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마트 우유 매대의 냉장 진열대는 여전히 국산 흰우유의 자리다. '소화가 잘되는 우유'와 '락토프리', 'A2' 같은 프리미엄 라벨을 단 국산 신선우유가 서리 낀 냉장고를 촘촘하게 채우고 있고, 매대 한편에는 국내 유업체가 만든 상온용 멸균우유도 함께 놓인다.
그러나 소비자의 손이 향하는 지점은 이 매대 앞에서만 갈리지 않는다. 한 달 넘게 바다를 건너온 폴란드 · 독일산 멸균우유가 온라인 최저가와 카페 · 베이커리 발주창을 파고들면서, 우유 한 잔이 소비자에게 닿는 '거리' 자체가 두 갈래로 벌어지고 있다.
빗장이 풀린 탓이다. 지난 1월 미국산에 이어 이달 1일부로 유럽연합(EU)산 멸균유의 관세마저 사라지면서, 수입 우유에 남아 있던 마지막 가격 장벽이 걷혔다. 그렇게 처음 맞는 완전 개방의 여름에 흰우유 시장 1위 서울우유가 꺼내 든 카드는 가격이 아니라 '신선'이다. 시간을 멈춰 바다를 건너온 우유와 시간과 다투며 착유 이틀 만에 매대에 오른 우유가, 올여름 같은 출발선에 섰다.
빗장이 풀린 첫여름
자유무역협정(FTA) 이행에 따라 한 자릿수까지 내려앉았던 수입 멸균우유 관세가 올해 마침내 0이 됐다. 미국산이 1월에, 유럽산이 이달 1일부터 차례로 빗장을 풀면서 한국 유업은 처음으로 관세 없는 여름을 맞게 됐다. 게다가 개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아, 2033년 이후에는 호주 · 뉴질랜드산 관세마저 사라진다. 낙농 강국의 저가 우유가 차례로 안방을 두드릴 길이 열렸다.
수입산이 들고 온 것은 가격으로, 리터당 1,900원 안팎의 폴란드 · 독일산이 3,000원을 웃도는 국산 신선우유 곁에 가격표를 나란히 달면서 국산의 60% 선이라는 격차를 만들어냈다. 천 원 남짓한 그 틈이 장바구니를 망설이게 한다.
물량 증가세도 가파르다. 관세청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멸균우유 수입량은 5만740t으로 역대 최대였는데, 올해는 1~5월에만 전년 동기보다 48% 늘어난 2만1,643t이 들어왔다. 보관이 쉽고 값이 싼 덕에, 우유를 원재료로 대량 소비하는 카페와 베이커리 같은 수요처부터 파고든 결과다.
줄어드는 손, 환율이라는 방파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흰우유를 집어드는 손 자체가 줄고 있다. 낙농진흥회 집계에 따르면 1인당 흰우유 소비량은 2021년 26.6㎏에서 2024년 25.3㎏으로 완만히 빠지다가 지난해 22.9㎏으로 한 해에만 9.5% 주저앉았는데, 이는 1986년 20.1㎏ 이후 40년 만의 최저치다. 저출산과 대체음료 확산에 1인 가구 증가까지 겹치며 소비 기반을 함께 무너뜨린 결과다.
파이는 작아지는데 그 파이를 무관세 수입산이 한 입씩 베어 무는 형국이지만, 당장의 잠식 속도는 환율이 누르고 있다. 한 우유업계 관계자는 "고환율 탓에 수입산 수요가 크게 늘진 않았지만, 환율이 안정되면 가격 경쟁력이 살아날 것"이라며 카페 · 베이커리 같은 기업간거래(B2B) 시장부터 수입 우유가 파고들 가능성을 짚었다. 가정의 냉장고보다 대량 수요처가 먼저 흔들릴 수 있다는 얘기다.
이 파고 앞에서 유업계의 발걸음은 뚜렷이 갈라졌다. 매일유업 등 경쟁사들이 단백질 음료와 식물성 음료처럼 '우유 바깥'에서 활로를 찾는 사이, 점유율 43.9%로 흰우유 시장 1위인 서울우유는 우유로 우유를 지키는 흰우유 정공법을 골랐다.
1년과 14일 사이
멸균과 신선을 가르는 기준은 흔히 살균 온도로 설명되지만, 보다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시간을 다루는 관점이다.
멸균우유는 시간을 멈춘 우유다. 135~150℃의 불길로 미생물과 포자까지 태워 없앤 뒤 빛과 공기를 차단한 용기에 무균 충전하기에, 바다를 건너고도 1년을 버틴다. 다만 흔들림이 없는 대신 갓 짠 풍미의 결은 옅어진다.
신선우유는 반대로 시간을 줄이는 우유다. 영양과 풍미를 다치지 않는 선에서만 열을 가하는 탓에 변질을 부르는 일부 균이 남고, 그래서 냉장의 끈을 한순간도 놓지 못한다. 유통기한 11~14일이라는 짧은 창 안에 착유와 냉각, 집유, 살균, 배송을 모두 끝내야 하니, 그 시스템 전체가 곧 제품의 본체인 셈이다.
그 14일은 4℃ 안팎을 지키는 릴레이 경주다. 젖소의 체온인 37℃ 안팎으로 따뜻하게 나온 원유를 착유 직후 냉각 탱크가 식히고, 보냉차가 공장으로 옮기고, 살균을 거친 뒤 다시 냉장 물류를 타고 매대에 닿기까지 바통을 한 번이라도 떨구면 14일이라는 유통기한 자체가 무너진다. 수입 멸균유의 1년이 '기술로 멈춘 시간'이라면, 신선유의 14일은 '매일 새로 뛰어야 하는 시간'인 까닭이다.
