하고 따라야 하는 것이냐"며 "강압에 굴복한 총수들이 동의하면 정부는 기업이 자발적으로 투자를 결정했다고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 역시 "정치권의 압박에 의한 투자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산업적 타당성에 대한 우려가 나온다.
문송천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는 <뉴스락> 과의 통화에서 "현재 논의되는 광주·서남권 입지는 반도체 클러스터 필수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며, 이대로 진행될 경우 과잉 투자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뉴스락>
문 교수는 "현재의 반도체 호황은 AI 붐에 기인한 것인데, 과거 인터넷 버블 등 IT 붐이 5년 이상 지속된 적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사이클 역시 5년 내에 꺼질 가능성이 크다"며 "이러한 산업 주기를 고려할 때 현재의 대규모 입지 조성은 여러모로 무리한 추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지 노사 관계의 불확실성도 향후 기업 입주 시 주요 리스크로 꼽힌다.
'광주형 일자리' 모델로 출범한 광주글로벌모터스(GGM)는 설립 당시 누적 생산 35만대 달성 전까지 상생협의회로 노동 조건을 정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금속노조 산하 지회 설립 이후 노조 측이 동종업계 수준의 임금 인상과 호봉제 도입을 요구하며 파업을 예고하는 등 사측과 마찰을 빚고 있다.
수도권 외곽으로 이전하는 첨단 기업들 역시 조업 불확실성에 노출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인프라 부족과 노사 문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경제계와 산업 현장에서는 섣부른 추진보다 철저한 사전 준비가 선행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6단체는 공동 성명을 내고 "투자가 차질 없이 집행될 수 있도록 전력, 용수, 부지 등 필수 인프라와 제도적 기반을 적기에 지원해 줄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삼성전자 초기업노동조합은 "라인 하나를 가동하는 데 부지 선정, 전력, 용수 등 인프라 확보에 최소 5년 이상 걸리는 긴 여정"이라며 "조급함보다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며, 정부와 회사, 노조가 모이는 노사정 협의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들 역시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인프라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뉴스락> 과의 통화에서 "폭발적인 반도체 수요 확대로 인해 포스트 용인의 선정을 서둘러야 할 상황"이라며 "용지, 전력, 용수, 폐수 시설 등 인프라 확보가 필요한 상황이고 정부 및 지자체와 함께 역량을 모아 단계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뉴스락>
SK하이닉스 관계자는 "투자의 큰 방향은 정해졌지만 부지 선정과 인프라 구축 등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안이라 현재 내부 검토를 진행 중인 단계"라고 밝혔다.
이어 "대형 팹을 위한 대규모 부지, 전력, 용수, 인력, 정주 요건 확보와 시장 수요 증가가 전제돼야 한다"며 "향후 수요에 따라 규모와 일정 등이 달라질 수 있어 단계적으로 준비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논란이 가중되자 기업들은 공시를 통해 이번 투자 계획이 확정된 사안이 아님을 명확히 했다.
삼성전자는 2450조원 규모의 장기 투자계획 공시를 정정하며 해당 수치가 가이드라인일 뿐 향후 경영 환경 변화에 따라 변동될 수 있다고 명시했다.
SK하이닉스 역시 중장기 투자 계획은 이해를 돕기 위한 가이드라인으로, 시장 상황과 경영 환경 변화에 따라 변동될 수 있다고 밝혔다.
지방 반도체 팹 4기 시동...협력사 이전이 '진짜 숙제'
비수도권 반도체 클러스터의 성패가 장비·소재·부품(소부장) 생태계의 동반 이전에 달렸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삼성전자는 7년, SK하이닉스는 12년이나 조기 생산에 들어갈 계획”이라며 “용인 클러스터만으로는 미래의 글로벌 수요와 경쟁에 충분히 대응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추가 생산 거점 확보를 검토해 왔다”고 밝혔다.
대만 TSMC가 북부 신주과학단지에서 약 230㎞ 떨어진 남부 가오슝으로 생산 거점을 확대한 사례를 언급하며, 용인과 광주의 거리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정부의 접근 방식이 효율성을 간과한 채 정치적 논리에 치우쳐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문송천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는 “현재 거론되는 지역들은 필수 인프라가 충분히 갖춰져 있지 않다”며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의 사례만 보더라도 산업적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삼지, 핵심 산업을 국가 균형 발전이라는 정치적 명목으로 무리하게 분산시키지 않는다”고 짚었다.
또한 “반도체 산업 입지에 지역 균형 발전 논리를 내세우는 것은 전형적인 정치 카드로, 산업적 타당성을 찾기 힘든 접근”이라고 비판했다.
업계의 시선 역시 팹(Fab) 유치 자체보다 클러스터의 완성도에 쏠려 있다.
현재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원익IPS와 솔브레인 등 주요 소부장 기업 29곳이 입주를 확정해 분양률 83%를 넘긴 상태다. 비수도권 신규 거점도 이런 집적 구조를 얼마나 빠르게 재현하느냐가 핵심 경쟁력으로 꼽힌다.
하지만 비수도권에서 단기간에 생태계를 구축하기는 현실적인 장벽이 높다. 반도체 장비 및 소재 기업들은 고객사와의 거리, 유지보수 대응 속도, 엔지니어 상주 체계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문송천 교수는 “비수도권에 용인과 같은 소부장 집적 단지를 조성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며 “더욱이 막대한 인프라 조성 비용을 기업들이 온전히 감당하거나 향후 수익으로 충당하겠다는 계획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우려했다.
정치권에서도 지원책의 구체성을 두고 공방이 이어졌다.
고동진 국민의힘 의원은 입장문을 통해 “전력과 용수 인프라에 대한 구체적인 이행방안이 전무하다”며 “현 기준에서 합리적인 관점에서 따져보자면 향후 반도체 투자의 일정과 세부 투자 근거는 지금까지 명확히 결정된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
반면 정부는 기반 시설 지원과 인허가 협력에 속도를 내겠다는 방침이다.
최근 입법예고된 반도체 특별법 시행령 제정안에는 비수도권 클러스터 우대, 전력·용수·도로 등 기반시설 설치비 50% 이상 지원, 국가 중요 시설에 대한 최대 100% 국비 부담 근거가 담겼다.
김정관 장관은 “이제 중요한 것은 기업이 미래를 내다보고 내린 전략적 결정을 성공으로 연결시키는 일”이라며 “정부는 기업이 계획한 투자가 차질 없이 추진될 수 있도록 모든 기반 시설을 신속히 지원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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