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인물열전] (27) '만델라의 위대한 동지이자 친구' OR 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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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인물열전] (27) '만델라의 위대한 동지이자 친구' OR 탐보

연합뉴스 2026-07-04 08:00:0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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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르트헤이트 맞서 아프리카민족회의 이끌어…외교 대응·무장투쟁 지휘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인근 OR탐보 국제공항 출국장에 세워진 올리버 레지널드 탐보 전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총재의 동상 [촬영 나확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인근 OR탐보 국제공항 출국장에 세워진 올리버 레지널드 탐보 전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총재의 동상 [촬영 나확진]

(요하네스버그=연합뉴스) 나확진 특파원 =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요하네스버그 공항에 도착해 출국장으로 나오면 손을 들고 반기는 한 남성의 2.5m 높이 동상을 볼 수 있다.

얼핏 남아공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인가 생각이 들 수 있지만, 다가가 살펴보면 이 동상의 주인공은 올리버 레지널드(OR) 탐보 전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총재다.

실제 요하네스버그 공항도 20년 전부터 공식 명칭이 'OR 탐보 국제공항'이다.

이처럼 남아공에서 만나는 첫 인물로 기리는 탐보는 만델라의 가장 가까운 동지이자, ANC를 30년 가까이 해외에서 이끌며 남아공 백인 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흑인 분리·차별 정책)와 싸운 지도자다.

만델라가 로벤섬 감옥에서 27년을 보내는 동안 탐보는 영국 런던과 아프리카 각국을 오가며 ANC의 사령관 역할을 맡았다.

그는 세계 각국 정부와 유엔, 시민단체를 설득해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대한 국제적 고립과 경제 제재를 끌어냈고, ANC가 무너지지 않도록 조직을 유지했다.

탐보는 만델라보다 한 해 빠른 1917년 남아공 이스턴케이프의 작은 마을 은칸톨로에서 태어났다.

1991년 기자회견에 함께 자리한 올리버 레지널드 탐보(왼쪽)와 넬슨 만델라(오른쪽)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1991년 기자회견에 함께 자리한 올리버 레지널드 탐보(왼쪽)와 넬슨 만델라(오른쪽)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그는 만델라 보다 한 해 먼저 포트헤어 대학에 진학했고, 그곳에서 이듬해 입학한 만델라를 처음 만났다. 그리고 구체적 경위는 달랐지만, 두 사람 모두 학생 자치와 관련한 이유로 학교 당국의 징계를 받고 학교를 떠났다.

이후 요하네스버그에서 교사로 일하던 그는 부동산 중개업을 하던 월터 시술루를 통해 만델라를 다시 만나게 됐고, 세 사람은 1944년 'ANC 청년동맹'(ANCYL)을 창설했다. 당시 탐보는 서기를 맡아 조직의 실무를 책임졌다.

이후 통신 과정으로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탐보와 만델라는 1952년 요하네스버그에서 남아공 최초의 흑인 법률사무소인 '만델라 앤드 탐보'를 열었다.

인종차별에 시달리던 흑인들은 이 사무실을 찾아와 법률 상담을 받았고, 두 젊은 변호사는 법정 안팎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와 맞섰다.

1960년 경찰이 69명의 비무장 흑인 시위군중을 사살한 샤프빌 학살사건이 벌어지고 정부가 ANC를 불법단체로 규정하면서, ANC는 탐보를 해외로 파견했다. 원래는 몇 달 일정이었지만 탐보의 귀국은 30년 뒤에야 가능했다.

탐보는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니에레레,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등 아프리카 독립 지도자들을 만나 ANC에 대한 지지를 확보했다. 이후 런던을 거점으로 유럽과 북미를 돌며 ANC를 대표했다.

그의 외교적 노력은 유엔의 대(對)남아공 결의안, 국제 스포츠 보이콧, 경제 제재, 문화 교류 중단 등으로 이어졌다. 결국 백인 정권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중요한 압박 수단이 됐다.

후일 만델라는 그의 자서전에서 "1960년 ANC가 탐보를 해외로 보내 외부에서 투쟁을 전개하도록 한 것은 ANC가 내린 가장 훌륭한 결정의 하나였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1967년 ANC 총재였던 앨버트 루툴리가 사망하자 탐보는 ANC 총재 권한대행이 됐다. 이후 ANC의 무장투쟁을 수행하는 게릴라 부대 조직과 운영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델라는 1985년 ANC가 폭력 노선을 포기하면 석방하겠다는 정부의 제안을 받고 "탐보는 나에게 형제 이상이고, 거의 50년간 함께 한 위대한 동지이자 친구"라며 "누구보다 나의 자유를 바라는 이가 탐보이고 내 자유를 위해서는 생명도 내줄 사람임을 알지만, 그와 나의 견해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며 석방을 거부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탐보는 1990년 ANC가 합법화된 이후에야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뇌졸중과 그 후유증으로 직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하기 어려운 상태였고 이듬해 만델라에게 ANC 총재직을 넘기며 특별직인 전국의장에 취임했다.

탐보는 결국 선거를 통한 남아공 첫 흑인 정부의 출범을 보지 못하고 1993년 4월 24일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탐보는 만델라처럼 대중 앞에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연설가는 아니었다. 대신 그는 상대의 의견을 끝까지 듣고 합의를 끌어내는 지도자로 알려졌다.

아프리카 남아프리카공화국 지도 아프리카 남아프리카공화국 지도

[제작 양진규]

이런 그를 남아공 정부는 지금까지 국가적 지도자로 기리고 있다.

2002년 제정된 남아공과 우호 관계 증진에 기여한 외국인에게 수여되는 훈장은 'OR 탐보 동지 훈장'으로 명명됐고, 2006년 요하네스버그 국제 공항을 현재 명칭인 OR탐보 국제공항으로 변경했다.

2017년에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남아공 정부는 여러 추모행사를 열었다. 제이컵 주마 당시 대통령은 "언제나 합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지도자"라고 추모했다.

올해 3월 남아공 정부는 더반 에테퀴니에 만델라와 탐보 두 지도자의 10m 높이 동상을 함께 제막했다.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은 제막식에서 이들 두 사람에 대해 "거의 30년에 걸쳐 서로 다른 곳에서 떨어져 지내야 했지만, 끝까지 같은 대의를 위해 헌신했다"고 평가했다. 또 "그들은 같은 자유를 위한 투쟁을 벌였고, 같은 미래를 향한 비전을 품었다"며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주인이 되고 국민이 통치하는 남아공이라는 비전을 함께 만들어 갔다"고 헌사를 올렸다.

이어 "만델라와 탐보는 다양성을 존중한 지도자였고, 인종차별과 부족주의, 그리고 성차별에 맞서 평생을 바쳤으며, 모든 분열을 극복하고자 했다"고 기렸다.

ra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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