그 차이는 결국 혀끝에서 드러난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우유의 첫 모금이 서늘하게 입안을 적시면 옅은 단맛이 먼저 오고, 뒤이어 풀내 같은 고소함이 번지는데, 그 고소함은 시간이 쌓아 올린 맛이 아니라 시간을 줄여 지켜낸 맛이다. 멸균유가 '시간을 이기는 기술'이라면 신선유는 '시간과 경주하는 기술'이며, 그 경주의 값은 가격표에 찍히지 않는다.
유전자로 다시 거는 빗장
국산 진영의 또 다른 카드는 우유 그 자체를 다시 빚는 일이며, 그 얼굴이 서울우유의 'A2+우유'다. 5년간 약 80억 원을 들여 A2 단백질만 지닌 젖소의 원유로만 만든 프리미엄 흰우유로, 2024년 4월 매대에 올랐다. 반응은 숫자로 돌아왔다.
지난 4월 집계 기준 출시 2년 만에 누적 판매 1억1900만 개를 넘겼는데, 용량으로 치면 약 2,400만ℓ로 전 국민이 200㎖ 두 팩씩 비운 분량이다. 우유를 드는 손이 줄고 수입 멸균유가 밀려드는 와중에 거둔 성적이기에 더 눈에 띈다. 서울우유는 "수입 멸균유 확대 등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신선도와 고품질 원유를 앞세운 프리미엄 전략이 주효했다"고 풀이했다.
라인업도 넓어지고 있다. 180㎖부터 2.3ℓ까지 용량을 펼친 데 이어 상온에 두는 멸균 제품을 곁에 세웠고, 앞으로는 유아용 · 중장년용처럼 소비층을 가른 제품으로 가지를 칠 계획이다.
문진섭 서울우유협동조합장은 "A2+우유가 정체된 국내 우유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를 마련했다"며 "2030년까지 A2 원유 전환의 단계적 확대를 목표로, 집유량과 A2 낙농목장 등 생산 기반을 지속 확충해 A2우유 대중화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밀어붙일 여력도 확인됐다. 서울우유 관계자는 "시장 수요 증가로 집유되는 A2 원유 물량은 모두 판매되고 있으며, 집유량도 초기 대비 2배가량 늘었다"며 "A2 원유로 순차 교체를 진행하면서 그릭요거트 · 푸딩 · 아이스크림 등으로 유제품을 다각화하겠다"고 전했다.
이 프리미엄을 떠받치는 것은 눈에 띄지 않는 손길이다. 서울우유는 체세포수 · 세균수 모두 1등급인 원유만 쓰면서 목장에서 수유, 생산, 제품까지 네 단계로 나눠 A2 단백질을 검사하고, 여기에 세균과 미생물을 한 번 더 걷어내는 'EFL'(Extended Fresh Life) 공법까지 입혔다. 소비자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자리에 신선을 지키는 기술을 한 겹 더 깔아둔 공정이다.
A2의 무게는 가격표 그 이상이다. 유전형질을 가려 따로 짜고 따로 모으는 일은 국내 목장과 촘촘한 관리망 없이는 성립하지 않기에, 바다를 건너온 멸균유가 구조적으로 따라설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연세유업 등도 전용목장 A2 제품으로 이 매대에 함께 섰다.
국회로 간 우유
기업의 응수만으로 버티기엔 판이 크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FTA 체결 전 65% 선이던 우유 자급률이 최근 45% 안팎까지 내려앉으면서, 우유가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니라 식량안보의 문제라는 인식이 정치권으로 번진 까닭이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과 한국낙농육우협회는 국산 우유 · 유제품 자급률 확대 예산, 노인 · 학교 우유급식 지원 제도화, 우유 원산지 표시제 도입 등을 담은 정책협약을 맺기도 했다.
다만 약속과 이행 사이의 거리는 아직 좁혀지지 않았다. 낙농예산 증액안 45억 원이 지난해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를 통과하고도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고, 올해 두 차례 추가경정예산에서도 제외됐다.
낙농육우협회는 "정부가 예산 확대를 통해 정책의 불확실성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국산 우 유·유제품의 공급 기반은 붕괴될 수밖에 없다"며, 유제품 순수입국인 일본이 해마다 3,500억 원 이상의 생산자 보급금으로 자급률을 60%대로 지키는 사례를 들었다.
업계가 요구하는 또 하나의 빗장은 원산지 표시다. 수입 멸균유 대부분이 카페 · 베이커리 등 B2B 경로로 흘러들다 보니, 소비자가 알지 못한 채 외산 우유를 마시는 구조가 굳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음식점 원산지 표시 대상 품목에 우유를 추가해, 국산 우유가 원재료로 안정적으로 쓰일 수 있는 시장 환경을 만드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새벽을 건너오는 우유
무관세 첫여름의 가격표만 보면 국산 우유의 자리는 눈에 띄게 좁아졌다. 그러나 한쪽이 시간을 멈춰 바다를 건너오는 동안 다른 쪽은 시간과 다투며 매일 새벽을 건너오고 있으며, 가격의 빗장이 풀린 자리에 유전자와 신선도로 다시 빗장을 거는 일이야말로 1위가 택한 응수다.
그 새벽의 값을 시장이 어떻게 매길지는 결국 소비자의 몫이지만, 1,000원의 공습이 거세질수록 14일의 과학도 한층 날카로워지리라는 것만은 내다보기 어렵지 않다. 올여름 냉장고에서 막 꺼낸 우유를 컵에 따를 때, 표면에 찬 김이 서리고 첫 모금이 서늘하게 고소할 때, 그 한 잔에 담긴 시간의 무게를 한 번쯤 떠올려볼 일이다.
[폴리뉴스 조자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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